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일본, 시월드.
"부탁이 있는데, "
아이들과 함께 외출을 하러 1층 거실 앞을 지나 현관으로 나갈 때였다.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시엄마였다. 2층에서 생활하는 내가 아이들 때문에 혹은 볼일이 있어서 아래층에 내려오면 가끔 부탁이 있다고 운을 띄우신다. 부탁은 대부분 전자기기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 예를 들면 컴퓨터로 문서작업을 하는데 파일을 찾을 수 없다는 등의 - 에 대한 것이었다. 그날도 그러려니 하며 발걸음을 세웠다.
"친구가, 부침개가 먹고 싶대."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부침개가 맛있는 한국요릿집이 알고 싶으신 걸까?, 맛있는 부침개를 추천해달라시는걸까? 입으로 '네' 하고 달랑 단어 한 개를 내뱉는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T짱이(나는 우리 일본 시엄마에게 이름 + 짱이라 불린다) 만든 부침개가 맛있다고 내가 하도 자랑을 했더니 친구가 먹고 싶다고 그래서."
"아"
웃었다. 다음 말이 예상 되어서. 우리는 자주 함께 밥을 먹는다. 시엄마는 늘 내가 만드는 요리를 맛있다고 하셨다. 가끔 기억에서 잊혀 가는. 그래서 재료만 한국식이고 맛은 그야말로 내식인 요리를 해 드리면 한국의 맛이라며 좋아하셨다. (웃기는 건 친정 엄마가 일본에 왔을 때 내가 만든 음식을 드시고 이게 무슨 맛이냐고 하셨다는 것이다.) 일 년에 두 번 모일까 말까 하는 형제들이 다 모이는 가족모임에는 나와 시엄마가 요리를 담당한다. 어쩌면 퓨전이 된 나의 한국요리를 시엄마는 가끔 가족모임 때 부탁하실 때가 있다. 신기한 것은 먹은 사람들이 맛있다며 폭풍 흡입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입을 모아 말한다. '한국의 맛'이라고. 생각해 보니 시아빠의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 한국식 삼겹살을 준비해 드린 일도 있었다. 시아빠의 친구들은 내가 만든 쌈장을 맛보시더니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냐며 맛있다고 극찬을 하셨더랬다. 그중에는 요리와 먹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는 친구분도 있었다. 그분은 고추장과 식초와 설탕, 참기름을 섞은 쌈장 만드는 법을 배워가시기까지 했다. 맞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서도 한국 음식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부탁이 있는데 T짱이 부침개를 좀 만들어줄 수 있을까? 양은 조금이면 돼. 우린 그렇게 많이 안 먹으니까."
이것은 선택지가 있는 질문이었을까. 어쨌든 나는 끓어오르는 귀찮음을 꾹 누르며 '네'라고 대답했다. 날짜는 다행히도 아직 정해져 있지 않았다. 나의 일정에 맞춘 어느 날의 점심이 좋겠다고 하셨다. 일정 이야기를 나누며 힘이 빠지는 입꼬리를 열심히 끌어올렸다.
"그럼 그날 T짱 점심 만들면서 우리 것도 조금 부탁해."
우리의 점심을 만들며 겸사겸사 만들어 달라는 말에 나는 빵 터졌다. 어떻게 할 건지는 내가 정하는 거 아닌가. 우리는 큰 소리로 마주 보며 깔깔 웃었다. 나는 손뼉까지 쳐댔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부침개를 만들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불 앞에 붙어 서서 부침개 반죽을 동그랗게 펴고 뒤집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대단히 귀찮게 느껴졌다. 한국에서 냉장고 속 야채 처리나 먹을 것 없을 때 혹은 비가 와서 만들어 먹던 부침개를 손님접대용으로 만들다니. 이미 하겠다고 한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오신다는 친구분께 일이 생겨서 못 오길 빌어도 봤지만 그래봤자 날짜를 바꿔서 오실테지.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우리 가족에게 만드는 근사한 점심이라고. 그랬더니 달랑 부침개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양파를 얇게 썰어서 부추와 함께 부추부침개 하나. 아. 새우를 잘게 잘라 넣어서 톡톡 씹히게 만들어야겠다. 김치부침개도 하나 할까? 여기는 다진 고기도 볶아서 넣고. 부침개 한 종류로는 부족한 것 같으니까 잡채도 조금만 만들고. 미역국도 끓이고. 순식간에 한 끼 식사 메뉴가 결정 났다. 오, 이거 좀 좋은데? 매번 '오늘 뭐 먹지.' 하다가 하루쯤 딱 정해진 메뉴로 밥을 해 먹는 것도 좋은 듯싶었다.
약속 전날. 나는 장을 본다는 핑계로 아이들을 시엄마에게 맡기고 슈퍼에 다녀왔다. 덕분에 잠깐이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재료가 부족하면 사다 준다는 시엄마에게 빼먹은 것들을 부탁하기도 했다. 빠진 것을 늦게서야 알고 마음대로 나갈 수가 없어 아이들과 놀면서도 안절부절못할 때였다. 아이들에게는 내일 요리를 해야 해서 아침에 바쁘다는 이야기를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문득 학기 중에 쌍둥이 유치원 도시락을 싸며 아침 일찍 한 끼를 만들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도 아이들이 있는 시간 몇 가지 요리를 하지 않았던가. 한 시간 정도면 완성했는데. 뭐야. 의외로 별거 아닌 걸로 오버하는 건가. 도시락 싸던 걸 생각하니 갑자기 내가 뭘 고민하고 있었나 싶었다. 밥도 어차피 하는 거고. 아침 식사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당일은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누굴 대접한다는 점이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야채를 썰 때도 얇게 성의껏 칼질을 했다. 이왕이면 맛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프라이팬도 평소보다 오래 불에 올려두고 천천히 달구었다. 달라붙지 않고 바삭한 부침개를 만들고 싶어서. 틈틈이 야채와 고기도 볶고 잡채도 미역국도 만들었다. 곱게 썬 양파를 부침개에도 미역국에도 넣으면서 요리의 달인이라도 된 듯 혼자 어깨가 으쓱했다. 만들면서 주워 먹는 음식은 또 왜 그렇게 맛있는가. 금방 부쳐낸 부침개를 와삭 소리 나게 깨물면서 혼자 와! 하고 환호했다. 따뜻하게 볶아낸 잡채를 츄르릅 한 입 가득 넣고 씹다가 입에 묻은 짭짤한 기름을 핥는 것도 좋았다. 국은 또 어떻고. 자꾸만 미역을 건져먹다가 국물만 남을 판이었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했다. 예쁜 그림이 그려진 접시 위에 먹기 좋게 자른 부침개를 마치 짬짜면처럼 부추와 김치 반씩 올렸다. 잡채는 파스타를 담듯 둥그렇게 말아 담았다. 겸사겸사 가족들이 먹을 것도 예쁘게 남아냈다.
"아~ 맛있는 냄새가 나네."
딱 맞춰 오신 시엄마의 친구분이 집 안을 들어오며 하는 말이 들렸다. 그래. 이 맛에 요리하지. 요리가 다 되기를 기다리며 한껏 기대에 부푼 사람들의 얼굴 보는 맛. 기분이 좋아졌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만든 음식을 들고 내려갔다.
"와~ 맛있겠다."
접시에 담긴 음식들을 본 시엄마의 환성에 또 한 번 기분이 좋아졌다. 가족들에게 점심으로 챙겨주면서도 맛있다며 먹어주는 아이들과 남편을 보며 뿌듯함에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맞아. 나는 원래 요리하는 걸 좋아했다. 내 요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과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는 게 좋다.
잠시 부침개를 만들어달라는 시엄마의 말을 듣고 짜증이 났었다. 귀찮았다. 사실 매일 만드는 가족들의 점심이나 저녁을 만들 때도 귀찮다는 생각을 한다. 가족도 아닌 '시엄마의 친구' 에게까지 부침개를 만들어줘야 하나 싶었다. 시엄마의 입장이 돼 보았다. 어쩌면 이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맛있는 가게를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겠지 싶었다. 시엄마의 부탁이라는 상황이 싫었을지도 모른다. 거절하기 힘든 입장에서의 부탁이니까. 하지만 나도 가끔 아이들을 맡기고 남편과 둘이 밥을 먹으러 가거나 일을 보고 온다. 결국 나는 왜 짜증이 났었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게으른 본성덕에 이유도 없이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시엄마의 친구가 부침개를 먹고 싶다고 한 덕에 참 좋았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맛있는 디저트를 사다 주셔서 아이들과 맛있게 먹었다. 맛있겠다는 말을 한참 듣고 배도 터질 것처럼 불렀다. 잘 먹었다고, 정말 맛있었다며 입에 걸린 웃음들이 보기 좋았다.
뭐야. 나 이런 거 좋아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