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가는 바람이 부드럽다. 들이쉬는 숨에 기분 좋은 꽃향기가 따라 들어온다. 봄이다. 나무들마다 조롱조롱 매달린 연한 초록빛의 이파리들이 귀엽다. 햇살이 좋은 날은 밖에 나가 온몸으로 빛을 쬐었다. 따뜻한 햇빛을 받으니 겨우내 웅크렸던 몸이 살살 녹았다. 날마다 피어나는 꽃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봄바람에 취해 걷다 문득 시계를 보니 세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밥 먹기 전에 30분만 산책을 하자고 나온 것이 계속 걸었다. 내 발은 머리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뒷산을 휘졌고 다니는 중이었다. 땀이 났다. 멀리서 울리는 꾀꼬리 울음소리가 이제 그만 집으로 가라는 것 같았다.
“네, 네 나도 배고파서 집에 가려고 했거든요?”
달리듯 집으로 가 욕실로 향했다. 기분 좋게 땀을 흘리고 나서 하는 목욕만큼 개운한 게 또 있을까. 시원한 거품이 폴폴 올라오는 맥주 한잔 역시도.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돌돌 싸매고 냉장고에서 차갑게 몸을 식히고 있는 맥주캔을 꺼냈다. 얼핏 보이는 거울 속 얼굴이 어딘가 이상했다.
“뭐야. 덜 씻겼나.”
눈 두 덩이가 벌겠다. 화장을 덜 지웠나 싶어 클렌징크림을 가득 바르고 문질러댔다. 눈가를 문지르고 있자니 산책을 하며 내내 눈가를 긁어댔던 것이 생각났다. 꽃가루 알레르기인가. 아주 어렸을 때 아토피가 있어 늘 팔 안쪽과 무릎 뒤를 벅벅 긁어댔었다. 진물이 나고 딱쟁이가 지고를 반복하며 그 자리에는 붉은 흉터 같은 것이 훈장처럼 남았다. 크면서 점점 신경을 쓰지 않게 됐지만 한창 거울을 들여다보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여름에도 절대 반팔, 반바지는 입지 않았다.
언제나 상비하고 있는 두드러기 약을 발랐다. 얇게 정성 들여서. 이 정도면 경험상 하루만 지나면 원래 살빛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내일은 일요일. 하루 더 떼굴댈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마음이 편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사방이 컴컴하다. 누가 이 시간에 전화질인가 생각하며 전화기를 찾다가 안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 보습을 하겠다며 약을 바르고 눈을 따뜻하게 해 준다는 안대를 올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안대를 벗었다. 눈부신 햇살에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아야!”
찌르는 듯한 통증에 집었던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그 바람에 울리던 전화벨이 뚝 그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거울로 달려가 눈가를 살폈다. 바짝 말라 쩍쩍 갈라진 논두렁처럼 여전히 벌건 눈가에 허연 금이 가 있었다. 손이 닿으면 아팠다. 어제 바른 두드러기용 약이 듣지 않았다.
“꽃가루 알레르기 같아요.”
“선생님 이렇게 건조 해지고 순식간에 상처가 날 수도 있나요? 재채기도 없고 콧물도 없어요.”
“몸이 꽃가루가 해로운 것이라고 판단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거거든요. 꼭 재채기, 콧물이 없어도 피부에만 나타나기도 해요. 좀 더 자세한 검사를 해 볼까요?”
“됐어요. 이게 약을 바르면 금방 낫는 거겠죠?”
“그건 개개인이 틀려서 뭐라고 말은 못 하지만 호전은 될 겁니다.”
벌써 병원에 다녀온 지 한 달이 지났다. 눈가는 약을 바르고 상처가 나아서 좋아지는 줄 알았다. 다음은 간지러움이 찾아왔다. 손톱으로 벅벅 긁어도 시원하지 않은 간지러움이 시도 때도 없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목욕한 뒤처럼 체온이 갑작스럽게 바뀔 때만 간지러웠다. 조절이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점점 간격 없이 찾아오는 간지러움은 살을 뜯어내고 싶은 충동마저 느끼게 했다.
눈가는 벌겋다 못해 보랏빛으로 피부가 변색되어 버렸다. 꼼꼼히 거울로 증상을 체크하던 것도 집어치웠다. 약은 바를수록 심해지는 것 같아 바르기를 그만두었다. 잘 봐준다는 병원을 찾아가 봤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스트레스. 꽃가루 알레르기였다. 언젠가 마음을 터 놓는 친구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고민을 털어놨다. 돌아오는 것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었다. 직접 만나지 않아서 기분이 잘 전달되지 않았던 것일까. 꼭 원숭이 같다며 가볍게 내뱉은 말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니던 아르바이트는 그만둬 버렸다. 미용실에서 수습생을 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또 어느 날은 머플러를 두른 채 일을 하는 그녀에게 매니저로부터 권고가 있었다. 선글라스도 머플러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봄부터 눈가가 간지러워진 것을 시작해 병원에 다녀왔지만 효과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병원 이외의 곳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매니저는 안타까워했지만, 손님들을 위해 외모에 신경을 써주길 바란다며 증상이 나아질 때까지 쉬는 건 어떨지 조심스레 제안했다. 상냥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일을 관두는 것이 좋겠다는 가시가 숨어 있었다.
집에만 있는 동안 계절은 잘도 바뀌었다. 더우면 에어컨을 켜고 추우면 보일러를 켜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먹을 것은 배달을 시키면 되니 불편한 일은 없었다. 돈이 문제였지만 아직은 가지고 있는 카드들로 해결이 되었다.
아직 해가 뜨기 직전의 하늘이 빛의 띠를 머금고 있었다. 하루 중 잠깐 바깥공기를 쐬러 가는 시간이었다. 사람들의 눈이 없는 시간을 틈타 나가는 거의 유일한 외출이다. 차가웠던 공기가 어느새 따뜻해져 있었다.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벚꽃이 하나 둘 분홍빛 얼굴을 내 밀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 신이 나 걸어 다녔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눈가는 이제 피부가 거무틔틔하게 변색된 채 해골처럼 움푹 파여 들어가는 중이었다. 얼마 전이었다. 티브이를 보다가 은연중에 간지러운 눈가를 긁어버렸다. 얇아질 데로 얇아진 피부는 그대로 쭉 찢어져버렸다. 볼품없이 허연 뼈가 드러나버렸다. 다행인 것은 언제부턴가 통증이 느껴지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신경이 죽어버린 모양이다.
에어컨을 켜고 싶어질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이불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방 안으로 비춰드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아악!”
눈이 시려 비비려는 순간 밀려드는 아픔에 비명이 튀어나왔다. 버팀목이 없어진 눈꺼풀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다행히 왼쪽눈은 아직 무사했다. 급한 데로 안대를 주문해 눈을 가렸다.
남의눈을 신경 쓰지 않고 먹는 음식은 언제나 맛있다. 있는 대로 다리를 벌리고 반으로 쩍 가른 수박을 대충 잘라 얼굴을 박고 입안 가득 넣는다. 서걱서걱 입안에서 씹히는 행복. 여름만의 특권이었다. 이 순간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었다. 직접 보지 않고 주문해서 먹는 수박도 먹을만했다. 벌건 국물이 손과 입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달콤한 냄새가 사방에 퍼졌다. ‘이런 게 행복이지.’
얼굴보다 커다랗게 잘린 수박에 얼굴을 박고 게걸스럽게 발그스름한 살을 입안 가득 넣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드는데 뭔가가 툭 하고 떨어져 바닥에 흐른 붉은 수박물속에 빠졌다. 빨간 줄이 죽죽 가 있는 둥그런 것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한 때 얼굴의 일부분이었던 그것. 휘휘 둘러보는 하나 남은 눈동자에 수박 껍데기 끝에 늘어져있는 안대가 들어왔다. 아직 잔뜩 붙어 있는 수박이 안대를 향한 눈을 불러들였다. 덜렁대는 안대를 집어던지고 다시 수박에 얼굴을 들이박았다. ‘먹고 생각하지 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