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어거스틴 고백록 묵상하기
브레넌 매닝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카톨릭 신부이자 저술가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입니다.
1934년 생인 그는 탁월한 글 솜씨와 말 솜씨로 많은 곳에서 강의 요청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며, 성공적인 강연을 하였지만, 강연이 끝난 후 밀려오는 고독과 허무함을 극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방으로 강연을 떠나면 의례히 호텔에 묶게 되는데, 홀로 있는 시간에는 의례히 술을 먹게 됐습니다.
아침 9시부터 강연이 있는 어느 날, 그는 텅빈 호텔 방에서 눈을 떴습니다. 적막함이 밀려 들었습니다. 초조한 마음으로 서둘러 시계를 찾았을 때는 이미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을 기다리게 했다는 수치심에 그는 좌절했습니다.
술을 끊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알코 중독 프로그램에도 참가했고, 기도하며 하나님께도 간구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점차 알콜 중독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브레넌 매닝은 정상적인 생활을 했고, 성공적인 강연과 작가로서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소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브레넌 매닝은 모든 강연 일정을 취소하고, 어머님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으로 향합니다. 저녁 늦게 공항에 도착한 그는 호텔에서 하루 밤을 보내게 됩니다. 공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딱 한잔만 먹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이 유혹을 물리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술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잔이 두잔이 되고 여러 잔이 되었고, 늦은 밤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얼굴을 비추는 햇빛에 잠이 깼습니다. 심장을 멎게 만들 듯한 차갑고 고요한 공기 속에서 천천히 눈을 들어 시계를 바라봤습니다.
오후 12시 30분.
이미 장례식이 끝난 시간이었습니다.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주셨던 어머니의 장례식에 술을 먹고 잠을 자다 늦었다는 사실이 그의 심장을 찌르는 듯 했습니다. 수치심이 밀려와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주님, 주님께 드린 기도는 어디로 간 것 입니까? 어찌하여 악이 나를 이토록 사로잡는단 말입니까?"
저는 벗어 날 수 없는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구조적인 악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도하고는 합니다.
영화 '비스트 오브 네이션 Beast of No Noation'은 아프리카 소년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정부군에게 부모님의 빼앗긴 주인공 '아구'가 반군에 가담하게 되는 스토리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7BkPS-CR0M
소년병 이야기는 그저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부모를 잃고 두려움과 분노의 휩싸인 어린아이들도 여전히 좋은 편을 선택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구조적인 악이 너무나도 크게 느껴집니다. 어느 누가 소년병들에게 떳떳하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이들에게 돌을 던지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 도대체 이런 악이 어떻게 가능한겁니까? 하나님께서는 언제 공의를 행하시렵니까?"라는 간절한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악이 이뿐이 아닙니다. 최근 아프카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하며 이슬람 무장 세력인 탈레반이 정부를 점령했습니다. 탈레반 무장 세력은 극단적인 종교법을 강요하고, 여성들을 차별하고 학대하며, 자신들의 종교심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 마저 쉽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여성들을 애 낳는 기계로 생각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자신들 마음대로 강제 결혼을 시키며, 부르카를 입지 않은 여성에게 가차없이 폭력을 행사합니다.
여성 혼자서는 거리도 다닐 수가 없으며, 어떠한 사회활동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악이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계에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극심한 악이 존재합니까?
태초에는 하나님 스스로 홀로 계셨을 터인데, 이 악들은 어디로 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이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밖에서 시작한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하나님이 악의 원인이 되십니까?
하나님 밖에서 시작됐다면, 그 악은 어디로 부터 시작한 것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제 7장 '지적 회심'에서 고통스럽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 노력합니다.
마니교에 심취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을 선과 악의 극한 대립으로 보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성경적 세계관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다만 마니교는 선과 악을 상당히 대등한 세력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특이한 점입니다. 마니교는 현존하는 선과 악이 근본적으로 다른 원천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대등한 선과 악이 싸우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니교로부터 돌아선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식 설명이 아닌 기독교적 방법으로서의 '악의 원천'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악을 저지르는 것은 악을 선택하기 때문이고,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유 의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선악과,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유 의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악한 행동을 하게 됨은 우리의 자유 의지 때문이요, 우리가 그 행동의 결과로 악(고난)을 당하게 됨은 당신의 공정한 심판 때문이라는 말을 나는 듣고 그것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또 다른 질문이 길을 가로 막습니다. 그렇다면 '악을 선택하는 의지'는 어디로 부터 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악을 저지르는 것은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 때문인데, 악을 선택하는 자유 의지의 출처는 어딘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를 만드신 이가 누군가? 그는 선하실 뿐 아니라 선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러면 내가 악을 원하고 내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이유(원인)가 되는, 즉 선을 원치 않는 의지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선하신 나의 하나님이 나를 전부 창조하셨는데 누가 내 안에 이것을 넣어 주었으며 이 고통의 나무를 내 안에 심어 놓았을까? 만일 악마가 이 일을 해놓았다면 그 악마는 어디서 왔을까? 만일 선한 천사가 자신의 사악한 의지로 인하여 악마가 되었다고 하면 그로 하여금 악마가 되게 한 그 사악한 의지는 어디서 왔을까? 천사도 선하신 창조주께서 전부 만드신 것이 아니냐?"
To be contiun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