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의 일본정원에서 발견한 미감은 편집이었다.
교토 견문록에서 적어가는 일본 미감에 대한 글은 조금 글이 깁니다.
가급적 라이킷을 권해드립니다. 또한 사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본 미감은 단아, 간결, 긴장감이지만, 내가 교토에 직접 가서 발견한 일본 미감은 '편집력'이었다. 일본 정원 술에 대한 교과서라고 하는 '사쿠테이키'에서는 정원을 조성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양식의 정원이 있으나 이는 다른 양식을 제외하고 한 가지 양식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하나의 정원에는 연못 모양이나 대지의 조건에 따라 여러 양식을 조합해서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다'이라고 적고 있다.
이처럼 일본 정원은 정원을 만들 때 기존 양식을 편집하는 일이 최선이라고 적는다. 정원은 만드는 시작은 돌을 놓는 일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주춧돌을 놓는다는 말은 '무엇을 짓는다'를 뜻하는데 그 의미와 동일하다. 정원을 만들 때 놓는 돌은 단순한 돌이 아니다. 정원에서 구현할 자연의 첫 삽이자 동시에 취향을 표현하는 첫걸음이다. 그렇기에 일본 정원에서는 돌을 놓는 일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돌에 대해서 사쿠 테이 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돌을 놓을 때 우선 크고 작은 다양한 돌을 정원 부지로 가져와 임시로 땅에 내려놓아라.
세울 돌은 그 ‘머리’를 바로 세우고, 눕힐 돌은 가장 좋은 면을 앞으로 해서 놓아라.
돌의 다양한 특징을 비교하고 정원 전체 계획을 염두에 두면서 돌들을 하나씩 장소로 끌어와라”
뿐만 아니라, 돌을 세울 때의 금기도 존재한다. "원래 서 있던 돌을 눕혀서 사용하거나 누워 있던 돌을 세워서 사용하면 그 돌은 반드시 유령 돌이 되고 저주를 받는다'
정원을 만들 때는 항상 지켜야 할 순서와 금기가 동시에 존재하고 이 둘은 하나의 규칙을 만든다. 단순하게 돌뿐만 아니라 정원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에 이 같은 규칙을 적용한다. 일본인은 '매뉴얼'을 중시한다고 하는데, 이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이미 그들에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사진에 보이는 정원은 과연 지구 상에 존재하는 자연일까? 결코 아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원은 자연스럽기보다는 ‘편집’된 자연이다. 이러한 지침을 통해 만들어진 일본 정원은 떨어진 자연 속 각 요소들을 연결하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에 가까운 자연을 '구현'한다.
반면에 기요미즈데라(청수사) 같은 경우 인위적으로 자연을 조성한 형태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요미즈데라 자체가 히에이 산 자락에 위치하며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은 산 중턱의 자연과 교토다.(물론 기요미즈데라에도 일본 정원은 있기는 하다.) 만약 누군가 교토에 간다면 나는 가쓰라 리큐와 기요미즈데라를 같은 날에 간 후에 료안지, 텐류지, 긴카쿠지 등을 가기를 권한다. 자연 그 자체와 '편집'된 자연을 같은 날 보면 일본 미감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원의 유형은 크게 3가지다. 이케이즈미 , 가레산스이, 노지다.
이케이즈미는 자연 산수 경치를 묘사하여 만들거나 앉아서 바라보는 관상 정원,
정원 속을 걸으며 감상하는 회유식 정원, 큰 연못을 배를 타고 감상하는 정원등을 칭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가쓰라리큐, 남선사 천수암이 있다. 가레산스이는 물을 이용하지 않고 돌, 모래, 초목으로 바다를 형상화한 정원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료안지가 있다.
노지는 다실 앞에 붙어 있는 정원이다. 다실에 사람을 초대할 때 쓰이는 통로로서 잡념을 버리고 다도로 인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노지 안에는 손을 깨끗이 씻는 츠크바이, 걷기 위한 징검다리, 불을 밝히는 석등이 설치되어 있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유형은 세 가지 양식이 모두 존재하는 정원도 있고, 부분적으로 섞은 곳도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정원 모두 자연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온다는 점은 동일하다.
일본 정원에서는 자연을 그 자체로 느끼는 게 아니다. 자신의 취향이 담긴 자연을 연출하고 그것이 아름다움이라고 믿는 행위에 가깝다. 그렇기에 일본 정원 속에서 주체는 인간이며 객체는 자연이다. 자연은 존재하지만 이 세상이 존재할만한 이상향이자, 취향에 의해 편집된 자연이다.
일본 정원은 자연을 축소하면서도 자연 속 에센셜을 가져오는데 목적을 둔다. 그렇게 가져온 자연을 즐긴다. 그래서 일본 정원은 한국정원과는 많이 다르다. 정원을 만들 때는 정원을 만드는 주변 자연을 고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원을 만들 때는 정원의 주인이 추구하는 취향이 반영하고 그 취향에 따른 여러 정원과 명승 지속 자연을 참고한다. 정원을 만든 주인이 자신이 추구하는 자연을 기획하고 이를 구현한 게 정원이다.
예를 들어 료안지는 가레산스이와 그 옆에는 이상향에 가까운 숲을 만든 다른 정원이 존재한다.
두 정원에서 사람 모두 자리에 앉아서 자연을 관찰하면서 그 속에서 자연을 즐길 수 있다.
텐류지는 조금 다르다. 텐류지는 정원 그 자체로 바닷가를 묘사한다.
가쓰라 리큐 역시도 마찬가지다. 회유식정 원인 가쓰라 리큐는 일본 정원이 가진 편집력이 돋보이는 곳이다. 각 계절마다 즐길 수 있는 다실이 있으며, 정원은 바다와 호수 그 자체를 묘사했다. 반면에 은각사의 가레산스이는 조약돌을 통해 매우 거친 물결을 묘사했다. 기요미즈테라를 제외하고, 내가 가본 정원들의 형태와 구성은 대체로 비슷했지만 세세한 디테일로 각 정원마다 차이를 두었을 뿐이다.
개인의 취향을 자연에 담는 시도는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다.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익숙하다. 특히 일본 미의식 중심인 교토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 같은 미의식은 당연히 개개인이 가진 취향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태어날 때부터 보고 경험하는 미의식과 미감이 '취향과 편집을 강조하는 정원'이기 때문이다.
일본 미감에서 정원은 '하나의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자연환경이 다시 만들어지는 자연공원도 식물원도 하니다. 오히려 자연으로부터 어떤 미적인 에센스를 추출한 예술작품으로 설계한다. 그렇기에 정원을 만드는 과정은 외향적이기보다는 내향적인 작업이다. 그렇다고 자연을 전적으로 복사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정원 자체가 자연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원을 만들 때는 최고 경관만 연구하고 관계없는 것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자연을 접하는 자세에서부터 이미 편집 감각을 연마하는 셈이다.
일본 정원을 만드는 가장 오래된 책인 '사쿠테이키'에서는 자연을 '정원 설계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 지식을 예술 혹은 해석적인 방식으로만 사용하기를 권한다. 또한 사쿠테이키에서는 이를 '후지이'라고 지칭하는데 이 단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설계자의 설계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원 양식도 큰 바다양식, 큰 강 양식, 산계류 양식, 소택지 양식 등 여러 양식도 존재했다.
앞서 말한 대로 사쿠테이키에서는 양식을 섞어서 사용하라고 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정원 설계를 위한 모티브로서 다양한 자연경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원 설계자들은 종종 직접 시골로 답사를 나가며 자연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들은 아라시야마도 가서 식물을 연구하기도 했다.
차경은 먼 곳의 정치를 회화적인 방식으로 정원에 통합하는 기법이다. 차경 정원은 그 어떤 정원보다도 자연을 그대로 축소하고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노지를 제외하고 이케이즈미와 가레산스이는 차경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교토는 대체적으로 평지이며 분지다. 교토 가와라마치, 아라시야마, 히가시야마 같은 지역에서 조금만 고개를 들어서 멀리 있는 히에이산이 보인다.
내가 묵었던 밀레니얼스 교토 호스텔에서도 히에이산과 교토 동쪽 전경이 어느 정도 보일 정도였다. 기요미즈테라에서는 교토의 끝이 보일 정도다. 또한 료안지, 건인사, 남선사, 은각사, 청수사에서 주변을 바라보면 현대식 건물이 풍경을 가리고 있어도 주변 자연경관이 잘 보인다. 만약 현대식 건물이 없는 교토를 상상하며 걸어보면 어느 곳에 있어도 교토 경관이 잘 보이리라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토에는 조그마하게 조성한 정원이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미 뛰어난 자연, 시원한 가모 강이 있음에도 자기 집 혹은 절 안에 축소한 자연을 만든다. 또한 그 자연은 취향에 맞게 조성한 정원이다. 자연을 축소하고 묘사하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교토 내 일본 미감이 얼마나 내향적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는 지난 과거의 미감 일지 모른다. 혹은 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취미라고 치부하며 현대 기획과는 상관없다고 말할 수 도 있다. 그렇지만 과거 교토 사람들은(정확하게는 귀족들이지만) 자연이 가진 내적 균형, 적절함, 건강함을 표현한다고 믿었다.
이것들 정원으로 가져오는 일은 자연에 내재된 균형을 자기에게 가져오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정원 설계와 미감 속에는 자연을 관찰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원을 통해 주변 환경과의 생명력과 자신과 조화시키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 건축과 기획 속에서는 이 같은 미감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사용하고 있다. 의도하기보다는 그들이 항상 본 미감이 무엇인가를 '편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발명하지 않았어도 개량을 잘하는 건 이 같은 미감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인양품의 유명한 유우니 사막 광고는 무인양품이 추구하는 '충분함'을 잘 표현한다. 우유니 소금사막 풍경 그 자체가 무인양품이 추구하는 비움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아무런 문구도 넣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서양의 미니멀리즘은 단순함을 추구하며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사물의 본질만 남긴다. 반면에 일본 미감이 추구하는 '비움'은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의도 찾아서 편집하는 면에 가깝다. 하라 켄야는 다지인을 욕망의 에듀케이션이라고 정의했는데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원은 그가 추구하는 디자인에 가장 부합하는 미감이다.(하라 켄야는 이걸 엠프티니스라고 말한다.)
디자인 회사인 심플리시티의 오가타 신이치로 같은 경우도 정원 속 미감 등을 이솝 매장에 그대로 반영했다. 자연 속에서 발견한 균형과 선들. 자연 속 빛이 만들어내는 그늘 묘사 등 은 키테 및 자신이 운영하는 히가시야마와 야쿠모 사료에 그대로 응용했다. 헤이안과 무로마치 시대 정원을 만드는 일 그 자체가 취향을 구현하는 일이라고 본다면, 현대인들의 정원은 취향이 담은 건축, 광고, 인테리어가 아닐까?
뿐만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기획으로 유명한 츠타야도 책, 브랜드, 잡화 간의 맥락을 통해서 제안을 구현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정원으로 구현하는 일. 수많은 자연풍경들을 편집하면서 자신만의 조화를 찾는 일은 하나의 제안이다. '이러한 자연은 어떠한가요?'와 '몸이 건강한 저녁식사는 어때요?'는 제안이라는 면에서 동일하다. 최근 다이칸야마 츠타야 티 사이트는 음반매장을 애플 매장과 합치고 음악 청음실과 라운지를 만들었다. 동시에 기존 제안방식 및 도서 분류로 많이 바꿨다. 이 같은 빠른 대처가 가능한 이유 중 하나도 '편집'이라는 미감에 익숙하기 때문이다.(이 부분도 조만간 글로 다룰예정이다.)
일본인들에게 정원에서 보는 편집된 자연은 '공간'을 인식하는 기준이다. 내가 가본 정원에서 수많은 일본인은 '나루호도'를 강조했고, 자리에 앉아 정원에 몰입했다. 외지인인 나에게 일본 정원은 타문화 일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뿌리를 찾아가는 일이다. 이는 공간을 꾸미는 일과 디테일에 당연히 영향을 준다. 자신도 모르게 ‘편집된 무엇’을 오감으로 체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일본 정원에 발견한 미감괴 미의식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