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리를 틀고 온 날

체험 치과 현장

by 프니

저는 오늘 주리를 틀고 왔습니다. 얼마나 인생에 큰 잘못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오늘 주리를 틀고 왔습니다. 안그래도 전생에 큰 잘못을 지은 죄로 지겨운 회사도 몇 년 다녔는데도 제 잘못이 사라지진 않았는지 오늘 저는 한 시간 반동이나 의자에 누워 입을 벌리고 있었어요. 그뿐인가요. 제 얼굴에는 입구멍만 뚫린 초록천이 덮여있고, 정체모를 기계들의 소리를 들으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오늘 다시 알았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선생님."


무릎이라도 꿇고 저 집에 가면 안 되냐고 빌고 싶었는데

"움직이면 다칩니다"라는 무서운 말에 또 그것도 못하고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내 이빨이 창문 밖 아스팔트도 아닌데 왜 이렇게 처절하게 밟히고, 긁고, 쑤심을 당해야 하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뿐이 없었습니다




뾰족한 기구가 제 가엾은 어금니 위에 올라간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고, 힘없는 머리털이 뾰족 스는 듯한 느낌, 정말이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그 순간



주리를 틀어라!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정말이지 주리가 틀어지고 있는 듯한 고통을 느꼈습니다. 아니 차라리 주리가 낫겠다 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철없는 생각이지만 주리는 앉아서 앞이라도 볼 수 있지, 이건 뭔 벌인가.. 싶어서요. 네, 제정신으로는 그시간동안 누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는 어금니 앞 치아에 물을 뿌리시더니 시리냐고 물어보셨죠, 저는 너무 시리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화들짝 놀래요. "어머, 찬물도 아니었는데 너무 시리다고요?" 선생님은 찬물을 한번 뿌려보겠다 했고, 저는 괜찮다고 발버둥 쳤지만 선생님은 이내 제 입안에 차가운 물을 뿌리셨고, 그 시림은 방금 것과는 확실히 다른 재질이었어요.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3년 전에 충치치료에 200만 원과 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보냈는데, 다시 돌고 돌아 또 치과에 와 누워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눈을 감았더니 이제는 그동안 열심히도 먹어치운 하리보 젤리, 허니버터 아몬드, 인절미 떡, 닭발, 김치전, 떡볶이, 비비고 왕만두, 삼겹살, 살치살, 고추장아찌, 갓김치, 제육볶음, 돈가스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음식을 조금 덜 먹었다면 제가 지금 이런 벌을 받지 않았을까요. 차라리 주리를 틀어주세요. 앞으론 저 맛있는 음식들을 맛있게 못 먹을 것만 같아 너무 슬퍼 몸에 힘이 다 빠지려던 차 선생님의 "오케이"소리에 눕혀있던 의자가 처언천히 올려졌고, 안경을 쓰고 입을 헹구고 한번 코를 풀며 정신을 가다듬은 후에야 발을 땅에 붙일 수가 있었는데요. 아,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발을 내딛으며 걸음 하나에 후회를, 걸음 하나에 결심을 했습니다.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죠. 내가 그동안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이빨이 잠깐 고장 난 것뿐이라고,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보니 제가 정말 잘못을 했더라고요. 이빨이 자기가 병들어간다고 티 낼 때마다 치과에 가지 않고 진통제로 연명하며 살아왔으니, 이런 벌은 달게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은 경과를 보자며 일주일 뒤에 오라고 하셨어요. 제게 주어진 일주일, 저는 또다시 먹고 닦고를 반복할 것입니다. 부디 저는 이 외롭고 소름 끼치는 싸움에서 꼭 이겨내고 싶습니다. 환하게 웃을 수 있기를.


체험 치과 현장, 첫 번째 이야기
2020.05~
충치치료 대장정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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