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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다는 분들께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

by 스몰빅토크

제주 여행갔을 때 들고간 책.

요근래 만난 이들에게 이거 제발 읽어봐 들이댔던 책.


왜냐면,

이걸 읽으면 행복해진다.

불안한 눈빛과 거친 생각과 그걸 지켜보는 스스로에 대해 토닥일 수 있다.


회식이 많았던 회사에서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대학에 들어간 뒤로 친구 사귀기가 어려웠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공동체 내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개인의 개성과 다양한 행동들을 인정해줬던 행복한 대안학교 생활을 마친 뒤엔


곳곳에 포진돼 있는 대한민국의 집단주의 문화 (그리고 그 속의 엄숙주의) 와 마주칠 때마다

도무지 이 공기와 흐름 속에선 적응할 수 없는 나라는 인간에 대해 끝없이 자책했더랬다.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유난이야'

'별 말도 아닌데 예민하군'

'대체 뭐가 문젠데'


분명 성인이 된 후에 속해있었던 '집단'속엔 뭔가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언과 생각을 억죄는 강압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의 실체가 대체 뭐였는지 설명해내기에 경험도, 태도도 애매할 수 밖에 없었다.


10시간의 빼곡한 근무를 마치고

앉은뱅이 방석조차 지긋지긋하게 싫은 회식자리에 세시간 동안

부장님의 침튀기는 '자기때 얘기'를 듣고있자면

이대로 내일은 오는가.

이대로 새벽은 오는가.

하는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거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게 된다면

'니가 철이 안들어 그렇지'

'누가 그걸 좋아서 해. 다 똑같아'

하는 자동응답기와 같은 대답이 돌아오곤 하니까.

더이상 아무런 딴지를 걸 수조차 없는 수밖에.


그렇게 모두가 집에 가고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가며,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회식자리에 돈과 시간을 써가며,

개인의 불행도에 높은 기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리고 이 질문과 불만에 대해

'니가 하찮고 모자라서 그런거다 이 애송이'라고 찍어누르지 않고

"다 뒤집어 엎자!!!!!" 라고 말하는 탈꼰대가 나타났다.

진짜 진짜가 나타났다.


<전국의 부장들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말로 연일 화제가 된

문유석 판사의 책이다.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 속 계나에게 건네주고 싶은 책.

전국의 수많은 계나에게 이 책과 더불어 '우리 한국에 끝까지 남아서 좀 바꿔보지 않을래?'

제안해보고 싶은 책.


고정되고 획일적인 것보다 변화와 다양성이 좋고,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선호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다양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느껴보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조용히 가고 싶은 것이 최대의 야심이다.


-나는 야망이 큰 사람이지만 가끔 나의 야망에 대해 마구잡이로 상상을 늘어놓을 때마다

'근데 그러다 누군가 다치면 어떡하지' (혹은 다쳤다고, 상처받았다고 주장한다면)

어쩌지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위인은 못되나?


여기가 싫어서 이민 가고 싶다고들 하지만 세계지도를 놓고 정말로 찬찬히 들여다보면

미국이나 유럽의 열몇 곳을 빼고는 살기 좋다 할 만한 곳이 별로 없다는 것이 유감스러운 인류의 현재임에도 불구하고.


- 누군가 그랬다. 이민을 할거였으면 성형도 했을거야.

그게 무슨말이에요. 성형수술하고 이민하고 대체 같은 맥락일수가 있나요?

돈이 많단 얘긴가.

아니 이게 아니라 그냥 생긴대로, 태어난대로 살아본단 얘기다.

뭔가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 내 얼굴이나 국적이나 그냥 갖고 태어났으니 살아보려한다는 다짐이다.


현대의 합리적 개인은 자신의 비합리성까지도 자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합리적 태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개인주의는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로 전락하여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마저 저해할 뿐이다.


-공동체 의식이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다.

내가 싫은 건 남한테 안하기. 남한테 일어난 비극이 나에게도 일어날 가능성을 언제나 명심하고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기. 이런것만 있어도 사회는 좀 더 서로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려 애를 쓸텐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어사 박문수나 판관 포청천처럼 누군가 강력한 직권 발동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악인을 엄벌하는 것을 바란다. 정의롭고 인간적이고 혜안 있는 영웅적 정치인이 홀연히 백마 타고 나타나서

악인들을 때려잡고 행봇한 사회를 만들어주길 바란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실제 하는 일, 봉급도 중요하지만 '남들 보기에 번듯한지' '어떤 급인지'가 실체적인 중요성을 가진 사회인거다.

그냥 남을 안 부러워하면 안 되나.

남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안 되는 건가.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성찰이 먼저 필요하고,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한 분노도 필요하다.

유감스럽게도 현실사회에는 그저 우연히 부모 잘 만나서 과분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이들도 많다.

인간이 행복감을 가장 많이, 자주 느끼는 원천은 바로 인간이었다.

가족, 연인, 친구, 동료...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많은 쾌감을 느끼는, 뼛속까지 사회적인 동물이었던 것이다.

돈은 어느 정도의 문화적 생활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면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그룹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사회성이 높은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가성비 좋은 행복 전략이라는 관점으로 생각하면 직업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집착할 필요도 없다.

우선 자기 힘으로 생존하는 것이 생명체의 기본 사명이므로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자기가 선택가능한 직업 중 최선을 선택하여

생계를 유지하되, 직업은 직업일 뿐 자신의 전부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취미 활동, 봉사, 사회 참여 등 다양한 행복 활동을 병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운동을 잘하든 못하든 누구나 최소한 한 가지 재능은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재능 말이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주는 재능.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재능. 친절을 베푸는 재능.

그렇다면 기술 발전으로 창출되는 막대한 부의 적정 부분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조세로 거두고, 이를 재원으로 인간을 돌보는 무궁무진한 서비스 분야의 고용을 창출해,

내수시장을 활성화시키는 선순환이 가능할 수 있다.


인간사회는 참 묘해서 교과서처럼 정의가 늘 승리하지도 않고,

거기 앞서 무엇이 정의인지도 정의하기 어렵고,

분명히 선의에서 비롯한 정책이 오히려 사람들의 고통만 심화하기도 하고,

인간의 능력과 노력에는 슬프지만 많은 격차가 있고,

빈곤과 불평등에는 사회가 책임질 부분도 있지만,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


이런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뭔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훼손되는 것일까?

결국은 직시할 문제와 모색할 해결책 두 가지가 있을 뿐 아닐까?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범위를 나, 가족, 부족, 계급, 성, 인종, 국적의 범위를 넘어 계속

넓혀온 역사가 바로 인간이 폭력적인 본성과 싸워온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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