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넣는재미
" 자기, 뭐 잘못한 거 있어? 뭐야!!!!흐흐흐" 하며 소리를 냅다 질렀다. 지하철역으로 몰래 마중을 나갔다가 백에게 장미꽃을 받았다. 알고보니 그날은 로즈데이였다. 좋으면 좋다고, 고마우면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내 방정맞은 입은 오글오글 거리는 분위기를 탈피하려 부스터를 쓰며 질주했다.
"자기 로즈데이도 챙기는 사람이었어??와우 신세대네 신세대." 하며 꺼이꺼이 웃어대며 놀리기까지했다.
난 아무래도 오글오글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병에 걸린게 틀림 없다. 그것도 꽤나 깊게. 이런 내 성향탓에 난 결혼식에 대한 로망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하루만에 드레스를 고르고, 결혼식날이 되어 그 드레스를 입었다. 공주같은 드레스를 입고도, 드레스 안에서 불쌍하게 조여진 내 갈비뼈들이 더 걱정 됐다. 무사히 식이 끝나 기념사진을 찍은 뒤였다.
엄마는 부케 받을 애들이 수두룩 한데 왜 안던지려 하냐며 남이 하는 짓을 안하려는 딸을 신기하듯 쳐다봤다. 그렇지만 내가 결혼식 내내 들고 있던 그 의미있는 꽃을 우리집에서 오래오래 보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설레지 않을까?
그렇게 오래오래 잘 보관해서 꽃을 볼 때마다 우리의 첫 시작을 떠올리기를 바랐다.
꽃다발 한아름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널부러져 있는 과자봉지를 치운 테이블 위에 하얀 장미를 둔다면 딱일텐데,
아무리 둘러봐도 이 꽃을 담을 화병이 없었다.
분리수거를 위해 공기를 빼버려 찌그러진 페트병 뿐이었다. 이마저도 안되나 싶던 순간, 백이 자기를 믿어보라며 페트병 구멍으로 바람을 쏴아악 불어댔고 곧 쪼그라져있던 페트병은 아주 판판하게 퍼졌다. 좁은 입구를 잘라 꽃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늘리고, 토이스토리 박스테이프까지 둘러주니 나름 귀여운 꽃병 완성-!
투박하고 멋스럽지 않은 임시화병에 꽃을 담았다. 누군가에게는 초라해보일 수 있는 순간이지만, 우리에게는 벅찬 설렘의 순간이었다.
순간 우리집을 둘러보니 부재중인 물건들이 참 많더라.
요즘 필수템이라는 스타일러도 없고, 잼을 쉽게 바를 수 있는 나이프도 없고, 쿠키를 구워 낼 오븐도 없었다.(다리미도 며칠전에 겨우 구매함)
그렇다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하진 않다. 고깃집에 다녀오면 페브리즈를 뿌리고 걸어두면 되고, 나이프 대신 작은 수저에 올려 고루게 잼을 펴바를 수도 있고, 쿠키는 사먹으면 된다.
우리집에는 우리가 있고, 사랑도 있다.
그거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