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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남편 앞에서는 쪽팔린 게 없다.

by 프니

2017년, 퇴사 위기가 찾아왔다. 내가 회사 체육대회에서 치어리딩을 해야 한단다. 평소 두 다리로 회사 오는 것도 벅찬 내가 무거운 치어리더 옷을 입고 방방 뛰면서 직원들의 사기를 올려야 하는 춤을 추어야 한다고? 팀장님은 단호했다. 그건 팀의 막내인 내 몫이라고 했다.


수백 명 앞에서 허우적 대고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고, 나는 퇴사를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극적으로 그 해의 체육대회는 취소되었고, 나의 퇴사도 잠정 연기되었다.


고작 춤 하나 추는 걸로 퇴사를 생각하는 나는 사실 그런 사람이다. 남 앞에 서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그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출 바에 한 달간 무급으로 일을 하는 게 더 속편 할 그런 사람. 세상사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춤추는 것만은 정말 피하고 싶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춤꾼이 다 되었다. 다만, 사람들 앞에서 추는 것은 여전히 자신이 없고, 오직 남편 앞에서만. 그러니까, 남편 앞에서 춤을 추는 게 일상이 되었다니.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무한도전

티브이를 보다 말고, 눈을 반쯤 뜬 채로 화려하게 골반을 흔들어대는 남편을 보며 깔깔 웃고 있을 때였다. 남편은 내가 우울하다 싶으면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매번 보기만 했던 나였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갑자기 하늘에서 나를 위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준 것 같았다.


나는 자연스레 무대 위로(거실) 올라갔다. 그러고는, 아무런 음악도 없이 그저 영혼의 느낌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으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니, 마음속 건더기들이 소화가 다 되는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신나게 엉덩이를 돌리다가 눈을 떴다. 코앞에서 남편이 입을 틀어막고 웃고 있었다.


남편의 커진 입과, 흔들리는 동공을 보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털썩 주저앉아 배를 잡고 굴렀다. 내가 남 앞에서 춤을 추다니, 이런 일이 있다니. 춤추는 것은, 종이배로 한강을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 짓을 했다니 스스로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한번 추기 시작하니, 내 몸속에 잠자고 있던 댄스 dna가 하나둘 부활하기 시작했고, 나는 여러 가지의 춤을 연마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은 그런 날 보더니, 춤 선이 디테일한 게 딱 SM 스타일이라며 놀려댔다. 역시 처음이 어렵다니까.



생각해보니 남편 앞에서는 쪽팔린 게 없다. 머리에 기름기가 돌아도, 태평양처럼 넓은 이마를 까고 머리를 묶어도, 조구 마한 뱃살이 나와도, 춤을 아무렇게나 추어도, 남들 앞에서는 말 못 할 지질한 감정을 내뱉어도, 쪽팔리지 않는다. 그저 편안함만이 느껴진다. 남편도 그럴까? 싶어 물어보려 했는데, 뭐 물어보지 않아도 백 프로였다. 남편은 나보다 더 심하게 귀여운 척을 잘하고, 이상한 춤도 뻔뻔하게 잘 추니까.




결혼상대자로 어떤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단순한 것들을 나열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가장 숨기고싶고, 잘 하지 못해서 감추고 살았던 것이어도, 이 사람앞이라면 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좋은 것 같다고."


결혼 전, 친구들은 남편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물어봤다. 그리고, 결혼 초기에는 남편과 결혼해서 무엇이 좋냐고 많이 물어봤다. 전자의 질문에는 굉장히 추상적으로 답했었는데, 후자에 대한 답은 꽤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어도 된다는 편안함이 제일 좋다고. 예를 들면, 목 늘어진 티셔츠에 구멍 뚫린 수면바지를 입고 게다리춤을 추어도, 웃으면서 함께 춤을 추는 남편이 참 좋다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기에는 우리의 춤은 너무 단조롭다. 게다리춤 아니면, 훌라춤. 우리는 약속했다. 먼 훗날, 관절이 약해지더라도, 다리를 떨면서 춤을 추며 웃는 귀여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자고. 그날을 위해, 오늘도 힘껏 다리를 떨며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할 모습을 공유한다. 결혼하기를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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