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로 돌아간 무모한 도전
주짓수를 배우는 남편이 망년회가 있다며 다녀온 날의 일이다. 선생님이 아가들을 너무 좋아해서 우리 둥이들을 맡아주고 싶다고 했단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둥이가 있다고 했더니 보고 싶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선생님에게는 이미 다 큰 딸들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좋아하는 아기의 연령층이 아기에서 유치원을 들어가기 전까지라나 뭐라나. 처음에는 험한 세상 탓인지 소아성애자인 건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알 것도 같았다. '내 모든 걸 그대에게 맡기오~'라는 기운을 내뿜으며 온 몸을 맡기는 그 느낌. 바로 그 느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유치원에 들어갈 즈음이 되면 늘어가는 말발과 통제불능의 행동으로 부모 맘대로 하긴 글러 먹기 시작하니까.
아니 그런데 '... 맡. 아. 주. 고...' 이거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만나보고 싶은 게 아니고 맡아주겠다고? 다시 물어보니 맞다고 한다. 자기가 한두 시간 봐주면 그동안 와이프랑 밥이라도 먹고 오던가 하라는 말까지 했단다. 뭔 소리여. 까마귀 고기를 드셨나. 딸들을 키울 때 많이 도왔다고 하던데 이제 다 커서 옛날 일은 다 까먹으셨나 보다. 아이들이 낯을 가릴 텐데 어떻게 단박에 봐준다고 하시는 건지...
하지만 남편에겐 둥이를 떼어놓고 가질 잠시의 여유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나 보다. 무슨 말을 해도 일단 맡겨보자면서 해 봐야 알지 않겠느냐고 밀어붙였다. 결국 반 강제로 허락을 해버렸고 순식간에 날짜와 시간이 정해졌다. 뭐 당연한 거지만 남편이 온전히 하루 쉬는 일요일로 날이 잡혔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그런 날은 가족들끼리 쉬거나 놀고 싶다. 그런데 낯선 사람에게 둥이를 맡기는 무모한 도전을 하기로 하다니 우리끼리 놀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아 자꾸만 불평불만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이게 표정과 말투에 나왔을까? 남편이 열심히 컴퓨터를 뒤적이더니 근처 재미있게 놀만한 곳을 정하고는 가보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병 주고 약 준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혹시 모를 느긋한 점심시간을 대비해 우린 점심을 거른 채 약속 장소인 도장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배가 고프면 말이 없어지고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우리 가족. 아니나 다를까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가시 돋친 분위기가 시작되려고 했다. 그래서 얼른 편의점에서 출출한 배를 살짝 채우고 갔는데 이제와 생각하면 얼마나 나이스 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덕분에 한 시간쯤 뒤 우리는 큰 아이들의 징징거림은 신경 쓰지 않고 둥이들을 돌볼 수 있었다.
의외로 금세 남편이 다니는 도장에 도착했다. 선생님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미리 장소에 익숙하게 해주고 싶어서 뛰놀 수 있게 놔둬보니 의외로 선둥이가 별 저항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형과 누나를 쫓아다니며 놀았다. 후둥이는 장소에 대한 낯가림도 있는지 아빠 다리 위에 앉은 채로 떨어질 줄을 몰랐지만 시간만 조금 지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약속시간이 되고 선생님이 도착했다. "안녕!" 인사말이 들리자마자 뛰어다니던 선둥이가 소리 나는 쪽을 휙! 돌아보더니 아빠 뒤로 가서 숨는다. 후둥이는 아빠에게 안아달라고 들이밀더니 안겨버렸다. 나는 요리조리 숨는 선둥이를 안고 선생님께 다가갔는데 자꾸만 입구를 가리켜대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입구 쪽으로 가면 나가지는 않고 근처에 있는 물건들을 만지거나 하며 안겨서 놀았다.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을 하며 좀 빠르지만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앙!!!!!!!!!!"
그렇다. 선생님이 후둥이를 안아버렸다. 이상한 아저씨 아니야 이러면서 안고 달래는데 아이는 싫다고 울고 불고 발버둥 치고 밀어내고 난리도 아니었다. 안쓰러웠지만 이것도 하나의 과정이겠거니 최대한 엄마 얼굴을 볼 수 없는 곳에서 지켜보았다.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후둥이 다음은 선둥이 또 후둥이에서 선둥이 돌고~ 돌고~ 아이들은 계속 울고 불고 내려놓으면 근처에 있는 아빠에게 달라붙고... '고문이다 고문. 그만 좀 하지 왜 이러고 있니'라고 중얼대며 지켜볼 무렵 누군가를 안고 있던 남편이 나에게 잠시 나갔다오라고 이야기했다. '오? 진심으로?' 가서 바로 안아주지 못함에 둥이에게 미안함 반, 자유 시간을 누리고픈 맘 반으로 고개를 끄덕인 나는 땀까지 줄줄 흘리며 노느라 정신이 없는 첫째와 둘째에게 밥이라도 먹으러 갈 것을 권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오면서 차에서 먹은 것들로 배가 고프지 않은지 놀고 싶다며 혼자 다녀오란다. '얏호!' 멍석을 깔아줬는데 걷어찰 필요는 없지. 30분 뒤에 온다고 했더니 어딜 갈 거냐고 묻길래 알아서 한다고 해버렸다. 첨 오는 곳인데 어딜 갈지 알 수가 있나. 주섬주섬 가방을 들쳐 메고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너무 크게 말하면 더 울까 봐 혼잣말에 가깝게 둥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30분간의 자부 타임!(자유부인 타임) 이 얼마 만에 누려보는 가뿐함인가. 눈을 감고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캬~ 시원하구먼!' 일단 걸었다. 표정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뭘 하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머릿속은 복작복작했다. 혼자 커피를 마실까? 밥을 먹어?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짧은데... 쇼핑을 좀 해봐? 그러다가 문득 자를 타이밍을 잡지 못해서 질끈 올려 묶은 머리카락을 잘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분 커트를 해주는 미용실이 있는데 가족들이 많이 가는 쇼핑몰에는 여자나 아이들도 가기 쉬운 곳이 있곤 하다는 걸 기억해냈다. 다행히 검색을 해보니 역 앞에 있는 젊은이들이 잘 갈 듯한 쇼핑몰에 갈만한 곳이 있었다. 일단 남편에게 어떤지 메시지를 날려보고 답변이 없길래 가게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멀리 보이는 가게 입구에 이미 줄이 늘어서 있었다. 얼핏 봐도 밖에만 3명. 안 쪽에도 2명 정도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총 5명이라고 치고 한 사람당 10분 커트에 미용사가 2명인걸 생각해도 20~30 분은 기다려야 되는 상황. 포기는 빠를수록 좋지. 발길을 돌려 서점으로 향해 책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버릇처럼 전화기를 살폈는데 이런. '와'라는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얼른 오라는 다급한 마음이 전해져 와서 집어 들었던 책은 다시 돌려놓고 뛰기 시작했다.
아직 시간은 10분 정도 남았는데... 간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100엔 숍에라도 가서 쇼핑이라도 할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달렸다. 바람은 시원한데 왜 그렇게 땀이 나던지.
도장 근처로 가니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린다. 냅따 계단을 뛰어 내려갔더니 선둥이는 애기띠로 메고 후둥이를 안고 달래는 남편이 보인다. 잽싸게 받아 안았다. '아이고 고생했다.'
그렇게 도장을 뒤로하고 기분도 전환할 겸 오기 전에 찾아둔 공원으로 향했다. 떨어진 낙엽들과 잔뜩 늘어선 나무들이 가을을 물씬 느끼게 해 주었다. 마침 수수께끼 이벤트를 하고 있어서 늦은 점심을 먹고 참여할 겸 걷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보인 수수께끼가 장미원에 관한 것이라 그쪽으로 향했다. 검은 장미를 찾아 이름을 적는 거였는데 검은 장미가 어떤 걸까 이야기를 하다가 수수께끼는 잊어버리고 어느새 주변을 둘러보며 산책하는데 정신을 뺏겼다. 그러다가 식물원이 나왔고 오픈 시간이 1시간 반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들어갔다.
초록 바나나가 달린 바나나 나무도 있고, 식충 식물에 이게 뭔가 싶은 희한한 식물, 선인장에 란과 뭉텅뭉텅 피는 이름을 잊어버린 커다란 꽃까지 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는데 볼거리가 많아 좋았다. 아이들도 꽤나 좋아해서 잘 왔다 싶었다. 그렇게 식물원을 돌고 밖에 나오니 해가 뉘엿뉘엿 져가고 바람도 꽤 차가워져 있었다. 공원이 문 닫을 시간이 다 되기도 했고 우는 아이들 달래느라 진을 빼서 피곤하기도 해서 1시간 반 정도의 짧은 산책은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처음 들어가면서 수생식물원이 있어서 가려고 한 걸 잊어버리고 못 간 터라 다음에 와서 가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11월이지만 아직 단풍나무가 빨갛게 물들지 않았던데 좀 더 있다 오면 이쁘게 물든 단풍잎도 함께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집에서 제법 가까운 곳에 또 가보고 싶은 즐거운 장소가 있다는 걸 발견한 것으로 오늘의 피곤함이 반감되는 느낌이었다. 다행이다.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공원으로 와서.
그래도 다음엔 생뚱맞게 첨 보는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려고 하면 가차 없이 'No!'를 외쳐야지. 그게 아이들을 위해서나 어른들을 위해서나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고 몸의 피로를 쌓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유익하다.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깨달음과 즐거움을 얻었으니까 결과 All 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