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그런 날이 있다. 주의 깊게 살핀다고 하는데도 중요한 순간 정신머리가 어디로 가고 눈앞이 보이지 않는 날. 냄새나는 덩어리를 밟고 미끄러져 휘청거리기도. 어딘가에 부딪혀 멍이 들기도.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나중에야 깨달은 뒤에 허둥지둥 대기도 하는 날이다.
한 달도 더 전에 세미나 참가 일정이 잡혔다. 스스로 필요한 내용이라서 골랐다기보다 임원이기 때문에 유치원을 대표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나 외에도 함께 참여하는 이는 둘이나 더 있었다. 날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만나서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하며 서로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그날은 특별한 날로 머릿속에 저장되었다. 아이들과의 하루를 점검하고 나의 동선과 해야 할 일을 빠짐없이 체크했다. 아이가 넷이고 나이차가 나면 학년이 제각각이라 챙겨야 하는 것이 다르다 보니 조금만 틀어져도 잠깐사이 엉망진창이 되기 쉽다. 결국 아이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게 되고 서로 기분이 상하면 잠들 때까지 머릿속에 구름이 꽉 낀 것처럼 답답하다. 그래서 오버지만 시뮬레이션도 했는데.
갑작스러운 일은 말 그대로 예상치 못한 때에 생긴다. 그간 24시간 거의 쉼 없이 돌아가던 세탁기가 삑삑 대는 알람음을 남기고 멈춰버렸다. 세탁통엔 세제물을 반쯤 머금고 젖은 빨래가 덩그러니 담겨 있었다. 이리될 줄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하필 세미나 가기 이틀 전일 줄이야. 약속을 잡은 주제에 때가 가까워지면 가기 싫은 마음에 저절로 핑곗거리를 떠올리곤 하는데 딱 걸리고 말았나. 뭘 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온갖 버튼을 누르고 서 있는 내 옆으로 깨끗해지기를 기다리며 산처럼 쌓여있는 세탁물들이 왠지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덮칠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빨리 해결하고 싶지 안 그렇겠느냐만은.
세탁기 액정에 표시된 에러메시지가 시야 한가득 들어차고 머릿속에는 해결 방법보다 '어떻게 하지'만 맴돌았다. 빨래와 관계없는 생각들은 훌훌 날아가버렸다. 가끔 오는 날의 시작이었다. 밤늦게 수리요청을 하고 다음날 세미나에 가는 그날 방문한다는 전화에 그러시라 대답하면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코인란도리에 가서 돌아가는 빨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때서야 깨달았다. 함께 가기로 한 친구 둘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일전에도 가기로 했던 일정을 아이가 아파 가지 못하고 당일 새벽에 못 간다 연락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가기로 한 것이었는데 전날 취소라니.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면서 고개를 들 수 없어 푹 수그린 채 자판을 두들겼다. 미안하다는 말쯤이야.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고 이것뿐이면 기억에 남지도 않았을 테다.
그러나 다음날. 셀프 계산대에서 한창 물건에 있는 바코드를 기계에 찍어낼 때였다. 스마트폰에 웬 메시지가 뜬다 싶더니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세탁기 수리기사가 예정시간보다 40분이나 일찍 우리 집을 방문한 것이다. 잠깐 스마트폰 액정으로 봤던 메시지는 일정이 취소되어 빨리 방문하게 되었다는 수리기사의 연락이었다. 남편과 통화를 하면서 잘 돌아가지 않는 세탁기의 상태 설명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머릿속에서만 생각하고 다 내뱉지 않았는가, 알아서 고쳐주길 바랐는가, 이도저도 다 잊어버리고 만 건가. 뭐가 되었든 남편 왈, 수리기사는 시종일관 태도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부터 제대로 말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고 하나 전화통화가 안되었던 것도 한 몫했음이 분명하다. 괜히 나 대신 대응한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미 그전에 통화 때도 괜히 쭈그러든 탓에 더 고개가 내려갔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내 일정 취소됐고, 할 일 많아서 허덕이는 건 똑같은데... 수리일정은 미뤄졌다. 같은 사람이 오지 않길 빌고 있지만 또 모르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니 금세 세탁기 수리기사와 마주할 날이 올 것이다. 엉망으로 뒤엉켜버린 것 같은 기분이 그때쯤 되면 술술 풀려 있으려나.
돌아가지 않아 코드를 빼놓은 세탁기를 보며 뒤엉킨 것들이 자꾸 떠오르지만 오늘은 쉬지 않고 지나가는 매일의 하나일 뿐이다. 조금 전의 나와 어제의 내가 다르듯 아주 살짝 다른 날들 중 하루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대고 욕을 할 수는 없다. 흐르는 물에 대고 구시렁댈 수도 없지. 어떤 날도 마찬가지. 지나간 날과 조금 다른 오늘일 뿐이고 지나가는 중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