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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목표: 화나도 집을 나가지 말자

예민한 여자와, 무던한 남자의 고군분투 신혼생활

by 프니

언젠가부터 백은 핸드폰에 생리 기록 어플을 깔았다. 지독한 피엠에스 열병을 앓는 배우자를 위한 나름의 해결책이었다. "이제 곧 시작할 때야, 눈물이 날 수도 있으니 조심해"라고 알려주는 인간 길라잡이. 나는 그 덕에 정말 조금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음, 완치하려면 50년 정도 남은 것 같다.


누가 보면 갑질 하는 거 아니냐 생각할 정도로 나는 극예 민주의자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밖에서는 나를 보고 평화주의자 간디라고 불릴 만큼 좋은 게 좋은 거다~이래도 흥, 저래도 흥 성격이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내 밑바닥을 보여 주는 게 거리낌이 없는 편. 하지만 365일 맨날 그런 것은 아니고, 생리를 하기 일주일 전쯤 예민력 최고치를 찍게 되는데.


처음엔 몰랐다. 이게 PMS라는 것을.


어느 정도인지 읊어보자면, 그 기간에는 날밤을 샐 때가 많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지들끼리 우왕좌왕 꼬리잡기를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해가 떠있질 않나, 백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 짜증 난다고 전화를 툭! 하고 끊어버리지 않나. 갑자기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느라 바쁘다. 하하.. 하지만 정말이지 평소에는 그러지 않는다.(결백)


아직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하나둘 내게 앞다투어 걱정 어린 조언을 해줬다.


“혼인신고하기 전까지는 조심해라.”

“사람일은 모르는 일이야, 백 서방이 그럴 일은 없지만...”




결혼식을 올리기 일주일 전쯤, 단골 카페에 앉아 백에게 물었다.

"결혼하게 되면 나한테 바라는 거 있어?"

예를 들면 치약은 중간부터 짜지 말아줘라든가 하는 것들이 궁금했다. 솔직히 그냥 한번 물어본 거였는데, 백은 스치는 월급통장만큼 빠르게 대답했다


첫째, 화가 나도 집에서 나가지 말 것.

첫째, 삐쳐도 집에서 나가지 말 것.


가만히 듣던 나는 화가 나고, 삐치는 상황을 안 만들면 되는 거 아니냐고 큰소리를 치니 백은 자기가 잘하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정말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연애와 결혼은 분명 다르니까.

연애 때는 데이트도중 기분 나쁘거나 열 받으면 집에 간다고 일어나면 끝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 나 집에 갈래.” 하면 "그래 좋아! 집에 가서 이야기해보자 "라고 이어지게 된다.


같은 공간에 산다는 것은 단순히 같이 잠자고, 같이 밥 먹는 홈메이트 그 이상이었다. 문을 열면 서로가 있다. 그 공간 안에서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감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


백은 툭하면 삐치고 집에 간다고 난동부리던 연애시절의 내 모습이 마음에 남았나보다. 결혼후에는 화가나고, 삐쳐도 대화로 풀자고 하길래 "난 원래 우울하면 혼자 있어야 하는데??방문 닫고 있어야겠다!"며 씨익 웃고 말았던 그때, 그때는 몰랐다.


우리가 살게 될 신혼집의 운명을.

신혼집은 15평. 방은 하나.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문을 닫고 대피할 수 있는 공간은 오직 한 곳, 화장실뿐이다. 하나있는 방은 퀸사이즈 침대를 들여놓으니 문이 닫히지 않을만큼 좁았다.


그날도 나 혼자 화내고, 성내다 침대위에 누워서야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후 백에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 안방 문이 안 닫혀서 정말 다행이지 않아? 만약 문이 닫혔다면 자기 맨날 거실에서만 살았을 듯”


“그럴 리가! 근데 문 안 닫히는 건 좋긴 좋다. 흐흐”


24시간 365일 문이 닫히지 않는 그 비좁은 방, 침대 위에 누워 우리는 이 작은집을 구하게 된 건 정말 운명이라며 웃었다. 문이 닫히는 큰집에 살게 되었다면.. 어후 상상을 말자.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내 성격에 자부심은 없었지만 정말이지 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 백과 함께 살다보니 내가 이렇게 성격이 개차반이었나, 개이기적이네, 뭐 이런 게 다 있어? 싶다가도 뭐야, 나 완전 배려 쟁이네, 내가 나에게 반한다, 나 같은 아내가 어디 있어?를 왔다 갔다 한다.

결혼이란 나의 가장 나약한 마음을 알게 되는 것, 때로는 나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이해하게 되는 것. 그러니까 경사 심한 롤러코스터를 타다가도 천원짜리 솜사탕에 맘이 풀려 잔잔한 회전목마를 타러 가는 것 아닐까.


우리는 오늘도 롤러코스터를 타다 손잡고 회전목마를 타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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