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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아 Jul 25. 2016

여름과 변덕

수박은 좋지만

너에게


김나는 셀로판지가 온몸을 감싸는 듯한

여름이다.

난 너에게 여름을 찬양했었지.

여름이야말로 젊은 우리에게 걸맞는

계절이 아니겠냐고


튼튼한 육체를 노출하며 과시하고,

밤 늦게까지 세상의 이곳 저곳을 쑤시며

돌아다녀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여름밤의

이곳저곳은 우리의 몸에 맺힌 땀값만이

입장료라고 연설해댔지.


너는 가을이 좋다고 그랬어.

가을같은 걸 좋아하다니.

역시 너는 어쩔 수 없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걸 좋아하는 건 어쩐지 불공평한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지.

싫은 것들에게 기회를 줘야한다고

느꼈으니까.


입에 넣고 싶지 않은 물기가득한

우거지나물을 가장 먼저 먹어

헤치우듯 말이야


삶에는 그정도의 타협과 자기기만이

없으면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어.


하지만 금방이라도 벌레가 날아다니는

부엌과 상한 음식냄새들이 악몽같이 따라붙는 요즘같은 더위엔

그때 솔직하지 못했던 건 역시 나였다고

인정해.


너는 날 좋아하는 것처럼,

가을을 좋아했는데

나는 여름을 좋아하는 것처럼

널 좋아했거든.



나는 너가 그리워

라고 조심스럽게 적다가

이것도 역시 솔직하지 못한 것 같다고

털어놓을 수 밖에 없어.

너를 그리워하는 내가 좋은거라고

밝힐테니 화를 풀어줘.


어쩔 수 없다고 나는 헤어질 때 말했어

어쩔 수 없는거라고? 너는 반문했지.

나도 몰라. 어쩔 수 있는지 없는지.

하지만 그 땐 정말 너와 끝내버리고 싶었어.

딸은 모두 엄마의 운명을 닮는다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무시무시한 예언은

늘 나를 따라붙었고,

그 때도 어둠속에서 노려보는 고양이처럼 내게 이별을 종용했거든.


다시 새롭게 여름에 대한 대화가

쌓일 때까지, 너를 추억하고 있을게.


한 친구는 왜 내가 헤어져야 했냐고

묻자


그 정도 이기 때문에.


라고 답했어.


정말 옳은 답이었다고 나는

두고두고 생각해.

잘 살아.


쓸쓸하게 마지막에 남겨진 목소리는

어디에도 가 닿지를 못하고

그대로 허공을 맴도는 듯해. 아직까지도.


정말 뜨겁다. 터덜거리는 아스팔트를

내 발걸음으로 으깰 수 있다면.


그 안에 생매장 당한 흙들을 꺼내에 눈 앞에 확인해볼 수 있다면

- 머리카락이 타는 듯한 이 여름에도

안도감을 느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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