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하세요, 시답잖은 농담까지

기억을 못 하는데 일을 어떻게 하나요

by 평정


전에 말씀드렸듯이


회사에서 이 말을 많이 하는 편이신가요? 아니면 많이 듣는 입장이신가요? 전자이신 분께는 그 고충에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만약 후자시라면... 앞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이 말은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리 썩 기분 좋진 않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유하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불편하게 콕 짚어주니까요. 사람이 하는 일에 완벽이란 게 어디 있습니까?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단 한 번을 그냥 넘기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성격이 조금 깐깐하실지도. 그런데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같은 말 하는 상황이 계속될 때, 웃으며 넘기고 넘기다 인내심의 선이 끊어지는 순간, 부지불식간에 툭 튀어나옵니다.


삐용삐용 경고등과 다름없는 이 말을 들었다면 귀 기울여야 합니다. 주의하지 않고 상황을 반복한다면 교류가 단절될 수 있어요. 최악의 경우 신뢰와 배려, 융통성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게 됩니다. 상대방은 점점 얼굴 보고 대화하길 피하고, 메신저나 이메일로 모든 걸 텍스트화하여 전달하려 할 겁니다. 만약의 사태에 스스로의 무고를 증빙할 수 있도록.


사람 사이에는 호흡, 눈빛, 표정, 말투 등으로 눈치껏 알게 되는 사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화면 속 텍스트로만 마주하면 부가적인 요소들은 배제된 채, 공지처럼 일방적이고 건조한 전달만 남습니다. 어쩌다 대면해도 AI처럼 차가울지 모르죠. 소통 아닌 통보가 이루어지니 불필요한 오해가 쌓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비즈니스 관계여도 감정이 있는 사람들인지라. 하지만 얼어붙은 관계가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임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아, 맞다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했는데 뒤돌면 까먹고, 눈을 마주치며 강조했는데도 까먹고, 회의까지 거쳤는데도 까먹네요. 어제 말했는데 오늘 까먹고, 오전에 말했는데 오후엔 까먹고. 까마귀 고기만 먹었나?


일상에선 가볍게 쓰지만 회사에선 좀처럼 듣고 싶지 않은 말입니다. 처음에는 ‘기억력이 나쁘구나’ 했는데, 반복되니 지치고 짜증이 나더군요. 없는 시간 쪼개 입 아프게 설명했는데 돌아오는 건 딴소리이니 허탈할 뿐입니다. ‘내가 만만해서 같은 걸 묻고 되묻나?’ 이성보다 감정적으로 받아치는 순간도 생깁니다. 내가 조금 편해지고자 차라리 불편한 사람이 되는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한참 다른 업무 중에 치고 들어와 답을 요구하는 게 상대방은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행동이란 걸 모르는 걸까요? 모든 답이 자판기처럼 틱 누르면 탁 나오는 게 아닌데 말이죠. 착한 얼굴의 물음표 살인마에도 그 피해자는 나오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했던 말 또 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꼼꼼하게 일하지도 않습니다. 결과물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니, 서로 피곤하게 확인하고 확인하는 소모적인 과정이 이어집니다. 나중에는 믿고 맡기기 두려워지죠. 사실 기억만 하면, 놓치지만 않으면 될 텐데요. ‘내가 천재인가?’ 하지만 자라는 동안 영재 근처에도 가본 적 없으니 말도 안 되고요. 냉정한 자기 객관화 덕에 우쭐하기보단 현타가 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관적으로 과장 좀 보태 적중률 100%. 그들은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돌아갑니다. 종이와 펜을 챙겨도 손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메모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 가끔, 아니 종종 회사의 중심에서 이렇게 외치고 싶었습니다.


메! 모! 해!
제발 메모해!!!


제가 만난 일잘러들은 메모의 방식과 분량에 차이가 있을 뿐, 아예 펜을 놓진 않았습니다. 저도 따라서 회의나 통화 중에 업무 관련 내용은 무조건 메모합니다. 혼자만 알아볼 정도로 마구 휘갈기며 흔적을 남기죠. 흘러가는 사소한 이야기도 습관처럼 씁니다. 제가 기억을 한다면, 그건 기억력이 뛰어나서라기 보단 귀로 듣고, 손으로 쓰고, 눈으로 보면서 여러 번 숙지했기 때문일 겁니다. 최소 3번은 인식한 셈이니까요. 알게 모르게 순간 집중력도 올라가겠죠? 시간이 지나 기억이 흐려져도 메모를 뒤적여 복기할 수 있습니다. 적힌 내용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그날의 현장감이 확 살아나기도 합니다. 무릇 메모하는 건 여러 겹 안전망을 쳐서 새는 틈을 최소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잘 기억해서 업무에 누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괜찮겠죠. 하지만 그 반대라면? 직급 고하를 막론하고, 우선 메모해 보세요. 머릿속에 없는 내용을 들을 때, 머릿속에 있는 내용도 한 번 더 정리하며. 때로 후배들을 챗봇처럼 대하는 상사들이 있는데요, 나 편하자고 하는 그런 태도를 경계하지 않으면 똑똑한 후배 도망갈 수 있습니다. 주니어들은 듣는 입장일 때가 많으니 메모하는 습관이 더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고 메모하다 보면 점점 프로젝트의 윤곽이 그려지면서 전체를 보는 넓은 시야를 갖게 될 겁니다. 남들이 안 한다고 해서 휩쓸리지 마세요. 상사, 동료, 후임에게 의존하지 말고 내 밥그릇은 내가 챙겨야죠.


누수를 막는 일머리의 기본은 메모입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으며 필요한 경우, 대화 중간 중간에 내용을 정리하면서 메모하는 습관을 가져보자. 이렇게 하면 상대가 말하는 핵심도 명확히 정리할 수 있고, 대화가 끝났을 때 요약이나 회의록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작성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 이미 상대방의 말이 구조화되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기록하며 말하는 습관은 권장할 만 하다.

- 기획자의 습관, 최장순 (2018)



episode [1] “적으신 거 제가 찍어가도 되죠?”


유관 부서의 회의에 참관했습니다. 제삼자의 입장이었지만 멍 때릴 수 없어 오고 가는 말들을 조용히 끄적였습니다. 피드백이 꽤 많은데 담당자는 가만히 듣고만 있네요. 그런데 회의가 끝나고는 제 메모를 사진 찍어 가겠다고 합니다. 너무 당당해서 순간 AI 비서 된 줄.


다음 회의 참관 땐 굳이 메모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슬쩍슬쩍 쳐다보더니 스스로 펜을 들더군요.




episode [2] 제가 서기인가요?


3시간 넘게 마라톤 회의 중입니다. 집중력은 떨어지고 정신은 몽롱해지네요. 그래도 최대한 정신줄 붙잡으며 메모를 합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틈틈이 낙서도 좀 하면서. 그런데 회의 말미에 갑자기 묻더라고요. "잘 적고 있지?"


그렇다면 왜요? 아니면 또 어쩔래요? 제 메모는 오로지 저 자신을 위한 겁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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