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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어떻게 우리의 속내를 드러내는가

by 박종호

아무래도 오늘은 글이란 것이 나올 것 같지 않다. 바쁜 하루였다. 빈 건물에서 퇴근하여 집으로 왔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냉동실에 한 장씩 랩으로 싸서 얼려둔 식빵을 꺼내어 토스트기에 넣었다. 나는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거의 없지만 오늘은 냉장고에 남은 크림치즈를 곰팡이가 피기 전에 얼른 먹어치워야 한다. 남아있는 식빵 세 조각을 모두 구워 크림치즈를 끝냈다. 딸기잼은 한 번에 다 먹기에는 너무 많이 남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술이 남아 안주를 더 시키고 안주가 남아 술을 더 시키게 되는 순환 참조의 상황이 떠올랐다. 어느날 달달한 것이 댕기면 남은 잼들을 숫가락으로 퍼먹어 끝장을 내리라.


띵-똥-.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문 밖에서는 대답이 없다. 우체부나 택배가 오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아마도 옆집 사람이 시킨 배달 음식이 잘못 배달된 모양이다. 요즘 배달 음식은 문 앞에 놓아두고 벨을 누르고 가 버린다. 긴 팬데믹이 남긴 비대면 문화란 불필요한 격식을 사라지게 했다. 누군가를 마주할 일이 없으니 옷을 좀 헐거이 입은 채로도 문을 열어 음식을 들여올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시킨 음식이 내 집 앞에서 밤을 새면 안되니 나는 배달원이 사라지기 전에 그를 부르려 성급히 문으로 다가갔다. 잠깐만요! 내가 조금 더 시간이 걸렸던 것은 무어라도 몸에 걸쳐야 했기 때문이다.


덜컥. 문을 열고 머리를 먼저 문 밖으로 빼었다. 저기요! 하고 큰소리로 부르려는 데 나는 깜짝 놀라 얼어버렸다. 문 앞에는 진한 곤색의 수트를 입은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 명은 확 젖혀지는 문을 순간적으로 피하였는 지 몸의 중심이 뒤로 빠져 있는 어중간한 모습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보고 있던 시선을 정면으로 돌려 그들을 보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잘 차려입은 모습이지만 아직 더위가 다 가시지 않은 날씨에는 지나치게 격식을 차린 옷차림이다. 누구시지요? 나는 짐작되는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건냈다. 굽혔던 허리를 펴고 최대한 당당하게 보이려 했지만 한 손으로는 언제라도 문을 닫아 잠글 수 있게 문고리를 꼭 쥐었다.


혹시 모모모씨 아니신가요? 그들은 나의 이름을 확인했다. 네 맞는데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지요? 저희들은 머시기머시기 그룹 송회장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머시기머시기? 처음 들어보는 회사다. 이런 이런 내 정보가 어디에 팔린걸까?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구나! 그들은 내가 다음 말을 꺼내기 전에 양복 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어 나에게 건냈다. 명함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누구나 돈 몇 푼으로 거짓 명함을 만들 수 있지만 상대가 명함을 건내면 왠지 그 상대가 실체가 있다고 믿게 된다. 그들의 명함은 시대에 맞지 않게 모두 한자로 적혀 있다.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너무 복잡한 한자인 탓에 그들의 성씨 밖에 읽을 수 없었지만 한 사람은 부사장, 한 사람은 상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하고 물으려는 데 부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 회장님의 성함은 송 땡자 땡자이십니다. 선생님 조부님의 오랜 동업자이셨지요. 아, 송사장님! 나는 어릴 적 명절이면 할아버지 집에 찾아오시던 송사장님을 기억한다. 그 분은 아주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 땅땅한 체형을 가진 분이셨다. 화교였던 송사장님은 실은 증조할아버지 가게의 점원이었고 성실함과 수완을 인정받은 후에 증조할아버지의 뜻으로 할아버지와 젊었을 때부터 함께 사업을 일구었다고 들었다. 할아버지가 은퇴를 하실 즈음 그 분도 은퇴를 하신 것으로 아는 데, 그 후에도 명절이면 빠지지 않고 선물을 들고 할아버지 집을 찾아 오셨다. 아, 그 송사장님! 나는 나쁜 일에 연류된 것은 아니구나 하고 안심하면서도 동시에 그 분이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였던 것을 떠올리고는, 아니 아직도 살아계세요? 라고 물을 뻔 했다. 부사장은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 지, 네 아직 살아계십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다시 물었다. 이 분들을 집에 들여 차라도 대접해야 하나란 생각도 들었다. 부사장은 다시 아닙니다. 오늘은 말씀만 전하고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오, 부사장이란 사람은 독심술 같은 것을 하는구나. 네, 말씀하시지요. 예 저희 회장님께서 찾으신 이유는... 그는 여러번 연습을 한 듯이 아주 긴 이야기의 요점을 추려 짧고 간결하게 그들이 이곳에 온 연유를 설명했다. 아니, 그래서 그 큰 돈을 저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웃음이 삐져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네 게다가 전액을 현금과 골드바로 전하라는 분부가 있으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장소를 지정하여 주시면 그곳으로 전달 드리겠습니다. 아, 네... 그 엄청난 돈다발과 금괴가 어디에 다 들어가려나? 문득, 그들에게 당장 대답을 해 주어지 않으면 송회장님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안전한 곳? 아니 티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해, 남들이 알면 골치 아파지니까. 생각은 동시 다발적으로 이어졌다. 그 돈으로 무얼 해야하지? 일단 강남에 건물을 몇 채 사서 큰 뭉치 돈은 땅에다가 넣어 두어야 하나? 와이프 한테는 말을 할까 말까? 이거 내일부터는 이 일이 티가 나지 않도록 각별히 입조심해야겠어...


씁, 입에서 흐르는 침을 손으로 훔치며 깨었다. 오늘은 무슨 글을 써야하나 고민하다가 앉은 채로 꾸뻑 졸았다.

입력창의 커서가 너 참 웃기는 구나 하며 껌뻑 거린다. 금요일, 치맥이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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