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리의 테이블 Dec 27. 2023

대상으로서의 진리, 도구로서의 진리

하이데거 철학 

요즘 '너 T야?'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물론 저를 가리켜하는 말도 있고, 다른 이를 가리켜하는 말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enTj입니다. 저는 T인 거죠. 


어렸을 때는 T인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전화를 받을 때 수화기를 왼쪽 귀에 대고 통화를 하면 좌뇌개발이 된다는 얘기에 오른손잡이임에도 왼손으로 통화를 했습니다. 

아마 여전히 감성적인 사람보다는 논리적인 사람이 주류인 세상이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이러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너 T야?'라는 말이 칭찬이 아니라 공감을 못하는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근대까지 철학은 이성을 통해서 대상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머리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로 올 수록 직접적인 '경험'을 중시 여기 게 되었습니다. 교육학에서도 '구성주의'가 현대 교육의 기초가 되었는데, 이는 교육을 받는 아이들에게 어떠한 환경을 구축하느냐, 어떠한 경험을 하게 하느냐에 따라 교육적 내용과 성취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론을 전달하기보다는 경험하도록 돕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머리로만 세상을 이해하려는 것은 작은 창문을 통해서 세상 전체를 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인간에게 이성은 세상을 만나는 부분적인 능력이고, 그 부분적인 능력을 통해서 만나는 세상은 부분으로만 인정받아야 하는데, 근대까지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성을 통해서 세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 온전히 세상을 이해하려면 나의 몸과 이성; 인간 존재를 통해서 실존하는 대상을 만나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를 멀리서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그 여자에 대해서 알 수가 있겠어요? 가까이 다가가서 말도 걸고, 밥도 먹고, 산책도 하면서 머리와 몸의 모든 것을 통해서 경험을 해야 온전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이성을 통해서만 대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를 '대상의 진리'를 밝히는 것으로 보았고, 존재 전체를 통해서 대상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을 '도구의 진리'를 밝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도구의 진리란, 사람을 도구처럼 사용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도구란, 무언가 다른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망치는 홀로 있을 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쇠붙이일 뿐이죠. 하지만 목수가 망치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망치에는 목적과 의미가 부여됩니다. 

이와 같이 도구적 진리란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는 상태로서의 존재, 전체라는 거대한 존재와 연결되어 전체를 나타내기도 하면서, 부분을 드러내기도 하는 상태를 '도구적 진리가 드러났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개념이 우리 삶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고 할 때, 단순히 나의 입장에서 나의 머리로 판단한 사실만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나의 시간과 몸을 써서 만나야 하고, 경험해야 온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터키를 이해하려면 터키를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터키 음식을 먹고, 터키 거리를 걸어보고, 터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진정한 터키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확장해 보면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만나고, 찾고, 경험하는 삶에 대한 지지가 하이데거 철학에는 들어있습니다. 나의 중심에서가 아니라, 전체 속에 뛰어들어 대상을 경험하는 삶으로의 전환이 요청되고 있는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도르노의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