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출산시 남편이 해야 할 행동지침

의외로 할게 아주 많다

by 스몰빅토크

둘째아이 임신 31주차.

배가 무겁다. 오늘 오전 발톱을 깎으려고 낑낑대다 결국 포기했다. 새벽3시엔 어김없이 잠에서 깬다. 이제 슬슬 출산 가방을 싸야 한다. 둘째라 그런가. 긴장감이 없고 늘어지기만 한다. 출산 전에 안방 침대 매트리스를 세척해야 한다. 그간 쌓인 먼지나 불순물이 많다. 저 침대에 신생아를 눕힐 수도 있다.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렸더니 "하면 되지"라고 짤막하게 답한다.


하면 되지?

그 한마디에 서늘한 감정이 스친다. 결국 내가 다 알아서 하라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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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남편들이 찍는 출산 브이로그 같은 것들이 알고리즘에 뜬다.

첫째를 낳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첫째는 41주가 지나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초음파 속 몸무게는 3.5Kg 이상인데. 나는 초조했다. 유도분만을 하기로 결정했고, 그날 오전 6시에 입원했다. 촉진제를 넣자마자 태아의 심장박동이 급격히 떨어졌다. 간호사 분들이 긴급하게 우르르 몰려오더니 촉진제를 멈췄고, 나의 배에 뭔가 마사지(?) 같은 걸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하시죠. 촉진제 때문에 태아 심장박동이 느려져서요." 라는 말을 듣자 걱정이 앞섰다.


그날은 하루종일 걷고, 짐볼을 하고, 움직여봤는데, 그냥 지나갔다. 그러다 12시간 정도 후에 진통이 오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한참 멀었어요." 내진을 하던 간호사가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입원하셔서 하루 잠을 자고 체력을 비축한 뒤에, 내일 마저 하시죠." 아이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는 나도, 남편도 이 시간은 너무 답답하고 느리게 흘러갔다. 남편은 분만 침대 옆 간이 침대에 누워서 노트북을 했다가, 휴대폰을 했다. 나를 가끔씩(?)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봐주긴 했지만, 사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속절없이 미움이나 받고 있는수밖에.


다음날 새벽에도 진통 때문에 깼다. 새벽 6시에 다시 분만실로 내려오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내려갔다. 머리는 물론 안감았고 입에선 텁텁한 느낌이 들었다. 촉진제를 맞고 진통을 한다고 몸에서 땀냄새도 나는 기분이었다. 관리사분이 오셔서 다리와 팔을 마사지 해주셨다. "행운을 빌어요. 오늘은 아이를 만나실 수 있을거예요." 그렇게 유도분만을 위해 입원한지 24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오전 10시쯤 남편이 아침을 먹고 내려왔다. "어제보다 얼굴이 편해보이는데?" "편해보인다고? 죽을 것 같은데." 이날도 촉진제를 맞았고, 무통주사를 제때 맞을 수 있었다. 아이가 내려와줬고, 마침내 자궁경부가 열리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누군가 배와 골반에 폭발물을 설치해놓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3분마다 터지는. 아니 2분마다 터지던가.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남편은 멀찍이서 나를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다 열렸어요." 내진이라는 게 휘젓고 갔다. 나를 반으로 밀어 가르는 기분이었다. 그때가 11시였다. 그런데 분만 담당 선생님이 오시지 않았다. 이상하다. 진통은 계속 되고, 아이는 내려왔댔고, 다 열렸다는데 왜 출산을 안하지? "간호사 선생님 좀 불러줘." 간호사 선생님이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담당 교수님이 출근을 안하셔서 2시에 분만 시작하시죠." 이게 무슨 말이야? 나는 당장 낳을 것 같은데? 나는 내가 들은 말이 맞는건지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뭐라 반박할 힘도, 항의할 기운도 없었다. 아 그냥 아직 때가 안됐다는 말인가. 그렇게 반 실신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2시가 됐다. 담당 교수님아라는 분이 들어오셨고, 장갑을 끼면서 말했다. "자 시작합시다."


본격적인 출산이 시작되자 남편은 나가 있었다. 그렇게 30분만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그런데 너무 담당 교수님을 오랫동안 기다린 느낌이었다. "오빠, 그때 내가 들었던 말이 맞아? 담당 교수님 출근 시간이 아직 안돼서 좀 기다려야 한다는 말?" 그러자 남편은 애매한 표정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뭔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아." 나는 내가 워낙 정신이 없었기에, 잘못 들은건 줄 알았는데. 남편도 그렇게 기억을 한다면 분명 잘 들은게 맞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산모들은 분만을 당장 앞두고 있는데, 교수의 출근시간만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물론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랬겠지만. 너무 오랫동안 기다린 탓일까. 나는 한동안 훗배앓이와 산통의 후유증을 계속 겪어야 했다. 누가 자연분만은 일시불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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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첫째 출산 후, 둘째는 다른 사람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누군가 둘째 계획을 물으면 정말 그렇게 답할 때가 있었다. "지금 남편 말고 다른 사람 아이면 생각해 볼게요." 그만큼 출산과 육아를 겪으면서 남편에게 많은 실망과 불만을 갖게 됐다. 둘째의 출산 때는 그 산부인과에서 출산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남편과 분만 병원을 모두 바꿔버리는 거지. 방긋방긋 웃으며 커가는 아이를 보는 건 행복했지만, 남편의 무신경과 배려 없음에 대한 불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모유수유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남편이었지만, 나는 모유수유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새벽수유는 모두 내가 도맡았다. 자연히 밤에 아이가 울어도 미동도 없이 잠을 자는 건 남편이었다. 제왕절개를 했다면 긴 입원기간동안 남편의 수발을 받았겠지만, 자연분만을 했기에 남편의 도움이 딱히 필요하진 않았다.


"출산할 때 남편분이 손 잡고 응원해주시는거예요?"

나중에 제왕절개를 한 엄마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아뇨...출산할 때 손은 단 한번도 안잡은 것 같은데요."

왜 안잡았는지는 기억이 잘 나진 않는데, 그냥 안잡았던 것 같은데.

그래서 첫아이 출산 이후 그렇게 사이가 나빠졌던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출산 과정에서 남편의 역할이란 건 얼마나 필요한걸까?

아기를 꺼내는 건 의료진의 몫이고, 산모의 고통을 줄이는 건 마취과의 영역이다. 남편이 할 수 있는건 기껏해야 손을 잡아주거나, 물을 떠다 주거나, 등을 문질러주거나, 의료진을 불러주는 정도다. 그래서 많은 남편들이 분만실 앞에서 "뭘 해야 할까?" 라는 멍한 상태에 빠진다.


2007년 Cochrane Database of Systematic Reviews에 실린 대규모 메타분석 연구는, 출산 시 지속적인 동반자 지지(continuous support during childbirth)가 산모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이 연구는 16개국에서 수행된 무작위 대조 시험들을 종합한 것인데, 결과는 꽤 놀라웠다. 출산 과정에서 파트너나 동반자의 지속적 지지를 받은 산모는 제왕절개율이 낮아졌고, 분만 시간이 단축됐으며, 진통제 사용량이 줄었고, 출산 후 산후우울증 발생률도 낮게 나타났다.


여기서 핵심은 '지속적'이라는 단어다. 잠깐 얼굴 비추고 대기실에 나가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진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아이가 나오는 순간까지 옆에 있는 것. 그 물리적 존재 자체가 산모의 옥시토신 분비를 촉진하고, 코르티솔(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낮추는 효과가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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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남편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다만 거기에 있어야 한다.


둘째 출산이 다가오면서, 나는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때 아쉬웠던 부분들을 남편에게 미리 말해두고 싶었다. 하지만 "당신 첫째 출산 때 이랬잖아"라고 과거를 꺼내면, 우리의 대화 패턴상 방어와 반격의 루프에 빠질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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