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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고래밥은 고래밥인가,안고래밥인가.

by 프니

"뭐? 보리밥이 먹고 싶다고?"

핸드폰 너머 남편이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아니 보리밥이 아니라,, 고,, 래밥..."


며칠 전 나는 고래밥이 땡겼다. 저녁을 먹기도 전이었다. 고래밥이 눈앞에 아른아른거려서 일을 제대로 할 수조차 없었다. 아기자기한 크기에 짭조름한 맛이 일품인 고래밥, 재미로 먹고 맛으로 먹는다는 고래밥이 미친 듯이 먹고 싶어, 퇴근하고 돌아오는 남편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


울릉도에서 오징어도 잡아 올 수 있다며 걱정말라던 남편. 집으로 돌아온 남편 손에는 고래밥이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고래밥이 없었다. 그것은 왕고래밥이었다. 그것도 두 봉지나.


"아니~~왕은 아닌데에에에. 고래밥이랑 왕고래밥이랑은 다른 데에"


왕고래밥을 건져 올 줄은 상상도 못한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양손으로 왕고래밥 봉지를 들고 방방 뛰었다. 베란다 창에 비친 모습이 마치 작두를 타는 무당 같아 보였다. 그래, 침착하자. 나는 모태 크리스천이잖아. 고래밥은 없지만 왕고래밥은 있다. 그래, 보리밥이 아닌 게 어디인가.




고래밥의 정체성

어릴 때부터 고래밥을 좋아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가격에 비해 양이 많았으니까. (중량을 따져보면 다른 과자와 비슷한 것이었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오징어, 고래, 거북이, 문어 등등이 모여있는 고래밥은 특별한 멋이 있다. 모두 다 같은 모양으로 정갈하게 담겨있는 다른 과자들과 달리, 고래밥에는 다리가 없는 오징어, 대가리가 날아간 부상을 당한 고래밥들이 많았다. 하지만, 부서진 과자 조각에 잔뜩 묻어있는 양념 맛은 일품이었으니까. 여기저기 조각나버린 고래밥을 보아도 용서할 수 있었다. 고래밥은 부서져도 고래밥이었다.


하지만 고래밥과 왕고래밥은 분명 다른 것이다. 왕고래밥을 먹어보지 않았지만 일단 사이즈부터 다르고, 고래밥 인생 30년 차 경력직이 확신하는데 식감도 다를 테다. 고래밥을 먹는 이유 중 하나는, 과자를 모아 한번에 욱여넣어 씹어먹는 맛 때문이었는데 왕고래밥은 그럴 수가 없잖나. 그러니까 고래밥과 왕고래밥은 결은 같지만, 속은 다른 별개의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남편은 왕고래밥도 고래밥인 줄 알았다며 억울해했다.


생각해보니 남편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다. 33살 먹고 왕고래밥 때문에 부부싸움을 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마음을 고쳐먹고 왕고래밥 봉지를 뜯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래밥에서 왕고래밥으로 점프를 했던 날.


도대체 몇 배나 크기를 키운 건지, 왕고래밥은 정말 왕 컸다. 크기가 커져도 부서지는 유약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지, 형태를 알 수 없는 왕고래밥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찝찝함을 담아 왕 불가사리 하나를 건져 입에 넣었다. 입안에는 짭짤함이 서서히 퍼졌다. 크기가 크니 좋은 점도 있었다. 더 빨리, 더 쉽게 과자를 집어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확실히 고래밥과는 다른 느낌이지만, 고래밥은 고래밥이었다.

조용히 왕고래밥을 먹으며 그동안 고래밥만을 고래밥이라고 우겼던, 주장했던, 믿고 싶었던 어리석었던 내가 떠올랐고, 항상 이미 아는 맛에만 익숙해 새로움을 놓치는 본인에 대한 아쉬움으로 이어졌다. 익숙함에 속아 새로움을 놓치고 살았던 순간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해보면, 왕고래밥도 고래밥인가에 대한 물음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왕고래밥 한 봉지를 단숨에 해치운 뒤, 손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양념을 빨아먹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왕고래밥도 고래밥이야".

또 한 번, 단단한 취향의 벽이 허무하게 부서진 날이었다.









<고래밥 맛있게 먹는 방법>
1. 한 번에 입안에 쑤셔놓고 와그작 부셔먹는다.
2. 비닐을 뜯기도 전에 미리 부셔서 마셔먹는다.
3. 고래, 불가사리, 오징어 모양을 관찰하며 천천히 먹는다.
4. 하나씩 입안에 넣어 짠맛을 혓바닥으로 발라먹은 후, 담백해진 과자 맛을 즐긴다.
5. 오렌지주스와 함께 먹으면 더 맛있음.
6. 비오는 날 먹으면 더 맛있음.

*************상품 지원받은 거 절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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