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웅, 당신은 대체...
환갑을 거뜬하게 넘은 우리 엄마. 엄마는 역할,직책은 정말 다양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엄마 혹은 권사님으로 통한다. 이른 나이에 권사님이 된 엄마가 대견했는지, 아빠는 엄마가 차려준 밥상 앞에서 권사님을 위해 기도했고, 엄마가 집에 늦게 들어올 때면 권사님이 말이야~라고 웃으며 엄마를 놀리기도 했다. 기도의 어머니라는 타이틀을 좋아하고, 집안일도 회사일도 멋지게 해내던 엄마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요즘 인생이 재미가 없네.."
"엥,, 왜??!!"
"이제 뭐 재미있는 게 있을 나이도 아니고.."
"어?? 아니 그래도..."
나는 매번 엄마에게 좋은 위로를 건네지 못한다.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을 때도, 할머니가 안 계셔서 외롭다는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으며 울부짖었을 때도, 결국 할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나는 엄마에게 "엄마, 괜찮아? 엄마, 우리가 있잖아."라는 아주 간단한 말들을 내뱉지 못했다. 언제나 밝은 얼굴로 씩씩하게 움직였던 엄마의 모습만을 엄마라고 생각했던 탓이었나. 고작 열몇 살 먹은 내가 엄마의 엄마, 아빠 빈자리를 채울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나. 아무튼 나는 늘 엄마에게 어깨를 내어주지 못하는 그런 딸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어느 날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말했다. 요즘 너무 우울하다고. 내가 결혼한 지 두 달도 안 됐을 때였다. 언젠가, 사과를 깎아주며 나의 빈자리가 생각보다 크다던 엄마. 생각해보니 며칠 전에도 엄마는 내게 그리움의 감정을 보여주었었구나. 엄마의 고백을 듣고 신혼집으로 돌아온 날, 나는 오래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엄마가 무수한 날들을 자식 걱정했던 것처럼 나는 그제야 엄마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나는 엄마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이것저것 생각해보려 애썼는데,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자주 집에 들러 얼굴을 비추거나, 카톡으로 오늘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엄마의 답장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고, 엄마가 풍기는 분위기의 냄새 또한 달라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카톡만으로는 그 변화의 원동력을 알아내기는 어려워 집으로 가기로 했다.
•띠띠띠 띠띠띠
보안키를 누르고 들어간 집 거실에는 불이 꺼져있었다. 헉? 뭐지. 아, 아직 다들 퇴근을 안 했겠구나. 어? 근데 엄마는 다섯 시면 들어오는데? 하며 거실을 걸을 때쯤, 어딘가에서 희미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분명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방문을 슬쩍 열어보기로 했다. 그곳은 안방이었으며, 낯선 남자의 목소리는 엄마손에 쥐어진 핸드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무언가 허탈한 마음이 들어 엄마 옆에 앉았다. 엄마는 왜 말도 없이 집에 왔냐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엄마의 얼굴은 선명하게 밝았다. 도대체 그 목소리가 누구냐고 물은 내게 엄마는 핸드폰 액정을 보여주며 방긋 웃었다. 마치, 본인의 자랑스러운 아들을 소개해주는 것처럼. 그리고 그는 훗날 우리 엄마의 명예로운 양아들이 되고야 만다. 그렇다. 그는 이름도 영웅스러운 임영웅 님. (우리 집에서 영웅이라고 말해도 되는 사람은 엄마뿐임)
엄마는 그가 나오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된 후로,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듣고는 1차로 반하고, "보랏빛 엽서"를 듣자마자 그의 팬이 되었다는 말을 하며 웃었다. 엄마는 그의 어린 시절 겪은 어려운 일들, 고운 얼굴에 상처가 난 이유, 돈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팔았던 일들, 몇 년 전에 아침마당에도 나왔던 것. 등등 그에 대한 디테일한 정보를 내게 하나둘 읊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결승에서 <진>을 차지하고야 말았다. 엄마는 결과를 발표하는 내내 자기는 도저히 떨려서 못 보겠다며 동생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사회자가 전국 팔도가 울릴 만큼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비로소 엄마는 꽃이 된 얼굴로 거실로 나왔다. 그때부터였을까, 엄마는 본격 덕질을 시작했다.
나는 제대로 된 덕질을 해 본 적이 없다. 음식이든, 무엇이든 간에 쉽게 질리는 습성을 가진 내게 덕후 기질은 아예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엄마의 피에는 아주 강렬하고 찬란한 덕후의 피가 힘차게 흐르고 있었으며, 60년 인생 동안 발산되지 않았던 그 피는 <임영웅>이라는 영웅을 만나 화끈하게 발산되어버린 것이었다. 와, 이 정도라고?
엄마는 졸린 눈을 비비며, 늦은 시간에 방송하는 그의 프로그램들을 놓치지 않고 챙겨보는 것은 물론, 음원 어플을 깔아 스밍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으며,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확장해 나가듯 온라인 이곳저곳을 넘나들며 덕질의 영역을 확장시켜나갔다. 엄마는 그에게 추석 전에 유튜브 구독자 100만이라는 선물을 안겨주고 싶어 했다.
"엄마, 100만은 진짜 쉬운 게 아니야. 안 돼도 실망하지 말고 크크" 하며 놀렸었는데 정말 또다시 말도 안 되게 그 숫자를 달성해 낸 임영웅. 나는 그때부터 그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노래에는 무엇이 들어가 있기에 하나님 덕질(?) 밖에 못하던 엄마가 이렇게 좋아하는 것인가!!!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발 짝 거리를 두고 조용히 엄마의 덕질을 지켜보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내게 불쑥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 또! 임영웅이었다. 세 남매 중 가장 엄마의 덕질을 응원하던 나였기에, 엄마는 아주 자주 임영웅의 영상을 공유했다. 이번에도 어김없는 그의 영상이었다. 오늘은 이 노래 구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재생된 노래를 들으며, 정확히 1분 20초쯤 가슴속에 뜨거운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노래가 끝나기 전 정신을 차리니 내 눈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에는 무언가 묵직한 힘이 분명 있었다.
https://youtu.be/qG8 GjQqHQ-U
그가 부른 엄마의 노래. 엄마는 이 노래를 벌써 몇 번이나 들은 지 모르겠다고 웃었다가, 할머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는 말을 하며 또 울먹이다가, 어떻게 이런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것이냐고 칭찬을 하며 또 웃었다. 엄마 앞에서 할머니 이야기를 해 본적이 언제였지. 아니, 엄마가 먼저 할머니 이야기를 꺼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거 같다. 육 남매를 키우시며 고생하시다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하며 엄마는 연신 눈물을 닦았다. 엄마의 손에는 할머니 손에 가득하던 검버섯과 주름이 조금 그려져 있었고, 나는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아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살아 계실 거 같다고 말하는 엄마의 눈은 여전히 핸드폰 속 임영웅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날, 임영웅의 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엄마와 오랫동안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제야 알았다. 엄마에게 임영웅이란 단순히 스타덤에 오른 젊은 트로트 가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몇 번의 인생 고개를 넘으며 육십이라는 나이에 도달한 엄마에게 임영웅은 엄마를 추억할 수 있는 노래였고,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해주는 의사였고, 소화되지 않은 채 묵혀놓았던 감정들을 시원하게 처리해주는 소화제였다.
나는 그날 이후 엄마의 덕질이 더 좋아졌다. 엄마의 덕질을 더 열렬히 응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고된 삶에 미간이 찌푸려지다가도 임영웅 이야기만 하면 엄마는 소녀팬이 된 듯 맑게 웃었으니까. 임영웅이 외치는 건행(건강하고 행복하세요)이라는 말처럼, 육십 대 엄마의 덕질이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다음 글에서는
육십 대, 덕질 이렇게 한다. 편을 연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