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만큼 배움이 커진 다면

학기초 생활지도로 목소리가 커진다면

by 한산

"아니"라며 고개를 흔든다.

"뭐 아니라고. 바른태도로, 의자에 앉아서 집중해서 풀어야지 시간은 다 가는데"

라고 엉뚱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학생 표정에서 교실 정적을 깬 두 마디다. 수학익힘책을 풀던 셋 만 있는 스무평 가까운 교실에 얼음덩어리가 쫘악하고 벌어지는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미 칠판에 판서를 하며 설명하고, 구체물 수 모형을 활용해 설명까지 했는데. 순간 목 뒷근육과 어깨 근육이 뻣뻣해지고, 목소리 울림통은 불이 난듯 뿜어져 나왔다.


"왜 그렇게 수업약속을 안 지키니"

목소리가 커짐을 알고 아차 싶었다. 먹물 같은 아이 눈동자에는 배움의 호기심 대신 '당혹감'이 새겨지고 교실 침묵은 점점 깊어져 간다. 목소리가 커지는 진짜 이유는 뭘까. 그건 아이들 기본생활습관이 잡히기 전이라 어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그 큰 목소리를 만드는 정체는 사실 교사의 조급함이라는 괴물이다. 오늘 이 시간에 여기까지 끝내야 하는데라는 진도의 압박, 내 설명이 부족해서, 쉽지 않고 어려워서, 재미없어서 못 알아 듣나라는 자기 검열, 이 정도는 당연히 초삼이면 알아야 하는 것 아냐? 라는 완벽주의까지 더해서 그 목소리는 더 무서운 괴물이 된다.


아이들이 모르는 건 당연한 것인데, 어른들도 모르는게 많은데 다 아는게 아닌데. 그 당연함을 '하루 일과와 표준적인 아이들 기준으로 생각하고, 그 모름을 계획을 걸림돌로 여기고 있었다. 아이들은 수업을 방해하려거나 교사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그저 배우고 있는 중이라는 신호였다. 단 그 신호가 조금 요란스럽다. 어른들 기준에는 맞지 않고 엉뚱했던 것인데.


태풍이 지나가듯 모든 건 시간이 지나면 평화가 찾아오는 법, 조금 온기가 돌아온 교실에서 스스로 몇 가지 약속을 정해본다. 첫째, 아이들이 '모르는 것'은 '기회'다. 질문한다는 건 적어도 배울 의지가 있다는 신호다. '아니', '몰라요' 라는 말뒤에 숨은 아이의 용기를 먼저 봐주기로 했다. 생활습관이 잡히지 않는 것도 배워가는 중이라고. 둘째는 욱하는 마음이 들 때 바로 입을 열지 않기로 했다. 대신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속으로 숫자를 셋까지 세어보기로 했다. 아니 10초, 열까지 해보자. 그사이 날카롭게 가시 돋친 말이 부드러운 격려 말로 바뀔 수 있겠지. 아니면 옆에 항상 간직하고 있는 싱잉볼을 쳐야겠다. 그 울림이 멈출 때까지 기다려야지. 셋째는 주어를 '나'에서 '아이'로 바꿔봐야겠다. 전지적 아이 시점으로. '내가' 가르쳐야 할 양과 진도에 집중하기 않고, '학생'이 지금 어디서 멈춰서 있는지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배움이 어디서 멈추고 나아가는지를. 그러면 목소리 톤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워지려나.


교사 목소리가 낮아지면 아이들은 비로소 안전함을 느낀다. "모른다고 말해도 혼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 교실은 비로소 진짜 배움터가 된다. 생활습관도 예외이지 않겠지. 단 꾸준히 천천히 스며들여야한다는 고통의 과정이 있다는 걸 기억해야지. 오늘 아이들에게 알림장을 쓴 후 보내고 난 후 목소리가 커짐을 반성하며 다짐해본다. 내일은 조금 더 느린 걸음으로 조금 더 낮은 음표로 아이들 이름을 불러주리라. 목소리만큼 배움이 커진다면 세계 최고 소프라노 가수가 천재를 만들겠지. 아이들과 첫주에 심은 화분 새싹이 올라왔다. 이렇게 천천히 싹들은 커가고 세상을 배우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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