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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을전하는남자 Oct 02. 2024

라포레하라주쿠, 하라주쿠의 스타일은 오직 여기서

지하철 역을 나와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달콤한 빵냄새가 코를 가득 채운다. 달콤한 빵 냄새를 따라가 보니 도넛 가게가 나타났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혹시? 아임도너츠인가? 맞았다. 현재 도쿄에서 가장 트렌디한 도넛 브랜드 중 하나인 아임 도넛 하라주쿠였다. 사람들과 줄을 서서 도넛을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본다.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스타일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맞다, 이곳은 도쿄를 대표하는 패션중심지 하라주쿠다.


도넛 한 입 베어 물며 길가를 걸어간다. 유명한 오모테산도의 애플 매장을 지나가면, 눈에 띄게 붐비는 상업시설이 나타난다. 라포레 하라주쿠, 45년간 하라주쿠를 지킨 곳이자, 여전히 하라주쿠의 트렌드를 이끄는 장소다. 하라주쿠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이곳을 대표하는 공간인 라포레 하라주쿠. 올해로 45주년을 맞이한 라포레 하라주쿠는 1978년에 문을 연 이후, 40년 이상 동안 하라주쿠의 거리를 자랑스럽게 빛내왔다. 만일 하라주쿠의 상징을 뽑아본다면 도쿄 어디에서도 누구나 세대를 불문하고 입가에서 나올 공간은 바로 '라포레 하라주쿠'다.

2017년의 대대적인 리모델링 이후, 라포레 하라주쿠 내부와 입점한 상점들은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라포레 하라주쿠는 여전히 하라주쿠의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데도 불구하고 라포레 하라주쿠가 여전히 최신 트렌드를 선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라포레 하라주쿠가 지역문화를 끊임없는 탐구하고 연구하면서, 하라주쿠를 깊이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문화에 발맞춰 하라주쿠와 함께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라포레 하라주쿠는 45년이라는 세월을넘어서도,여전히 하라주쿠의 감각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로 자리하고 있다.


라포레하라주쿠가 생기기 전의 하라주쿠는 어땠을까?

1960년대 하라주쿠는 "맨션 메이커"라고 불리는 작은 공간에서 디자인부터 판매까지를 소수의 스태프로 운영하는 이들의 시대였다. 아라마키 타로의 '마드모아 제르논논', 오카와 히토미의 'MILK', 마츠다 미츠히로의 '니콜', 파이브 폭스의 '콤사 데 모드' 등 소규모 메이커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1970년대 패션계를 선도했다. 지금은 글로벌 패션브랜드로 성장한 꼼데가르숑도 이 시기에는 작은 멘션메이커였다.


1960~70년대 이러한 멘션메이커들은 하라주쿠의 센트럴 아파트에 모여 있었고, 이곳에서 많은 맨션 메이커들이 작은 장소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선보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규모로 성장하기 시작한 멘션메이커들은 '디자이너'와 '개성(Character)'을 중시하는 DC 브랜드로 성장했다. (현재 하라주쿠 센트롤 아파트가 있던 자리에는 도큐 플라자 하라주쿠가 생겼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78년 10월 28일, 모리빌딩은 라포레 하라주쿠를 세상에 탄생시켰다. 신흥 상업지구로 성장하던 롯폰기에서 오피스 중심으로 빌딩을 만들던 모리빌딩이 처음으로 만든 상업빌딩이었다. 초창기의 라포레 하라주쿠는 고급 여성 브랜드를 주로 매장에 입점시켰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했기에, 맞은편의 하라주쿠 센트럴아파트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라포레 하라주쿠는 1980년 경영방침을 전환했다. '밀크', '비기', '콤사데모드', '비바 유', '바투' 등 하라주쿠에서 인기 있는 맨션 메이커를 중심으로 공간을 다시 꾸미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던 하라주쿠의 '맨션 메이커' 중심으로 한 전환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라포레 하라주쿠의 매출도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라포레 하라주쿠에 출점한 하라주쿠의 맨션 메이커들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DC 브랜드라고 불리게 되어, 라포레 하라주쿠는 DC 브랜드의 본거지이자, 유행을 이끄는 곳이 되었다.


1980년대 초, 하라주쿠는 '하라주쿠 텐트 마을'이 문을 열며 다케시타 거리와 함께 젊은이들의 인기를 얻었다. 의류, 액세서리, 상품, 그리고 유명한 크레페 가게까지 모든 게 젊은이들을 위한 것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하라주쿠는 자연스럽게 '젊은이의 거리'로 알려지게 되었고, 라포레 하라주쿠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라포레 하라주쿠는 변함없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 라포레 하라주쿠에는 '슈퍼 러버즈', '베티즈 블루', '히스테릭 글래머'와 같이 절대적인 인기를 자랑한 브랜드들이 존재했다. 동시에 'CUTiE', 'Zipper', 'FRUiTS'와 같은 스트리트 패션 잡지들도 인기였다. 잡지에 등장한 스트리트 스냅사진과 독자 모델의 대부분은 라포레 하라주쿠 앞에서의 섭외될 정도였다. 그만큼 라포레 하라주쿠의 인기는 대단했다.

1990년대에 라포레 하라주쿠는 고등학생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 라포레 하라주쿠는 '그랑바자르'라는 대규모 세일 행사를 했는데, 이 기간에 고등학생들이 학교를 빼먹고 라포레하라주쿠로 몰리는 일이 빈번했다. 이 때문에 라포레 하라주쿠는 '교육에 좋지 않은 빌딩'이라는 비난이 아닌 비난을 받았다. 라포레 하라주쿠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랑바자르'의 오픈시간을 아침 6시로 정하기도 했다. 고등학생들이 라포레에 들린 후에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말이다. 당연히 아침 6시부터 라포레하라주쿠는 수많은 사람들로 대성황이었다.


모리빌딩이 하라주쿠를 택한 이유.


모리빌딩이 라포레 하라주쿠를 만든 이유는 하라주쿠에서 새로운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모리빌딩은 그 당시 센트럴 아파트에서 멘션메이커와 젊은이들이 모이고, 피테칸트롭스같은 클럽에서 춤추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문화가 싹트기 시작하는 걸 발견했다. 그들은 하라주쿠에서 젊은이들의 문화가 싹트기 시작해 꽃 피울 것이라 생각했다. 모리빌딩은 '변화는 계속한다'라는 관점을 가지고 라포레하라주쿠를 바라보았고, 이런 방향에 근거한 모리빌딩은 라포레하라주쿠룰 지은 후에도, 젊고 재능 있는 브랜드를 최대한 지원했다. 어떤 것이든지 장기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모리빌딩에게는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당시 모리빌딩의 대표였던 모리 마모루가 하라주쿠에 살고 있었다. 그는 눈으로 하라주쿠의 성장을 매일매일 보았다.

모리빌딩이 45년간 라포레 하라주쿠 시대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모리빌딩이 라포레 하라주쿠를 하나의 '상자 정원'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라포레하라주쿠를 하나의 '상자'로 생각했으며, 상자 속 정원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생각했다. '상자는 항상 같아도, 각각의 시대에 여러 사람이 모여 거기서 놀고 있다'라고 생각했다. 즉, 라포레 하라주쿠 자체를  '언제나 변해야 하는 공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모리빌딩은 언제나 그 상자 안에서는 시대정신에 맞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0년대 작은 멘션메이커들이 1980년데에  DC브랜드로 이어지는 시기에도, 모리는 그 변화에 맞는 매력적인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늘 이렇게 생각했다. '라포레하라주쿠라는 건물은 모리의 것이다. 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하라주쿠는 모리도 그 누구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모리빌딩은 라포레하라주쿠를 명확하게 나누려고 하지 않았다. 남성복이나 여성복 같은 분류가 아닌, 문화와 브랜드들이 혼재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다. '불완전한 재미, 브랜드 간 충돌'이 라포레 하라주쿠 안에서 문화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독특한 경험을 제안하리라고 기대했다. 모리빌딩 라포레 하라주쿠 안에서 다양한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충돌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문화의 씨앗이 소중히 자라고 발전할 것이라 믿었다.


마음을 끌어들이는 라포레의 광고들.

라포레 하라주쿠는 초기부터 창의적인 광고로 유명했으며, 오누키 타쿠야, 노다 아츠시와 같은 수많은 아트 디렉터들이 라포레 하라주쿠의 광고를 맡았다. 지금은 SNS로 인해 광고와 콘텐츠의 경계가 허물어진 시대이지만, 라포레 하라주쿠가 하라주쿠에서 자리 잡아가던 시기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그 시기에는 광고, 특히 광고를 만드는 아트 디렉터의 역량이 브랜드와 상업시설의 이미지를 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초창기의 라포레 하라주쿠는 해외의 유명 아티스트를 통해 광고를 시작했다. 그중에서 최초로 광고를 맡은 사람은 보그, 하퍼스 바자르, 엘르와 같은 유명 패션 잡지에 일러스트를 그린 안토니오 로페즈였다. 로페즈의 팝아트와 초현실적인 비주얼은 라포레 하라주쿠의 초기 이미지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그러나 라포레 하라주쿠는 그의 광고를 고정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 당시의 패션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라포레 하라주쿠는 항상 새로운 광고를 선보이는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라포레 하라주쿠는 이를 위해 10년 동안 다양한 아트 디렉터들과 협업하여 광고를 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려한 광고로 관심을 끌던 라포레 하라주쿠의 광고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 중심에 선 이는 오누키 타쿠야였다. '광고를 거부하는 광고'로 불리는 과격했던 그의 광고 캠페인은 라포레 하라주쿠의 인기를 한층 끌어올렸다. 그 후 14년 동안에 걸쳐 오누키 타쿠야를 비롯하여 노다 나기, 아오키 카츠노리, 나가오카 켄메이까지 수많은 아트 디렉터들이 라포레 하라주쿠의 광고를 다채롭게 선보였다.


라포레 하라주쿠는 여전히 젊은 크리에이터들과 적극적으로 협업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19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라포레하라주쿠는  1982년에 건물 안에 다목적 홀과 라포레 박물관 하라주쿠를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현대 아트와 퍼포먼스를 비롯한 다양한 기획을 선보였으면서, 하라주쿠 문화의 중심지로 주목받았다. 2003년에는 시이나 링고의 데뷔 5주년을 기념한 '림 박람회'를 개최하며 주목을 받았고, 2011년에는 체코의 거장 얀 슈반크마예르의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2008년부터는 파리에서 열리는 '재팬 엑스포'와 같은 일본의 서브컬처 박람회에 참가하여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2019년에는 일본 최고의 아트 디렉터 중 하나로 꼽히는 요시다 유니의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라포레 하라주쿠는 단순히 전시회와 이벤트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광기 마켓'과 'minacute' 등 다양한 크리에이터들과의 협업으로 다양한 공간들도 만들고 있다. 이를 통해 라포레 하라주쿠를 차세대 크리에이터들이 활약할 수 있는 장소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라포레 하라주쿠는 하라주쿠 거리의 사람들과 함께 모이는 새로운 공간을 계속해서 창출해내고 있으며, 하라주쿠는 여전히 도쿄를 대표하는 트렌디한 지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부야에는 파르코가 있었다면? 하라주쿠에는 모리의 라포레 하라주쿠가 있었다.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자’ 차분하면서도 대담한 리뉴얼.


2017년 라포레는 전면적인 리뉴얼을 통해 공간을 새롭게 다듬었다. 리뉴얼목표는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리뉴얼된 라포레 하라주쿠는 각 테넌트공간들을 작게 만들어 작은 숍을 많이 집어넣었다. 특히 2층을 모두 팝업공간으로 만들어 연간 160개의 신예 브랜드가 출점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는 1980년대에 작은 맨션메이커를 발굴했던 라포레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0.5 개념은 사람들이 공간을 보는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였다. 0.5층구조는 사람들이 공간을 이동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최소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 원활하게 층간을 이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게다가 중간 계단은 전시 공간이나 상품 진열장으로 활용되어 사람들이 끊임없이 공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GR8에서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 데 1분도 걸리지 않는 이유도 이 디자인 때문이었다. 또한 0.5층 구조 때문에 라포레 하라주쿠에서는 에스컬레이터가 아주 짧다.


모리빌딩은 1.5층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중간층을 활용해 공간자체를 브랜드 도서관같이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각층별 바닥들로 브랜드들의 성격에 맞도록 색깔과자재를 조절해 브랜드들이 최대한 자신들을 표현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디테일은 라포레 하라주쿠를 하라주쿠의 감각과 정신을 아우르는 독특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로컬을 담은 공간은 경험을 담을 수밖에 없다.

라포레하라주쿠를 만든 모리빌딩은 오랜 시간 동안 하라주쿠문화를 만들었기에 지역문화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하라주쿠에 상업 빌딩을 많이 세우더라도, 하라주쿠의 패션과 문화는 결국 '거리'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라포레 하라주쿠는 "패션 러버스 퍼스트"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라주쿠  전체를 자라 보는 관점으로는 '스트리트 퍼스트'라고 생각한다. 모리빌딩은 집중하는 가치는 상업 시설일 뿐만 아니라 하라주쿠 거리의 문화와 흐름을 지켜가는 것이다. 문화를 가꾸고, 경험을 지속적으로 만들어야 공간과 주변 모두가 살아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라포레하라주쿠만이 아닌, 모리빌딩이 다루는 롯폰기, 아카사카, 아크, 도라노몬, 오모테산도, 아자부다이힐즈에도 모두 적용되는 부분이다.


라포레하라주쿠의 행보는 시부야파르코와 비슷하다. 시부야 파르코도 집중한건 한 가지였다. 시부야에 오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화와 경험을 전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 시부야 파르코도 라포레하라주쿠도 이 같은 방향을 선택했다. 두 곳 모두 끊임없이 사람들과 속도를 같이하면서 시대에 맞는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해 왔다. 코로나 이후, 사람들이 공간에서 새로운 경험을 원하자, 그들은 그에 맞추어 자신들이 만든 공간들도 사람들의 니즈에 맞게 바꾸었다.  이렇게 변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모든 것을 '사람'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는 공간이 아닌,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같은 브랜드이라도 패션시설이 다루는 이야기는 온라인 커머스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브랜드가 정보의 전달 방식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결국, 공간이 경험을 전하기 위해서는 브랜드 그 자체가 미디어로서 작용해야 한다. 동시에 공간을 만드는 주체. 그 역시도 브랜드들이 경험을 만드는 미디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도쿄 브랜드들은 언제나 이것들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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