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감정을 생각하는 슬기로운 고백

슬기로운 의사생활

by 프니

"야 일단 네가 좋아하면 말이라도 해봐,

후회하지 말고!"

신입생 시절 두 달 동안 혼자 김선배를 좋아하다 못해 사모하고 있던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오직 전지적 친구 시점으로 친구의 마음이 편하길 바랐고, 더 나아가 행복해지기를 바랐으므로 친구가 하루빨리 그 선배에게 그 뜨거운 감정을 식기전에 전달하길 바랐다. 이쁘고 참한 나의 친구가 고백을 하는 건데 당연히 그 선배가 받아줄 거란 나만의 불확실한 확신이 만들어낸 연애 조언이었다.



이제 곧 시즌1이 마무리되는 슬기로운 의사생활, 11부에서는 송화를 향한 두 남자의 마음 겨루기가 참 오래도 나왔다. 인턴 시절부터 좋아했던 치홍이와 대학시절부터 좋아했던 익준이의 피 터지는 견제, 소리없는 싸움은 여러 번 내 손을 쥐락펴락하게 만들었다.



99학번, 익준이와 송화는 아주아주 오래된 친구다. 술자리 게임에서 채송화 교수님을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냐는 질문에 여자로 본 적 있다며 폭탄발언을 한 이익준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애 딸린 이혼남이다. 이혼남의 사랑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송화를 향한 익준이의 감정선이 갑작스럽게 느껴진다는 게 첫 번째 문제고, 송화의 마음이 편해 보이지 않다는 게 문제다.



안치홍은 신경외과 레지던트, 송화 밑에서 일과 삶을 배우다 사랑까지 하게 돼버렸다. 연하남인 치홍은 송화에게 고백을 했다가, 보기 좋게 차였다. 사건은 같이 저녁을 먹고 돌아오던 송화의 차 안이었다. 사실 오늘이 자기 생일이었다며 말하는 치홍에게 송화는 원하는 것 없냐고 물었고, 치홍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반말 한번 해도 될까요?" 난데없는 반모 타임(반말모드)이 시작되었고, 좁은 차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조심해서 가" 하며 송화의 어깨를 툭툭 치고 빠지는 치홍.

본인의 뜨거운 마음을 송화의 어깨에 슛하고 던지고 갔다.


바로 저번 주에 방송된 10회에서도 고백씬이 나왔다. 산부인과 레지던트 추민하의 사랑고백이었다. 추민하는 조교수 석형이에게 좋아한다며 돌직구 고백을 했다. 하지만 추민하의 고백은 달랐다. "병원에서는 절대 티 안 낼게요, 그냥 제 마음만 알아주세요" 하며 상대방이 혹시라도 느낄 불편함에 대해 짚고, 고백을 마무리한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안치홍이든, 이익준이든 송화랑은 잘 안 되길 바란다. 두 남자는 송화의 마음을 생각하기 이전에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한 후 지들끼리 줄다리기를 하며 신경전을 부리고 있는 것 같다. 마치 그 싸움에서 이기면 송화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듯.



매점에 앉아 컵라면을 먹으며 친구에게 뜨거운 고백을 종용했던 그때, 결국 친구는 그저 좋은 사이로 남고 싶다며 고백을 하지 않고 졸업을 했고, 곧 더 좋은 남자를 만났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가까운 친구 입장만 생각한 채 고백을 하라고 부추겼구나 싶었는데, 오랜만에 연락이 온 친구가 뜻밖의 말을 했다.



"야, 나 그때 너 말대로 고백했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사실 알고 보니까 그 선배가 짝사랑하는 언니가 있었더라고..!"


분명 그 당시에는 자신 없다는 말로 고백을 하지 않겠다 했는데 저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래도 고백을 했다면 네 맘이 더 편하지 않았겠냐 물으니 자기도 짝사랑, 그 선배도 짝사랑 중이라고 하니 괜히 동료의식도 생기고, 동질감도 느껴져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졌다며 웃던 친구. 아무래도 친구는 본인의 감정보다 김선배의 마음을 앞서 생각했나 보다.



이익준이 틀리고, 친구가 맞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상대방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면서 하는 건 슬기로운고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익준을 보니, 박선배가 떠올랐다. 추적추적 비가 오던 날 본인 동네로 불러낸 박선배는 갑자기 빕스에 가서 스테이크를 사줬고, 카페에 가서 녹차라테도 사줬다. 오늘 무슨 날이냐 물으니 자기 마음이 요즘 불편해서 나를 불렀단다. 뭔 일이냐 물으니 하루 종일 내 생각이 나 잠에 못 든다고 어떡하냐는데, 정말이지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줄을 몰라 죄인인양 고개를 숙인 채 죄없는 빨대를 물고 또 물었다.


박선배는 굴하지 않고 나와 사귀어야 하는 이유 2.578가지에 대해 말을 하며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마치 오늘 실적을 올리지 않으면 잘릴 운명에 처한 영업사원처럼 절박하고 진지했다. 시간은 10시가 다 되어가고, 집에 가야겠다는 내 손을 붙잡으며 대답만 해주고 가라고 하는데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박선배랑은 네이트온으로 시시한 장난이나 치던 사이인데, 심지어 어제는 내게 여자애가 이쁘게 좀 웃으라며 헛소리를 했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고백을 한다고? 나는 아직 영상을 틀지도 않았는데, 선배는 32배속으로 혼자 질주했다. 남의 마음을 거절하는 방법을 몰랐던 나는 결국 그 어이없는 고백을 받아들였다. 이게 내 첫 연애의 시작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박선배가 내게 행한 것이 폭력이었다는 것을. 때리고 상해를 입히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무턱대고 강요하는 것 또한 폭력이니까.



노래방에서 고백 노래를 부르는 익준이를 보며, 아련하게 송화를 바라보는 치홍이를 보며, 나는 내 친구를 봤고 박선배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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