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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아 Feb 10. 2017

잠들지 않는 정의를 부탁해

권석천 기자의 글쓰기

중앙일보 월요일자를 받아볼 때마다 설레던 시간이 있었다

권석천 논설위원이 시시각각 칼럼을 담당했을 때다.

지금은 JTBC로 인사이동해 그의 글을 예전처럼 볼 순 없지만

권위원과 손석희 사장님이 만드는 뉴스룸은 날로날로 위대해지고 있다.


권석천 위원은 법대를 졸업해 경향신문 입사 후 중앙일보 경력직 기자로 적응하기 위해 분투하며

늘  '주류와의 거리'를 의식하며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매주 권 위원의 글을 한자 한자 필사했던 건

메이저 일간지에서 볼 수 없었던 '마이너리티에 대한 감성'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래서 2012년 1월부터 2015년 하반기까지 기고했던 칼럼들이 모여있는 이 책을 들어

밑줄을 좍좍 긋고 또 한권의 책을 출판하는 심정으로 필사했다.

이 시기는 대한민국사에 변곡점을 찍었던 기간이다.

이 책은 그 변곡점의 실패에 대한 진단서다.

오늘의 국정혼란 사태를 야기한 수많은 나비효과들에 대한 우려가 고스란히 기록돼있기 때문이다.



2012년에 기고한 '자베르 경감의 눈으로 본 이명박 정부 5년' 이라는 칼럼에는

이전 정권을 심판하는 차기 정부의 권한에 대해 묻고있다.


차기 정부는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법치주의는 법만능주의가 아니다

권력자의 횡포를 막고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다.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것 못지않게 법을 제대로 만들고 공정하게

신중하게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법질서가 힘 있는 자의 편에 서 있는 건 아닌지.

- 자베르 경감의 눈으로 본 이명박 정부의 5년 (2012)


정치심판은 전적으로 국민의 몫이자 역할이다.

국민들이 투표와 민주적 활동으로 정치 책임을 물어야한다.

정부는 이 과정이 보다 공정하고 의사진행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에 힘써야한다.

그 이상의 역할은 권한남용이자 정치적 보복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정치보복의 굴레는 차기정권과 차차기정권으로 연쇄적으로 이어간다.

대한민국 정치계의 악습이 거듭되는 것이다.

광장의 분노에 대한 해법은 책임자들을 감옥에 넣는 것만이 아니란 얘기다.

어차피 애초에 그들에게 권한을 위임한 것 또한 국민이었다.

단순히 특정 당의 잘못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한다면 같은 문제는 반복될 것이다.

그게 권력의 속성이니까.


'정치검찰'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 또한 이같은 적폐가 늘 반복되기 때문이다.

노무현 특검 때 칼잡이를 잡았던 우병우 전 수석이 어떻게 박근혜 정부에서 '3인방'이 될 수 있었겠나. 

시민의 집단적 선택 이상으로 진행되는 정치적 심판은

결국 개인의 야망과 욕망이 실현되는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국민으로부터 나온 검찰권을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며 검찰 개혁안을 발표했던

박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누가 기억하고 있을까.

대연정론은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유의미한 카드다.


박대통령이 펼쳐놓은 인사명단을 보면 가슴이 좀 답답하긴 하오.

'밀봉인사', '묻지마 인사' 때문은 아니고 2인자, 실세 후보자가 보이지 않아서요.

작업에 들어가려면 라인이 보여야 하는데 그게 선명하지가 않아  - 박근혜 정부도 별 수 없을걸 (2013)


2013년 2월 새 정부의 출범으로, 친인척-측근 비리가 더이상 재연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이 칼럼을 기고했다고 한다.

이제는 왜 이 라인들이 선명하지 않았는지 설명이 된 이후다.

골프장과 성형외과, 맛사지샵 인맥으로 구성된 리스트들.


대권의 마력에 중독된 한국의 대통령들은 권좌에 앉아 자기 뜻대로 세상을 바꾸려다 실패를 반복했다.

'실세' 완장을 찬 측근들만 단물을 빨았다. 미국 대통령을 보라.

의회에서 법안 한 건을 통과 시키기 위해, 의원들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 옆을 지키는 건 측근이 아니라 참모다. 그래서 권력엔 부패가 따르지만 권한엔 책임이 따른다.

이것이 권력과 권한의 차이다. - '대권'의 사용을 금하라 (2012)


당명을 바꾸는데 소모하고,

대선 출마와 불출마 선언을 모호하게 번복하며 간 보는 요즘 정치권.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정치적 자정능력이 생성되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이상일까.


오랜만에 신문-방송사들이 비슷한 주제를 놓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이 임기 말의 예외적 시공간에만 있다고 믿고 싶지 않다.

기자들이 다시 팩트와 근성으로 특종 싸움을 펼쳤으면 한다.

그리하여 동료, 후배 기자들 가운데 슈퍼 히어로가 나오길 기대한다. 아니, 절박하게 염원한다.

그래야만 우리 언론에도 새로운 희망의 지평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 기자들은 어디 있었나. (2012)


4년 후, 이 희망은 실현된다.

JTBC 심수미 기자, 이가혁 기자 등 어려운 시기에 기자들이 해냈다.

이 힘든 시간에 뉴스룸마저 없었으면 어쩔뻔했나.

손석희라는 영웅이 없었다면 국민들은 어디에 마음을 기대볼 수 있었을까.

그래서 리더가 중요하다. 손석희 사장이 진두지휘하는 뉴스룸의 뉴스 컨텐츠,

그리고 그 안에서 맘 놓고 물 만난 물고기마냥 마음껏 취재하고, 발언하는 기자들.

진심으로 이런 모습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가치와 신념을 올바르게 이끄는 리더와 그를 따르는 크루들이

자신의 창의성과 도전을 향해 나갈때 국가 변혁이 이뤄지는 것이다.


개개인의 취향을 드러내야 할 SNS 공간도 옳고 그름의 무시무시한 심판대가 되곤 한다.

한 대학 교수는 "트위터가 사실상 언론 매체의 기능을 하고 있는 만큼 언론 중재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 아니겠느냐"고 말한 적 있다. 그에게 논문을 써보시라고 했더니

"트위터 사용자들에게 신상털이 당할 것"이라며

극도의 공포감을 나타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자들은 "민감한 현실을 말하지 말라. 차라리 이상과 원칙에 대해 말하라"고 조언하는 것인가.

개인에겐 소중한 삶의 노하우이겠으나 사회적으로도 생산적인지 의문이다.

- 우리는 옳은 얘기만 하며 살지 (2012)


SNS에 정치성향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나 역시 일상의 소소함을 공유하는 SNS에 정치라는 주제를 띄울 때

내 소식을 팔로우 하는 지인들에게 거부감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가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그렇지만 정치란 곧 일상이다.

문득문득 스치는 생각들과 사로잡힌 주제들이 오늘날 정치와 무관할 수 없고

내가 나아갈 방향들과 선택들에 영향을 주는 큰 물줄기다.

그런데 정치 얘기는 안하는 게 좋겠다니.

드러내지 않는 게 좋겠다니.

마치 보다 자유로운 '성'에 대한 논의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창하며

겉으로는 쉬쉬하는 보수적인 분위기와 뭐가 다르지?

물론 나 또한 알고지내던 사람이 정치성향을 밝혔을 때

조금 달라지는 이미지와 덧붙여지는 색채를 발견하곤 한다.

하지만 이건 맞서야 하는 악습이다.

사람이 보다 입체적으로 구성됐을 때 거기에 어떤 편견도, 저열한 감성도 끼어들지 않도록

판단하는 것이 성숙한 성인으로서 관계맺는 방법이다.

그래서 온라인 상에서건, 오프라인 상에서건,

좀 더 활발하게 정치에 대한 논의가, 뜨거운 현안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면 좋겠다.

정치적 무관심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해악이라 말하면서

정작 그걸 방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이켜봐야 한다.


늦기 전에 근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읽고쓰는 것이야말로 세계를 변혁하는 힘"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호모사피엔스는 생물 종의 평균 연령 400만 년 중 20만 년이 지났을 뿐이다.

미술과 음악은 수만 년간 이어져왔지만 문자가 발명된 지는 고작 5000년이다. 문학은 끝났다?

창피하니까 그런 말은 그만두라.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동료들이여, 신문은 끝났다고 징징대지 말자.

읽고 쓰는 인류가 있는 한 활자매체는, 문자로 뉴스를 주고받는

방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 신문은 끝났다? (2013)


나는 정말 읽고 쓰는 게 좋아서 신문방송학과로 갔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이유 또한,

글쓰기에 대한 방법론에 대해 스스로 학습하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멘토가 실종된 이 시대에,

이런 글들을 등대삼아 계속 걸어가다 보면

어딘가 동료가 생길거고 험난한 과정 또한 참고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게 나 스스로에게 적어보는 정의에 대한 정의와 버킷예언서.

<정의를 부탁해> 읽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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