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을 함께 걷다
그녀의 말이 계속 마음속에 맴돌았다.
“그냥… 같이 걷고 싶은 길이 있어요.”
주말 오후, 우리는 다시 만났다.
약속 장소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안쪽, 대나무 정원이 있는 고풍스러운 중국풍 차관(茶館)이었다.
거리에는 오래된 LP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재즈 음악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건물 벽면에 붙은 아이보리색 스투코, 붉은 벽돌길 위로 길게 드리워진 플라타너스의 그림자가 리듬을 따라 흔들렸다.
길가의 노천카페에서는 몇몇 서양인들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지나가는 이방인들마저도 이 거리에서는 영화 속 인물처럼 보였다.
그녀는 파란색 치파오에 얇은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나타났다.
정갈한 머리카락, 담백한 화장, 그리고 약간 상기된 볼.
마치 1930년대 상하이의 시간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분위기였다.
예전에 영화에서 보았던 중국 여배우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색, 계의 탕웨이.
치파오를 입은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고, 세련되어 보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찻집은 겉보기엔 오래된 중국식 가옥이었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놀랄 만큼 정갈하고 운치 있었다.
기와지붕과 나무 기둥이 고스란히 보존된 건물, 대문을 열면 대나무 정원이 조용히 우리를 맞이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잎,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빛은 부드러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찻집 안쪽은 작은 개별 방으로 나뉘어 있었고, 방마다 붉은 벽등과 자개무늬의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다다미 같은 낮은 마루에 앉아 보이차와 우롱차를 주문했다.
실내는 찻잔에 차가 따르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그녀는 상하이 외곽에서 자랐고, 어릴 적부터 언어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대학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전공했고, 한때 한국 유학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녀가 한국 드라마 대사를 정확한 억양으로 따라 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한국에서의 삶, 그리고 상하이에 와서 마주한 낯섦과 고요함에 대해 털어놓았다.
외롭다는 단어를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묵묵히 내 말을 들으며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찻잔의 차는 어느새 식어갔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서자, 겨울 공기가 대나무 잎 사이로 스며들어 볼을 스쳤다.
우리는 프랑스 조계지의 가로수길을 따라 걸었다.
양쪽으로 늘어선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마치 터널처럼 가지를 뻗고 있었고, 거리 위로 황금빛 낙엽이 느릿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트렌치코트 자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유럽풍 저택들과 붉은 벽돌의 고풍스러운 건물들,
녹슬어가는 발코니와 철제 난간,
그리고 그 틈을 메우듯 피어나는 담쟁이넝쿨들.
도시는 복잡하면서도 조용했고, 고요하면서도 숨결이 느껴졌다.
그녀가 말했다.
“가끔 이런 조용한 순간들이 필요해요. 도시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마음이 조용해지는 시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런 순간이 있기에… 다시 하루를 버틸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추운 듯이 손을 품에 감쌌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내 손의 열기가 그녀의 손을 천천히 덥히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고요한 거리. 멀리서 들려오는 색소폰 소리.
우리만의 시간이 그 사이를 부유하고 있었다.
징안스에 가까워졌을 무렵,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아파트 단지 입구 앞이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나야말로. 이런 시간,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그녀는 한참 나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체온이 바로 가슴에 닿았고,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오래도록 내 품 안에 머물렀다.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이, 그 짧은 침묵 속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처럼… 조용한 하루가 계속됐으면 좋겠어요.”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그녀는 조용히 몸을 떼며 마지막으로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처음 만났던 날과는 분명히 달랐다.
조금 더 부드럽고, 따뜻하고, 마음이 열려 있는 얼굴.
그날 밤, 돌아오는 길.
도시는 여전히 번쩍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번쩍임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내 손과 가슴 어딘가에, 그녀의 체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온기가, 낯선 도시의 밤공기 속을 오래도록 데워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