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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주인이 되는 모두장의 시대

가녀장의 시대/이슬아 장편소설/이야기 장수/2025

by 한산

글쓰기 에세이 <부지런한 사랑>이라는 작품으로 작가의 진정성과 열정을 발견했다. 매일 한 편의 글쓰기 편지를 유료 구독자에게 보내며 출판 구도를 획기적으로 바꾼 작가다. 그 일로 작가의 꾸준함을 증명했다. 글쓰기는 마감이라는 힘으로 이뤄진다고. 하지만 그 악박감은 스마트폰으로 오려두기 해둘 만큼 잊고 싶지 않은 문장이다.


"나는 나에게 재능이 있는지 궁금했다. 재능은 누군가를 훨씬 앞선 곳에서 혹은 훨씬 높은 곳에서 출발하게 만드는 듯했다. 재능이 있다면 더 열심히 쓸 참이었다. 만약 없다면 글쓰기 말고 다른 일을 열심히 해볼까 싶었다.


스물아홉 살인 지금은 더 이상 재능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오래다.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 알게 되어서다.


재능과 꾸준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창작을 할 테지만 나는 타고나지 않은 것에 관해, 후천적인 노력에 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10년 전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랬다. 잘 쓰는 애도 매번 잘 쓰지는 않았다. 잘 못 쓰는 애도 매번 잘 못 쓰지는 않았다. 다들 잘 썼다 잘 못 썼다를 반복하면서 수업에 나왔다. 꾸준히 출석하는 애는 어김없이 실력이 늘었다. 계속 쓰는데 나아지지 않는 애는 없었다.

써야 할 이야기와 쓸 수 있는 체력과 다시 쓸 수 있는 끈기에 희망을 느낀다. 남에 대한 감탄과 나에 대한 절망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 반복 없이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기꺼이 괴로워하며 계속한다. 재능에 더 무심한 채로 글을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부지런한 사랑 책 속 '재능과 반복' 중에서)


타고난 재능보다 만들어가는 꾸준함이 작가에게 필요하다는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 종종 이 문장을 떠올려보고자 한다. 써야 할 이야기와 쓸 수 있는 체력, 그리고 다시 쓸 수 있는 용기와 끈기가 지속되길 나 스스로에게도 바란다. 그리고 이곳 브런치에 자주 글을 올리고자 한다. 내가 쓴 글에 대한 좌절과 절망이 생기고, 남들 브런치를 기웃대며 남의 글에 감탄과 부러움으로 멈칫하더라도 포기하고 싶을 때는 위 문장을 잊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 장편도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자서전 같은 이야기로 '나' 1인칭에서 '그' 2인칭으로 자신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만물과 관통하는 우주의 실을 향해 글을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다 사실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작가 글을 그래도 많이 접해서일까. 허구적이라고 생각되는 엉뚱한 일들이 작가에게는 다 가능할 것 같다. 그 가족들 이야기 역시. 특히 엄마 복희 씨와 웅이 아빠 에피소드는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다. 가녀장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보다 가족모두장이라고 해야 맞을듯하다. 모두가 주인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대단하고 고맙다.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나눠주니 말이댜. 정말이지 배울게 천지다."

(184쪽, 복희 마음글)

공부해서 남주 자는 교육관을 가진 나라는 독자를 반성하게 했다. 자신의 방식대로만 준다면 상대방이 받아들일까 고민은 해보지 않고 연구하지 않았다면 그건 상대방에게 고통을 줄 수도 이싸. 남에게 진정으로 주고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든 문장이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263쪽)

겸손해지게 하는 말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자신이 해보지 않는 경험을 먼저 해 본 이들은 모두 선생이다. 나이가 많으면 선생님이라고 해야겠지.


"이 수업은 우리가 같이 만드는 거야. 모두가 책임을 나눠가지는 만남이거든. 그러니까 손님 말고 주인처럼 앉아 있어 줄 수 있어?"(303쪽) 작품 속 이 문장이 이 소설의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가녀장의 시대라는 제목에서 '나'만이 주인공 같지만 아니다. 엄마 복희 씨와 아빠 웅이 씨, 그리고 할아버지, 친척분들, 젊은 청년까지 모두 이 소설에서 주변인이 아닌 주인처럼 등장한다. 작가가 가슴에 새기고 싶다는 문장 "좋은 작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쓰는 거처럼 보이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자신과 만물을 관통하는 우주의 실을 향하고 있다.(313쪽)"문장처럼 작품 속 등장인물들을 실로 묶어 모두가 드러나게 한다. 소외되지 않게 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작품 속 주인공이 펼치는 사건과 에피소드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부장적 질서가 무너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 복희 씨와 웅이 씨 모부에 존중으로 가부장에 대해 과격하지 않고 강경하지 않게 대해 가부장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편으로는 성공한 이가 집안에 가장이 되는 게 이 자본주의에서는 이치에 맞지 않을까 하는 약간 씁쓸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가녀장은 악덕 오너가 아니다. 직원인 모부에 대한 복지와 배려는 항상 함께 한다.


작가 이슬아의 에세이만 읽어온 독자와 나도 내 이야기로 소설을 써 볼까 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브런치에서 지역서점을 응원하기 위해 시작한 독서노트 프로젝트로 이 책을 순식간에 읽게 되었다. 그 순식간에 대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쓴 작가의 배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강연자 덕목을 배우고 싶은 이에게도 추천한다. 작가는 아우라를 강연자의 필수 덕목이라고 했으면 강연자가 주인공이며 동시에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즉 청중과 함께 흔들리는 강연을 선호한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는 한 시간 이내로 마치고 질의응답에 삼십 분 이상을 할애한다고 한다. 모든 청중이 작가만 큰 유구한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청중 대다수가 한 번씩 주인공이 되고 집에 돌아가게 한단다. 그리고 덤으로 노래까지 한다고 한다. <글똥 누기> 작가 이영근선생님 연수 장면이 떠오른다. 통기타를 치며 불러준 강산에 노래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처럼>가 불현듯 생각난다. 그분도 작가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知者不言 言者不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도덕경 글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다시 부지런한 사랑으로 관찰된 주변 인물들이 우주의 실과 연결될 두 번째 소설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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