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겨울을 건너 베트남에 도착하였다. 5시간의 비행시간이 6시간으로 늘었다. 대만 쪽에 태풍이 올라와 항로가 조정되었기 때문이란다. 11월에 태풍이라니, 이변이 상수가 되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4년 만의 베트남 출장이다. 4년 전에는 하노이 전시에 참가하였다. 이번에는 호치민이다. 지도로 보아서는 하노이는 북쪽, 호치민은 남쪽이다. 북쪽의 공산 정권이 베트남을 통일하며 남쪽의 수도 사이공을 북베트남 수장의 이름인 호치민으로 바꾸었단다. 남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슬픈 역사이지만 호치민에게는 도시에 자기 이름을 떡 박았으니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셈이다.
입국 심사장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국 심사 공무원은 어찌나 꼼꼼하게 자기 일을 하던지 한 사람 한 사람 길게 잡아두고,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은 점차 줄 뒤에 서며 심사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아마도 남베트남의 패전이 확실해졌을 때 이곳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도 이렇게 길게 줄을 섰으리라. 이제 베트남은 관광과 투자로 찾아드는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특히 중국에서 제조업을 하던 한국 사업가들에게는 베트남은 중국의 높아진 임금과 미국향 중국 제품의 관세 폭탄에 대한 대안으로 새롭게 제조 기지로 부상하였다. 어쩐지 비행기가 만석이었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베트남은 한 여름 날씨이다. 한국에서 셔츠와 양복을 입고 온 나는 금세 땀이 흘렀는 데 배웅 나온 코트라(무역공사) 과장의 말로는 요즘 들어 시원해진 날씨라 한다. 그 말인즉슨, 진짜 여름맛을 아직 못 보았다는 말씀이다. 버스는 전시에 참가하는 몇 업체를 태우고 전시장 옆 호텔에 도착했다. 이번 전시는 중국의 무역국이 주최하는 전시이다. 그다지 크지 않은 전시이지만 꽤 많은 한국 업체가 참가하였다. 호텔에 짐을 풀고 서둘러 부스를 장식하러 서둘러 전시장으로 향했다. 전시 전날 저시장은 그야말로 공사판이다. 시공 업체들은 너른 전시장에 벽을 세우고 페인트를 칠하고 선반을 여기저기에 붙인다. 에어컨을 켜지 않아 덥고 환기가 되지 않는 전시장 부스를 노련하고 빠르게 장식을 마치고 서둘러 나왔다.
저녁에는 한국관 주최 기관인 코트라의 사전 설명회가 있었다. 베트남 시장에 대하여 잘 준비된 발표를 마치고 수출 수입에 관련된 여러 가지 규제와 법률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비행기에서 내려 바로 전시장에서 장치를 마쳤을 참가사들을 위하여 간결한 발표였다.
새벽에 깨어 시계를 보니 3시이다. 한국 시간으로는 내가 언제나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는 5시이다. 우리의 생체시계는 의외로 정확하게 맞추어져 있다. 외국에 나와 시차를 극복한다고 어설프게 자고 일어나는 시간을 바꾸면 오히려 크게 피로하게 되고, 귀국하여서는 다시 배꼽시계를 조정하느라 고생을 하게 된다. 나는 침대에서 선잠을 자며 누워있다 5시 즈음에 방을 나와 호텔에 달린 체육관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에서 온 듯한 투숙객들이 체육관으로 들어와 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전시는 아침 9시에 시작되었다. 아침에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 데 알고 보니 우리가 전시장에 들어오고 나서 밖에 엄청난 비가 내렸다고 한다. 비가 멈추고 12시 즈음에야 사람들이 방문객들이 밀려들와 왔는 데 전시 규모에 비해서는 꽤나 많은 바이어들이 전시장을 찾았다. 물론 전시는 낚시와도 같다. 나의 제품을 진열해 놓고 그것을 잘 팔아줄 유통상이나 수입업자를 기다리는 일이다. 전시를 한번 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말을 나눈다. 전시를 많이 참가한 사람들은 바이어의 얼굴과 걸음걸이만 보아도 바이어의 유형과 규모를 알아맞춘다. 믿거나 말거나다.
베트남어 통역과 샘플링을 도와줄 키우에가 왔다. 키위에는 지방에서 올라와 호치민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전공하였다. 내년 2월에 졸업하는 키위에는 프리랜서로 통번역일을 하고 있다. 두 번째의 베트남이지만 일관되게 느끼는 것은 베트남 사람들은 친절하고 착하다는 인상이다. 어쩌면 외국인이 듣는 그들의 부드러운 말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속속들이 알면 별로가 되어버리는 일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외국에 가서 느끼는 인상이다. 여행이나 출장을 가면 특히 친절하고 편안한 나라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느끼고 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한국에 왔던 외국인들 중에 한국 사람들이 너무 친절하다고 말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그들이 무척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바쁘게 전시 첫날이 지나갔다. 바쁜 날은 시간이 빨리 간다. 체력도 급격히 소모된다. 이럴 때는 잠이 보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