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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Oct 07. 2021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 3

근대 주체에 대한 비판 / 강영안 교수님의 책 '타인의 얼굴'을 중심으로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 1~2를 통해서 근대 사상 안에서 '주체'가 어떻게 인식 되어 왔으며, 이에 대한 현대 사상의 대안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주체가 무엇이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중요합니다. 

그 안에 세상을 만나는 방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로 시작된 Cogito적 자아는 세상을 자기 앞에 줄 세우고, 주체의 인식 안에 밀어넣어 변형하는 강한 주체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주체는 대상을 억압하고, 억누르는 주체입니다. 

반면 니체(연속적으로 창조되어지는 주체), 푸코(역사 속에서 만들어지는 주체), 라깡(욕망하는 주체)의 주체는 '서 있지 않은' 흐르고, 우연적이며, 상대적인 주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두 방식, 강제력을 행사하는 주체도, 그렇다고 해체된 주체(해체된 주체는 탈 인격성, 탈 윤리성의 문제를 일으킵니다)도 올바른 주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굴 없는 사유 

레비나스는 서양 전통이 인간의 인격성을 상대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한 개인의 고유한 인격성에 주목합니다.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엄연히 특별하게 존재하고 있는 한 인간의 실존적 인격성은 모든 인식의 출발점이 됩니다. 


"개개인은 역사의 계기로, '신 또는 자연'의 양태로, 운동의 한 부분으로, 구조나 체계의 부분으로 종종 환원된다. 서양 근대 철학자 가운데는 칸트를 위시한 몇몇 철학자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인간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20세기 초반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이나 구조주의 영향을 받은 이른바 '인간과학자'도 같은 노선을 걸었다. 가능하면 인간의 얼굴을 배제하고 그 자리에 객관적 계기, 예컨대 자연, 구조, 언어 등을 자리 잡게 하려는 경향이 결국에는 '인간의 죽음', '주체의 죽음'에 대한 논의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했다." 


레비나스는 탈인격화의 경향, 즉 '얼굴 없는 사유'의 정체를 폭로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20세기 대표적인 철학자인 하이데거의 '존재적 사유' 역시 인간의 인격성을 간과한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20세기 과학 기술이 생명을 가진 존재를 죽어버린 사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하며, '존재의 생명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이데거에게 있어서의 존재는 인격을 염두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탈인격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박찬국 교수는 그의 책 <하이데거와 나치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이데거는 그의 사유 도정 전체에 걸쳐서 국수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독일 민족이 갖는 역사적 사명과 독일어의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인간 관계를 파편화하는 자유민주주의 대신에 민족적인 공동체를 지향했으며 죽을 때까지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중략) 단적으로 말해서 하이데거의 사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국수주의적이며, 반(反)자유민주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이며, 농촌지향적이고, 묵시론적인 성격을 갖는다."(p-28)"


하이데거의 철학이 존재의 생명력을 복원한 것은 중요한 사건이지만, 존재의 출발점인 인간의 인격성을 간과한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이 레비나스의 시각입니다. 


열려 있는 주체 

레비나스는 생명과 대상에 폭력을 가하는 Cogito적 주체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해체된 주체를 넘어서는 대안으로서 '환대하는 주체'를 제안합니다. 

그는 전통적 의미에서 주체로서의 인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주체로서의 인간을 단순히 인식하는 주체로 보지 않고, 열려 있는 존재로 필연적으로 타인가 연결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주체의 주체성, 즉 주체가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을 이론적 활동이나 기술적, 실천적 활동에서 찾기보다는 오히려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서 찾고자 한다. 그는 주체가 주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지식 획득이나 기술적 역량에 달린 것이 아니라 타인을 수용하고 손님으로 환대하는 데 있다고 본다. 헐벗은 모습으로, 고통받는 모습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의에 의해 짓밟힌 자의 모습으로 타인이 호소할 때 그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지고, 그를 대신해서 짐을 지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주체의 주체됨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을 인식하는 주체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을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은 '열려 있는 존재'라고 규정하였으며, 환대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수의 개별적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안에서 서로를 인식하면서도 환대하는 인간일때에야 비로서 온전한 주체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로서 온전히 서 있어서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공존하는 타인에게로 나아가며 그 타인을 확고한 나의 주체 안에서 환대하는 주체야 말로 온전함에 이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레비나스의 관계적 철학에 깊이 동의합니다. 

이는 마틴 부버의 철학과도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틴 부버는 한 인간의 존재를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나-그것', '나-너'의 존재로 보았습니다. 전자는 나를 중심으로 타자를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존재이고, 후자는 상호 인격성을 바탕으로 개방적으로 환대하는 존재입니다. 

성경에서도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하와를 환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을 지으시고 '홀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아 보인다'고 하시며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둘 사이에 벽이 생기게 되고, 그로 인해 상호 환대가 아닌 정복의 관계로 이양됩니다. 


레비나스는 원초적 관계를 회복해야 하며, 이럴 때에야 비로서 온전한 인간성을 경험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1) 이 글에서 특별한 언급이 없이 인용한 글은 강영안 교수의 <타자의 얼굴>을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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