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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Aug 25. 2021

정신의 기구; Id, Ego, Super-ego

프로이트 철학 개념

지그문트 프로이트 (1856-1939)

그는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입니다. 현대 사상 형성에 큰 영향력을 미친 사상가 중 한 명이자 회의의 대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무의식을 탐구하는 정신분석학을 새롭게 개척해 인간 이해의 전혀 다른 지평을 열었을 뿐 아니라 예술, 문화, 사회, 심리 이론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의식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때,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여, 의식 중심의 철학에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인류사에 남을 만한 혁명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혁명은 '코페르쿠스의 천체 혁명'입니다. 이전까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 중세적 사고를 끝내는 데 일조했지요.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창조됐다고 믿었는데 지구 역시 태양계를 도는 행성에 불과하고 천체의 고유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혁명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말합니다. 이전까지 인간은 신이 창조한 만물의 영장이고, 동물과 전혀 다른 영적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이후로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는 관점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진화론을 기반으로 무신론이 힘을 얻기도 했는데요. 최근에는 유신론의 틀 안에서 진화론이 수용가능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어 진화론이 반드시 무신론으로 흐르는 분위기는 아닙니다.

세번째 혁명이 프로이트의 '무의식 혁명'입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 주장하지만 비이성적인 것, 때로 터무니없는 것, 우리가 수용하기 싫은 욕망 같은 게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 동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1)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개척한 프로이트로 인해서 새로운 인식의 장이 열렸으며, 이로 인한 여러가지 혼란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구성(정신 기구)

제가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참 좋아하는데, 매트릭스만큼 좋아하는 영화가 바로 인셉션 입니다.

영화 인셉션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으로 인간의 무의식에 관한 영화입니다.

영화상에서 인셉션(Inception)이란 다른 사람의 꿈에 침입해 무의식의 영역에 생각을 주입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주인공 코브는 재벌 2세 피셔의 꿈 속에 침입하여 아버지에게 상속 받은 회사를 분할하도록 생각을 주입합니다. 이렇게 주입 당한 생각은 마음 속에서 자라 현실 속에서 행동을 유발시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pZH6oF9O40 

영화 속의 재벌 2세 피셔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나도 아버지처럼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점을 성취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무너트리고 스스로 다시 세워야 하는데,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망설이고 있는 피셔의 마음에 코브가 하나의 생각을 주입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하기를 원하신다."

이 생각이 피셔의 마음 속에 주입되자, 그는 아버지의 회사를 조각 조각 해체합니다.

피셔에게는 자기 증명의 욕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안된다는 규율도 있었죠.

이 둘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데, 규율을 무너트릴만한 생각이 주입되자 즉시 현실 속에서의 태도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원하고, 하지만 그것을 절제하기도 하면서 어떠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인데, 나의 존재 안에 무언가를 원하면서도 그것을 통제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상호 대립적인 2가지 이상의 요소가 존재하는 듯 합니다.


Id, Ego, Super-ego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은 단일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프로이트는 정신이 단일한 본질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부분이 있고, 그 심급들이 어우러지는 상호작용 속에서 하나의 인격체를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2)


인간의 마음은 적어도 세가지의 영역이 존재하며, 그 영역들 간에 상호작용이 이루어져 소위 '현실적', '합리적' 의식을 형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세가지 마음의 영역이 '이드 Id', '에고 Ego', '수퍼에고 Super-ego' 입니다.

"먼저 이드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드를 정신의 본래 현실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드는 성 에너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드의 중요한 목적은 그것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거의 이드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드를 지배하는 것이 바로 쾌락원리고요." 3)


이드 안에는 '본능'과 '충동'이 공존합니다. 본능과 충동은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능은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욕구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무언가를 먹어야 하고, 필요로 합니다. 배가 고프면 빵이든, 밥이든 먹어야만 해소가 됩니다. 이것이 본능입니다.

하지만 충동은 '기억'에 의존합니다. '만족'했던 기억을 다시 재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충동과 본능의 구별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면 본능은 타고난 것이고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동물적 행동 양상이지만, 충동은 인간만의 고유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4)


동물은 발정기가 되면 교미를 통해서 재생산을 시도합니다. 재생산이 끝나면 더 이상 교미 행동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본능에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쾌감이라고 하는 만족감을 기억하고, 그 쾌감을 재현하고자 집착합니다. 이것이 충동입니다.

본능에서 출발하지만 본능에서 분화되면서부터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근데 충동은 만족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본능은 대상과 목적이 명확합니다. 반면 충동은 기억을 추적합니다. 원초적 만족의 기억들은 실제 기억이 아니라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신화적인 것입니다.

즉 실제로 원초적 만족이 있었던 게 아니라 환상 속에서 가정되는 것입니다.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만족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절대 되풀이될 수가 없다보니 끝없이 만족에 도달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충동은 보통 환상과 결합되어 목표를 추구해갑니다. 반면 본능은 대상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환상과 결합될 일이 없습니다. 5)

트라우마도 일종의 충동인데, 과거의 불쾌한 경험을 했다면, 의식은 그것을 무의식으로 밀어냅니다. 사라지지는 않고, 무의식에 숨겨지는 것이죠.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것으로 '전치 displacement' 또는 '융합'시킵니다. 가령 검은 옷을 입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불쾌한 감정을 경험했다면, 전체적인 디테일은 사라지고, 그 사람이 입은 옷의 색깔과 그 사람이 신었던 구두만이 남아 '검은색 구두'에 대한 불쾌감 형태로 남게 되는 거죠. 그리고 꿈에 구두가게에서 검은색 구두에게 쫓기는 모습이 연출되는 식입니다.


이드는 무조건적으로 만족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현실적인 제약 속에 다루어집니다.

이드의 감시자가 바로 '수퍼에고'입니다. 수퍼에고(초자아)는 도덕원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을 발산하고 싶은 본능이  존재하지만, 수퍼에고는 통제를 가합니다.

"여기서는 안돼"

수퍼에고는 사회적 규율과 도덕규범이 내재화된 원리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집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는데요. 그렇다면 수퍼에고와 '양심'은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요?

칸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재되어 있는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이성(실천이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양심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수퍼에고와 양심이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어떤 규제적 원리가 사회적 규율인지, 선험적 양심인지 말이죠.


저 개인적으로는 선험적 양심은 사회적 규율과 수퍼에고보다 더 깊은 단계에서 작동하는 원리라 생각합니다.

사회적 규율은 양심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회적 규율이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왜곡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사회적 규율이 추구하는 방향성에는 분명히 '양심'의 선한 가치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탈레반 정권 하의 아프가니스탄은 여성에게 '브루카'라는 특별한 옷을 입도록 가요합니다. 여성 차별적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은 그 사회 속에서만 통용되는 사회적 규율 의해 통제 받고 그것이 내재화 되어 초자아로 작동하게 됩니다. 초자아는 '옳고 그름'의 규제적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에 양심과 충분히 혼동될 수 있습니다.

어떤 여성이 탈레반 정권의 규율을 어기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로 나갔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마 거리에서 돌을 맞아 죽을지 모릅니다. 규율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돌에 맞아 죽었다면, 어떤 이는 사회적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잠길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자녀가 이렇게 죽기를 원하십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떤 옷을 입느냐는 문제보다 당신의 자녀가 더 소중하다는 얘기입니까?"

정직하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은 내 마음이 슬픈 것과 옳은 것은 다르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슬프지 않습니까?" 라고 다시 되물을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본성 안에 내재되어 있는 어떠한 감정이 사회적 규약을 우선한다면 그 규약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규약을 넘어서는 모든 감정이 정당화 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보편성을 확보한 감정'만이 사회적 규약을 넘어 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황금율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눅6:31, 새번역]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사회적으로 옳은 것은 나에게도 좋은 것이고 타인에게도 좋은 것이어야 합니다.

나에게는 좋지만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사회적 규약은 우리에게 있는 '선험적 양심'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특정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규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니체는 양심을 사회적 권위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규율이 내재화 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차원의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옳음'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인류가 암울한 역사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빛을 발견하며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양심의 추가 개인과 사회의 깊은 곳에서 살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이드와 수퍼에고(초자아)는 상호 긴장관계를 유지합니다. 이드는 원하고, 수퍼에고는 통제합니다.

이 긴장 사이에서 에고(자아)가 생성됩니다. 이러한 긴장을 재미있게 표현한 영화가 디즈니의 '인사이드 아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oUyzGb2tL8

이드, 에고, 수퍼에고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프로이트는 의식의 많은 부분이 무의식 속에 가려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드와 수퍼에고의 거의 모든 영역이 무의식 속에 가려져 있으며, 수퍼에고와 에고의 일부분만이 우리의 의식에 떠올라 있습니다.

감추어진 무의식의 영역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 의사결정에 관여하게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관점입니다.


오늘은 프로이트의 마음의 구성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1), 2), 3)  4), 5) 김석,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무의식 혁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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