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가치는 오늘의 가치이다.
일본 텔레비전에는 오랜 시간 잠겨있는 금고를 열어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주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금고이거나 고가구 점에서 수집한 금고들이다. 일본 전국에서 굳게 닫힌 채 잠들어 있는 제보를 받으면 프로그램은 금고 전문가와 함께 촬영팀을 보낸다. 금고를 보관하고 있는 집이 어느 시대에 이름을 날렸던 집안이거나 어느 유명인사의 집안이라면 사람들의 궁금증은 최고조에 이른다.
일본은 오타쿠가 많은 나라이다. 잠겨있는 금고를 열고 오래된 금고에 대하여 조회가 깊은 금고 전문가들은 내시경처럼 생긴 특수 카메라로 금고를 분석하고 청진기로 소리를 들으며 금고의 암호를 풀기 시작한다. 금고들 중에는 그동안 수많은 고금고를 열어온 전문가도 사나흘이 걸려서야 여는 금고도 있고, 때로는 금고의 자물쇠를 부수어서야 열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금고를 연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굳게 잠겨있는 금고 안에 무엇이 있었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는 걸까. 물론 금고의 역할은 남이 탐하여 훔쳐갈 만한 귀한 물건을 보관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무거운 금고문이 열릴 때 번쩍이는 금괴가 있거나 현찰 더미가 있으리라 기대한다. 덜컹, 금고의 자물쇠가 열리면 오랫동안 닫혀있던 금고의 문이 피익하고 열린다. 사람들의 기대가 최대치가 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상상에 따라 씀씀이를 상상한다.
금고의 문이 열리고 그 안의 서랍들이 하나둘씩 차례로 열리면 그때부터는 진실의 시간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금고를 열며 사실 사람들의 기대와 상상만큼 엄청난 보화가 나온 적은 없었다. 현금 다발과 금괴가 나오기 보가는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회사의 증권이 나오거나 여러 시대나 나라에서 모아둔 동전 더미가 나오기는 한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금고 안에서 나오는 물건의 대부분은 극히 개인적인 물건들이다.
금고 안에서는 오래된 사진들, 긴 시간 적어둔 일기장, 회사와 가게의 장부 등이 나온다. 흑백 사진과 꼼꼼하게 손글씨로 적은 노트들은 이 금고의 주인이 살아있는 당시에는 금고에 보관할 만큼 소중하거나 비밀스러운 물건들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 비밀을 지켜야 할 사람도 비밀의 주인공도 사라져 그저 수많은 의문을 지닌 물건이 되어버렸다.
금고 열기 프로그램은 금고 안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끌어낸다. 금고가 열리는 과정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에게 흥미와 긴장감을 선사한다. 보는 사람들에게 실망과 의문과 허무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우리는 알 수 있다. 당시에 금고에 들어갈 만큼 소중했던 무엇이, 비밀스러웠던 무엇이 그저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오늘의 소중함일 뿐이다. 비밀도 고민도 시간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니 소중한 것은 금고에 넣어 두고 묵히기보다는 꺼내어 사용하고, 남이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은 굳이 금고 안에서 묵히지 말고 잊어버리면 그만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