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감! 이 아이디어! 첫 문장! 지금 들어오세요!
지금 구매하셔야만! 단독 조건입니다! 와, 말도 안 돼요. 너무 아깝잖아요. 지금 들어오세요! 목청껏 외치는 쇼호스트분들의 말발에 훌렁 넘어가 팬티 10장을 59,000원에 구매했다. 호호. 어쨌든 팬티를 사려고 했다니까? 아니 정말이라니까? 아무도 묻고 따지지 않았는데 허공에 혼잣말을 되뇌었다. 나는 현명한 소비자다.. 현명한 소비자다 읊조리다가 시끄러운 티브이를 끄고 조용히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안경도 벗고, 핸드폰도 던져놨으니, 이제 잠만 잘 자면 오늘의 할 일은 끝나는데.. 근데... 그런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갑자기 2주 전, 엄마가 내게 복숭아를 던지며 했던 그 말이 생각나고, 2년 전에나 다녀온 발리 여행에서의 에피소드가 떠올라 킥킥 대더니, 곧 졸업을 앞둔 남동생에게 졸업 선물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로 괴로워하던 그때, 좋아요 100개는 따놓은 당상인 글의 소재가 줄줄줄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이거는 이렇게 쓰면 되겠군. 제목은 '발리에서 생긴 일'로 하고, 대화체로 쭉쭉 쓰면서 몰입감을 높이다가 마지막에는 여운을 퐁~던지면서 끝내면, 됐다. 됐어! 이제 글을 써볼까? 핸드폰이 어디 있더라.. 손을 뻗고 핸드폰을 찾으려는데 어.. 어.. 핸드폰이 왜 안 짚히냐. 아 거 참............ 참한 얼굴로 잠에 들은 나는 다음날 10시가 되어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순풍산부인과를 보다가 책을 보고, 인스타그램을 하다가 문득 든 생각! 아, 나 어제 글 쓰려고 했지? 허겁지겁 브런치 창을 열고 새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제목은 발리에서 생긴 일, 그리고 내가 어떻게... 쓰려고 했더라.. 어.. 어.. 첫 문장을 그렇게 시작하려고 했는데..? 놀랍게도 나의 뇌는 24시간도 안 된 생각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키보드위에서 이리저리 방황했다. 썼다 지우고, 썼다가 또 지우고, 쓸수록 사라지는 문장들을 바라보며 허탈함에 티브이를 켰다.
수많은 채널 속에서 오늘도 그곳에 손이 멈췄다. 홈쇼핑 채널이었다. 오늘은 앉기만 해도 시원하고, 편안한 방석을 팔고 있었는데 쇼호스트가 방석 아래에 날계란을 깔고 앉아도 방석이 어찌나 튼튼한 내구성을 가졌는지 날계란이 깨지지 않았다. 마술쇼를 보듯 홈쇼핑을 보고 있는데, 몰입을 방해하는 까랑까랑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분, 일명 집중력 방석, 스카이 방석, 로스쿨 방석이라고 불리는 이 방석! 오직 이 방송에서만 이 가격, 이 구성 모두 드리겠습니다."
쳇. 뻔한 플로우였다. 홈쇼핑 채널이 100곳이라면 100곳 모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맨날 하는 소리. 이 가격, 이 구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단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라면 그냥 듣고 넘겼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용광로가 지펴지더니 고요한 적막 속에 띵! 하는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맞아. 맞아. 이 가격, 이 구성은 지금 뿐이겠지. 이 시간은 지금뿐이니까.
팬티 10장은 주말을 끼고 3일 만에 왔다. 회색, 흰색, 형광핑크색, 파란색 등등 휘황찬란한 색깔의 빤스를 옮겨 모아 세탁기에 던졌다. 빨랫감 위에 올려진 10장의 팬티들을 보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아주 잘 샀어. 그때 안 샀으면 이 가격에 절대 못 사지. 호호"
오늘 밤이 기다려진다. 형광색 팬티를 입을 게 기대되는 게 아니라, 유독 침대 위에서 뿅 하고 떠오르는 아이디어와 글감들 말이다. 오늘은 어제와 같은 짓은 하지 말아야지. 참신한 아이디어가 파파박 떠오르면 졸린 눈을 비비고 핸드폰을 찾아, 대충이라도 메모장에 빠르게 옮겨야지!
'이 글감, 이 구성, 이 아이디어, 이 아름다운 첫 문장! 놓치지 마세요. 오늘이 지나가면 내일은 기억날 리가 없습니다. 지금 꼭 써보세요.'
오직 이 방송에서만 이 가격에 이 구성에 모신다는 홈쇼핑을 보듯, 오직 이 시간에만 생각나고 사라져 버릴 글감과 아이디어를 놓치지 말 것. 홈쇼핑 보듯 글을 쓸 것. 그것이 내가 수십개의 글감을 잃고, 홈쇼핑에서 단돈 59,000원에 팬티 10장을 사고 얻은 결론이다.
오늘의 명언: 지붕은 햇빛이 밝을 때 수리해야 합니다.
(존 케네디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