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처럼 회사에 나가 일을 하던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태풍 예보가 있었고 아침부터 어두워서 우산을 챙겼다. 습했지만 여름답지 않게 선선한 공기에 긴팔 카디건을 걸쳤다.
"문 닫아! 조심해!"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기며 음악 소리를 귀를 틀어막고 있었음에도 부산스러움이 느껴졌다. 웬일인지 저 앞으로 보이는 창문 넘어가 회색빛이었다. 꽤 높은 층이라 창문은 여는 용도가 아닌 햇빛을 들이기 위한 것이라 열리지 않는 구조였다. 다만 한쪽 구석에 환기를 위해 열고 닫게 되어 있는지 작은 여닫이 창문이 있었는데 그게 밖으로 열린 채 펄럭였다. 자칫 밑으로 떨어지면 보도와 도로가 있어 위험천만했다.
원인은 비였다. 낑낑대며 몇 명이 손을 잡고 문 닫는 것을 보고 있자니 사무실 내에 안내방송이 흘렀다. 태풍이 바로 위를 지나가고 있으니 어서 집에 가라는 내용이었다. 퇴근 시간을 몇 시간 앞둘 때라 평소 같으면 신이 났을 테다. 그러나 창문을 후려치듯 쏟아지는 비와 시커먼 풍경에 걱정이 앞섰다. 태풍이 어쩌면 상륙할지 모른다는 뉴스는 보았으나 늘 거짓말처럼 비켜갔지 정말로 머리 위를 지나갈 줄 몰랐다. 전철이 아직 움직이고 있을 때 집으로 갈 것인가. 태풍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 볼 것인가. 고민은 짧았다. 승객이 뭐 어때서, 사고가 나서, 신호등이 어째서 등등 다 꼽기도 힘든 다양한 이유로 멈추는 전철을 떠올리고는 우산을 무기 삼아 일어났다.
현관을 나가 본 바깥은 엉망진창이었다. 비바람에 부러져 날아온 기다란 가지가 굴러다니고 빗소리로 귀가 다 먹먹했다. 하필 역까지는 걸어서 10분쯤 걸렸다. 방패처럼 우산을 펼쳤다. 날아오는 것들은 얼추 막아주겠지. 한 발 내딛는 순간 바람은 비바람에 쓸려 갔다. 손에 든 우산이 도망가려 발버둥 치는 걸 겨우 잡고 버텼더니 그만 똑 부러져 버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온몸을 두들겨대는 비는 내가 샌드백이라도 되는 줄 아는 것 같았다. 그놈의 우산이 뭐라고 부러진 우산을 손에 들고 굳이 가는 길에 있지도 않은 편의점을 찾아 들어갔다. 짧은 사이 홀딱 젖어 들어갔더니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점원이 우산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진열대에는 우산이 딱 하나 남아 있었다. 추워서 덜덜 떠는 손으로 겨우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와 우산을 펼쳤다. 바람을 맞고 활짝 열린 우산은 뒤로 발라당 넘어갔다. 그 틈에 댓살 몇 개가 똑 부러져버렸다. 근처에 쌓여 있던 (아마도) 망가진 우산들이 비웃듯이 천조 가리를 파닥댔다. 손에 있던 우산 두 개를 가만히 더미 속에 올려두고 맨몸으로 집을 향했다.
어릴 때 맞아본 소방차의 물줄기에 버금가는 빗줄기를 뒤집어쓰고 걷는 것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눈과 코로 물과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니 보는 것도 숨 쉬는 것도 힘들지. 자꾸 벌어지는 입 때문에 이빨이 다 시렸다. 바닥에 잔뜩 굴러다니는 나뭇가지 피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비를 그대로 맞으며 펄럭거리는 옷자락을 여미고 몸에 힘을 한껏 준 채 걸어 다녔다. 우산은 들고 있지 않거나 잘 접어서 손에 들고 있거나. 가끔 뒤집어진 우산을 어떻게 해보려고 낑낑 대는 사람도 보였다.
집에 가는 길은 길고 추웠다. 덜덜 떨면서 여름이라고 차가운 바람을 있는 대로 틀어 놓은 전철을 타야 했고, 달라붙은 옷이 살에 쓸려 아픈 것을 참아야 했고, 배는 고프고 요리는 하기 싫어서 슈퍼에 들렀더니 비슷한 사람들이 한가득이라 먹을 건 별로 없이 줄만 길었다. 슈퍼를 나올 즈음엔 휘몰아치던 비가 보슬비로 바뀌어 걷기가 수월했다. 한 팔에 묵직한 슈퍼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지만 기다란 우산이 없으니 발에 걸리는 것 없어 편했다.
옴팡 젖어 도착한 집은 널브러져 있어도 천국이 따로 없었다. 늘 하던 샤워이면서 원하는 만큼 흘러나오는 따뜻한 물이 그렇게 고마웠다. 노글노글해진 몸으로 이불을 둘러 쓰고 까먹은 슈퍼 음식들도 전부 맛있었다.
비가 온다고 우산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얼마나 쏟아지느냐 물이 스며들지 않게 가공된 천조 가리로 가릴 필요가 있느냐에 따라 판단하면 될 일이다. 너무 쏟아져서 어쩔 수 없을 때는 과감하게 우산은 내팽개쳐도 아무 문제없다. 비 맞은 생쥐꼴이 될지언정 더 꿀 맛 같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굳이 우산을 망가트려가며 쓸 바에는 맨 몸으로 쏟아지는 비 사이를 뚫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