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 이전의 현대철학 개념들 '니체'
영화 <토르:나크라로크>는 초반에 토르가 수르트(Surtur)라는 거대한 괴물과 싸우는 웅장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토르는 '아스가르드'라는 왕국의 후계자로서 그에게는 '로키'라는 동생이 있는데, 형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아버지로 변신한 후에 왕 행세를 합니다. 형이 열심히 싸우고 있는 동안 동생은 연극을 보면서 왕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주목하고 싶은 것은 연극입니다.
영화 '토르'에서 잠깐 등장하는 연극 장면에는 깜짝 출연도 있습니다. 할리우드 최고의 영화배우 중 한 명인 '맷 데이먼'이 로키 역할로 나옵니다.
연극에서 로키는 죽어갑니다. 죽어가는 로키는 형에게 마지막 유언을 합니다.
잠시 후 로키는 죽고, 토르는 'No~'라고 크게 외치며 비탄에 빠집니다.
그때 뒤에 있던 코러스(합창단)가 슬픈 노래를 부르며 연극의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는 연극에 완전히 몰입한 관찰자의 역할을 합니다.
스토리를 이어가는 참가자가 아니라, 스토리에 완전히 몰입한 관객으로서 역할을 수행합니다.
'로키'가 죽을 때 합창단은 가슴이 저미는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100% 몰입한 관객으로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 순간 연극을 보는 진짜 관객도 연극에 더 몰입하게 되죠.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의 역할은 극중 상황에 총제적 공감을 해줌으로써 스토리가 담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충실히 전달합니다.
다음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의 일부분입니다.
"그리스인의 비극 합창단은 무대 위의 인물을 살아 있는 실제 인물로 생각해야만 했다. 오케아노스 딸들의 합창단은 거인 프로메테우스를 눈앞에서 실제로 보고 있다고 믿으며, 무대의 신은 자기 자신과 똑같이 실재하는 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는 등장인물처럼 무대 위의 드라마에 휩쓸려 소리치고 울고 웃으며 그 사건을 내부로부터 살려냅니다.
이에 대해서 '우치다 타추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니체는 고전 문헌학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곳의 다른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의 신체적인 경험을 바로 '그 몸이 되어' 내부에서 상상적으로 추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기의식'의 획득 가능성을 모색했습니다. 먼 태고의 낯선 곳에 사는 사람의 몸속으로 편안히 들어가, 한계를 모르는 신체적인 상상력으로 증명된 지성만이 적절한 '자기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통찰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철학 공부를 하면서 가장 도움이 많이 됐던 분야가 '인식론'입니다. 인식론이란,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라고 할 때, 그 앎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지를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안다'는 것은 인식 주체와 대상의 문제입니다.
나는 무언가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은 내 앞에 대상 또는 사건이 있고, 그 대상 또는 사건을 통해서 나의 내면에 어떠한 판단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대상을 판단할 때는 그 대상의 '존재' 여부와 '특성'에 대한 생각이 있고, 사건에 대해서 판단할 때는 2개 이상의 사건의 인과성과 의미에 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대상을 판단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보이는 그대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 대상이 어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대상을 '감각'이라는 조건을 통해서 만나기 때문입니다. 사건을 판단할 때는 더 다양한 틀 속에서 판단하게 됩니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나의 경험과 내가 확보한 정보, 고착화된 성향과 시각이 존재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인식의 조건을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편향되어 있고, 어떤 틀 속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가와 그렇기 때문에 '열린 대화'를 통해서 더 나은 단계의 사실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분명 사람마다 사실에 도달하는 태도라는 측면에서 '수준 차이'가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어떠한 조건 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있고, 전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동일한 책을 읽으면서도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빠져 소통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니체는 동시대인이 '억측에 의한 판단'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너무나도 잘 풀리는 것처럼 보였던 19세기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류 역사 정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니체의 동시대인, 즉 19세기 독일의 부르주아이며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그들은 스스로 보기에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가치판단이나 심미적 판단을 역사적으로 형성된 편견이나 속단이 아닌 인류 일반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구조주의 이전의 역사_우치다 타추루>
니체는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특정한 역사, 문화적 배경 '속에' 살아간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갖게 되는 특수한 정신적 특징과 시각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무지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식의 이 치명적인 결여 때문에 니체의 눈에는 그 동시대인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어떤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끔찍한 바보로 비쳤던 것이지요." <구조주의 이전의 역사_우치다 타추루>
우리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문화 중심적인지 오래된 책들을 읽을 때 드러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나는 거의 매일 '성경'을 봅니다.
성경은 약 B.C. 500년 전에 최초로 집필되어 AD 90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물론 성경의 저자들이 오늘날의 '성경'이라는 한 권의 책을 기획하여 집필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경험과 정신을 전수하려는 의도로 집필되어 A.D. 419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신구약 성경'을 확정하게 됩니다.
성경의 창세기는 약 B.C. 500년에 집필되었지만, 창세기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context는 세상의 시작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형성되는 역사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 또는 인류가 시작할 시점에 관한 책을 읽으며, 그 책이 오늘 저에게 주는 교훈과 의미를 찾아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만, 저는 그 책을 읽을 능력이 없습니다. 성경에 적힌 글자를 읽을 수는 있지만, 그 글에 적힌 주인공이 경험했을 그날의 상황과 영적인 깨달음,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적어 내려 간 저자의 심정과 의도, 그리고 오늘이라는 시공간 속에 놓여 있는 나라는 존재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세계.
나는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 3개의 인간의 축과 시공을 넘어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축. 총 4개의 축을 미래라는 시공간 위에 펼쳐놓고 생각하고, 적고, 기도해야 조금이나마 이해라는 지평 위에 설 수 있게 됩니다.
"니체는 고전 문헌학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곳의 다른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의 신체적인 경험을 바로 '그 몸이 되어' 내부에서 상상적으로 추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기의식'의 획득 가능성을 모색했습니다. 먼 태고의 낯선 곳에 사는 사람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 상상력으로 증명된 지성만이 '자기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통찰한 것입니다."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는 관객의 세계와 무대 위에 놓인 인물들의 세계를 '공감'이라는 형식을 통해 만나게 하고 있습니다. 무대 위에 어떤 상황이 '슬픔'이라면, 코러스는 슬피 울며 노래를 하여 그 슬픔을 하나의 구조에 놓여 있는 관객에게 의미 있게 전달합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은 의식할 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는 하나의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어떠한 것들이 100년, 200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되어 버립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은 조선시대 노비의 자식이 미군 장교가 되어 일제 강점기 조선으로 돌아와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 미군 대위 '유진 초이'는 노비의 자식으로 자신의 눈앞에서 부모가 양반에 의해 죽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드라마가 사실이라면 조선 시대 '노비'에게는 인권이 없었습니다. 또한 '유진 초이'는 '고애신'이라는 양반댁 규수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 당시에는 계급을 넘어서 혼인을 하는 일은 해서는 안될 '죄'였습니다.
약 1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암묵적 계급은 존재하지만, 명시적 계급은 사라진 오늘날은 계급을 넘어서는 사랑에 대한 다양한 이슈가 있을 수는 있지만, '죄'라고 까지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회적 선과 악의 기준이 바뀐 것입니다.
니체는 선과 악도 결국은 한 시대의 관점, 구조의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는 선악은 과연 어떤 기원을 가지고 있을까? 인간은 어떤 조건을 토대로 선악이라는 가치판단을 생각해낸 것일까? 그리고 그들 가치판단 그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들의 가치판단은 이제까지 인간의 진전을 저해해왔는가 아니면 촉진시켜왔는가?" <니체의 도덕의 계보>
저 개인적으로는 모든 선악 판단의 근저에는 불변의 기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쾌와 불쾌, 자기를 인식하는 방식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신의 시선 속에 담긴 의도를 인식하는 영적인 능력은 불변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화 속에 담긴 '선악'의 많은 가치들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든, 특정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이든 규칙이 만들어지고, 그 규칙을 유지하기 위해 처벌 규정이 생성되면 그것은 교육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무의식화 되고, 구조화됩니다.
이러한 과정이 모두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 중심성과 파괴 본능'의 존재를 받아들입니다. 무질서는 인간 사회를 파멸로 이끕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어떠한 장치들은 필연적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것들은 보호를 넘어 '억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있는 일들일 수록 다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확고히 구조화되어 '당위'가 되어버린 것들이 의외로 억압의 기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구조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