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관점으로 바라본 교토 공간(3):게이분샤 이치초지점:
나는 교토 오카자키 츠타야 서점에서
게이분샤 이치초지점까지 걸어갔다. 시간도 애매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는 교토. 딱히 할 게 없었다.
구글 맵스를 보며 게이분샤 이치초지를 향해 무작정 걸어갔다.
교토대에 다다를 무렵 주변은 조용해졌다.
교토대를 지나자 불빛마저 사라지기 시작했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골목길. '이 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문뜩 들 무렵,
이치초지에 도착했다. 지역은 2010년도 상수동과 비슷했다.
120평 남짓한 게이분샤 이치초지 서점에는 서점뿐만 아니라,
대관 갤러리 앙페르, 의식주 서적과 잡화를 판매하는 '생활관',
강의 및 대행사를 하는 공간인 코티지가 있었다.
나의 독서 경험을 감안했을 때,
서점이 사람에게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가치는
‘경험’과 ‘공간’이다.
북카페에서 북을 큐레이션 할 때도
지식, 경험, 공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책들을 우선적으로 배치했다.
도쿄와 교토에서 '제안'을 한다는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을 찾아가 보면서 두 가지 질문을 항상 했다.
첫 번째 질문은 “왜 라이프스타일은 없고 물건만 있는가?”였다.
물건이 라이프스타일의 일부는 맞다.
하지만 라이프스타일이 곧 물건은 아니다.
라이프스타일은 말 그대로 살면서 필요한 모든 것인데 말이다.
두 번째 질문은 “(큐레이션을 통해 좋은 물건을 모아놓은)
편집 매장을 방문해도 왜 물건과 책들은 너무 많고
소비를 위한 대안밖에 되지 않을까?”였다.
아무리 제안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제안'이라는 이름으로
변한 새로운 '소비'만 있었다. 물론 소비가 나쁜 건 아니다.
그렇지만 마치 '제안'이라는 말로
우롱하는 듯한 제안도 없지 않아 있었다
.
상품과 책을 맥락으로 연결해 제안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종류가 많았다. 제안이라고 해도
여전히 소비자는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몇몇 가게들은 정말로 제안을 하기도 했다.
비록 내가 구매할 수 있는 상품들은 일부였지만,
'저런 식으로 구성하면 좋겠다.'라고
소비의 연장선이 아닌, 무언가 내가 배워가는 가게들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의 '서점' 혹은
'라이프스타일 가게'들의 정체성을
가게로 보이는 ‘미디어’로 정의했다.
지면 혹은 화면이 아닌 실제 공간을 활용하는 미디어로서 말이다.
만지거나 느끼는 오감을 활용하는 미디어 말이다.
그냥 상점이라면 손님이 오래 둘러보고 나가면 끝이다.
하지만 '미디어'로서의 상점은 손님이
공간을 보는 행동 자체가 의미 있는 경험이다.
내가 지금까지 가본 가게 중
라이프스타일 관점이 분명한 가게들은 언제나
그 자체만으로 무엇인가 '배우는' 경험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서점들은 결코 '서점'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북카페를 하면서도 이런 경험을 많이 했다.
브런치 타임이 끝나고 하교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모자 혹은 모녀가
가게에 들러 책과 코코아를 마시며 같이 동화책을 본다.
몇몇 젊은 대학생들은 매거진 B가 모두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게에 오기도 했다.
츠타야와 게이분샤 이치초지점.두 곳 모두‘미디어’를 지향한다.
서점이 미디어를 지향한다? 어떻게 보면 조금은 낯선 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서점은 원래부터 미디어였다.
미디어는 정보를 퍼트리는 매체다.
명사로서 미디어의 정의는
'어떤 작용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늘 당신이 카톡을 통해 누군가에게
어떤 정보 혹은 이야기를 보냈다면
당신 또한 미디어였다고 할 수 있다.
츠타야 서점이 '제안'으로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지식 유통'이 아닌 '~하는 삶'이라는 사람들이
원하는 욕망을 친절하게 안내했기 때문이다.
욕망이라고 하면 우리는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욕망이란 자신이 무언가 하고자 강한 의지다.
서점이 제안의 중심이자, 책이 그 중심이 되는 이유도
그 안에 인간이 꿈꾸는 다양한
욕망을 돕는 지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간이 가장 손쉽게
편집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가 바로 '지식'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기저에는 '정보를 누가 손에 쥐고 있는가'가 핵심이다.
동시에 정보를 누가 어떻게 퍼뜨리는가도 중요하다.
종교개혁 이전 가톨릭 사제들만 보던 성경은 인쇄술을 통해
일반인들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혁명이 다른 무엇보다 '파급력'이 있었던 건
95개 조 반박문이 아니라 '성경'을
번역해 사림들에게 전했기 때문이다.
당시 가톨릭 사제들만이 보던 성경.
이에 기반한 비롯한 지식도 사제들이 대부분 독점했다.
지식을 독점한다는 건 예부터 터 권력이었다. 알고 싶은 정보.
정보를 언제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은
권력이자, 힘이자, 욕망이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더 세분화되었고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케이분샤 이치초지점은
'서점은 서점으로서의 매력과
상품 구성을 내세워 고객을 끌어보아야 한다'는
서점의 본질에 집중했다.
동시에 앙페르 갤러리에서 기획전을 통해
케이분샤에서 서점과 잡화점의 경계지점을 만들었다.
1995년 만들어진 앙페르 갤러리는 책을 판매하는 서점,
책을 만드는 출판사, 작가 사이의 거리를
보다 줄이기 위해 조성한 공간이다.
앙페르 갤러리는 전시뿐만 아니라,
전시 주제와 연관된 상품을 판매하는
허브 역할을 했다. 앙페르 갤러리를 토대로
케이분샤는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편집 서점'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곳을 통해 서점은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미디어'로서 기틀을 만들고 제안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갤러리'라는 중간지대는 케이분샤가
책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문화를
다루는 '편집 서점'을 지향하면서도
서점 그 자체의 본질을 잊지 않는 방어벽이 되었다.
게이분샤 이치초지점은 츠타야같이
책, 잡화, 잡지 등을 제안을 위한 '재료'로 보지 않는다.
서점을 구성하는 점. 책에 먼저 집중한다.
서점에 먼저 충실하면서도 제안을 한다.
책이 오브제로 변질되는 걸 막고자 노력한다.
책이 가진 본연에 먼저 집중한다.
책을 진열할 때는 문고판과 하드커버를 같이 진열하거나,
아트북과 그림책을 함께 전시해 문자순 인덱스를 피한다.
요리책, 문고판 같은 편의상 분류는 해체하고,
각 코너는 자체적으로 나눈 분류에 따라 진열한다.
책 그 자체가 가진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이곳이 츠타야나
디앤디파트먼트, 시보네, 투데이스 스페셜 같은
제안과 전함이 있는 가게와 다르게
'일반 서점과 차이가 없잖아?'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생활관에서는
주방잡화와 의식주 서적을 같이 판매한다.
책, 잡화, 잡지를 함께 두어 자칫 '산발'되어
이도 저도 되지 않게 하기보다는
확실하게 색깔을 표현한다.
이러한 이유는 책, 음악, 비디오 렌털을 병행한
츠타야와는 다르게
게이분샤 이치초지점은 애초부터
'서점'으로 시작해 영역을
확장해 나갔기 때문이다.
작은 서점이 지향해나갈 방향은
츠타야보다는 게이분샤 이치초지점이 좀 더 구체적이다.
게이분샤 이치초지점은 철저히 공간 중심이다.
서점, 생활관, 앙페르 갤러리, 강의 및 대관 공간인 코티지는
각자마다 색깔이 뚜렷하다. 색이 뚜렷하기에
'서점'이라는 정체성 쉽사리 잃지 않는다.
오히려 '서점'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기에 개성이 더 살아난다.
또한 생활관 외에 앙페르 갤러리와
코티지는 서점과 공간이 떨어져 있다.
공간이 물리적으로 나눠져 있기에
자연스럽게 구분이 되는 셈이다.
구조 자체만 본다면 미술관과 비슷한 구석이 많다.
게이분샤 이치초지점은 '가레산스이'와
숲 정원으로 공간을 나누어 사람들이
취향에 따라 자연을 보게 한 료안지에 가깝다.
반면에 츠타야는 돌길을 따라
각기 다른 자연을 보는 가쓰라 리큐에 가깝다.
츠타야와 다르게 케이분샤는 교토 로컬에
중심을 두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디앤디파트먼트 같은 모습이 좀 더 강하다.
츠타야가 넓은 제안에 초점을 둔다면,
게이분샤는 좀 더 로컬에 맞춘다.
게이분샤 이치초지는 공간과 제안의 기저에 있는
사람과 터전에 집중하며 이를 위해 공간을 나누어 제안한다.
데이터는 간극을 줄이며 될
아이디어를 솎아내는 데 사용할 뿐이다.
제안은 자신들이 어떠한 메시지와
매체를 사용할지 결정하게 만든다.
이에 따른 공간구조는 당연히
공간이 지향하는 방향. 동시에 미디어로서의 방향을 만든다.
게이분샤 이치초지내 공간구조를 보면
공간을 천천히 확장했음을 알 수 있다.
상품진열을 보면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상품진열은 디앤디파 먼트와 비슷한 정도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상품을 잘 파악하게
동선을 만드는 일에 집중한 모양새다.
상품진열에 큰 영향을 주는 조명은
세련되기보다는 아늑하다.
빈지티 샵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곳에서 보는 조명은
교토 어느 곳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아늑함이다.
도쿄와 다르게 교토는 로컬에 집중하는 면이 강하다.
공간들도 언제나 교토 정서에서 시작한다.
도쿄처럼 '메시지'를 지향하지 않는다.
교토에서 기획을 볼 때는 언제나 교토 정서와 문화,
미학적인 부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토 견문록 처음에서 일본 정원을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갤러리에 있는 다양한 공예상품들은
교토가 종이공예를 포함한 다양한
공예로 유명한 도시임을 파악하고 있으면 좋다.
도쿄는 언제나 다양한 취향에 집중하지만,
교토는 그보다는 삶에 집중하는 모양새가 강하다.
자연은 다시 편집해도 자연이다.
일본 정원은 존재하는 자연을 재편집했기에
정원도 자연이라는 테두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일본 정원이 다른 나라 정원과
다른 점은 취향을 자연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같은 석정 정원(가레산스이)이라도
료안지와 은각사는 결코 같지 않다.
정원 안에 묘사한 호수도 마찬가지다.
텐류지, 남선사 천수암, 은각사
모두 작은 호수를 만든 정원이 있지만
그 결은 전혀 다르다. 비록 자연을 편집했다고 하나,
그 안에는 취향이 담겨있다.
자연을 편집하면 그 자연은 자연에서 멈추지만,
지식을 편집해 다른 이에게 제안하면
자신만의 독자적인 '전함'이 된다.
책은 누구에게나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서점,
책을 중심으로 라이프스타일 제안을 한다.
즉, 서점이 미디어를 지향하고
그 지향점을 통해 관점과 욕망을 전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배우. 감정을 편집하는 사람들'에서도 살펴보았던 부분.
배우는 작품 안에 존재하는 사람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
이 세상 존재하는 누군가'를 극에 가져온다.
배우가 작품 속 인물을 설계하는 작업.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관점이 된다.
이에 반해 지식은 철저히 자의식이 들어간다.
이를 편집하면 충분히 남에게 제시할 수 있다.
지식과 사람마다 각기 다른 삶이 만나면 관점이 된다.
책을 읽는 일은 지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살아온 삶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말은 이 때문이다.
브런치,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여러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방향은
'자신만의 관점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 안에 담긴 편집은 철저히 미디어가 된다.
많은 라이프스타일 제안은 취향이라는 이유로,
취향을 제시한다는 이유로 꾸준히 성장해왔다.
아무리 제안이라도 해도, 그 안에 관점이 없다면 '진열'에 불과하다.
돌이켜 생각해보자. 좋아하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는 것.
그러한 분위기 안에 있다는 건 인생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10대 시절 내내 획일적인 교육을 받는다.
성적에 대한 압박 감속에 공부하다가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서야
주변으로부터 '뭘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질문 속도가 너무 늦다.
당장 입시 성적이 중요한데 뭘 하고 싶다니?
20년 가까이 수동적인 교육만 받으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진짜 꿈과 취향을 찾으라고 한다면?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자신에 대해 잘 모르니 자연스럽게 누군가 하는
'제안'이라는 말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 제안에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게 자신의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고른 취향이 자신에게 잘 맞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취향이 자신에게 맞지 않을 경우 취향이라고
생각한 '물건'이나 '어떤 것'들은 아름다운 쓰레기가 된다.
우리가 20년간 받은 교육들. 끊임없이 문제 속 답만 찾는 일.
'왜?'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라는 답만 찾는 삶.
우리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 떠먹여 주는 방식을 원한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야 한다.
문제풀이 문제집을 풀어가듯,
'이렇게 한다면 나를 찾는다'라는 방식에 귀 기울인다.
그건 나를 찾는 게 아니다.
누군가가 제시하는 관점으로 나를 보는 것이지
나를 온전히 나로 정의하는 게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주하는 소비와 취향
그리고 제안들은 유감스럽지만
또 다른 '소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적지 않은 마케팅 사이트에서 '취향'을 말하고
그에 기반한 공간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가보면 일부다. 오히려 자신들이
추구하는 제안을 사람들에게 더 쉽게 전하려는 의지가 더 강하다.
아무리 츠타야를 비롯한 수많은 좋은 제안들을 본다고 할지라도
'관점' 그 자체. 스스로 어떠한 '취향'에
대해 메시지를 던질 수 없다면,
그것은 제안이 아닌 '배치'로 항상 끝난다.
그래서 제안이 어렵다.
마쓰다 무네아키도 기획을 하기 전에
'나는 언제나 그 지역 사람들, 고객처럼 되어
그들 입장에서 먼저 생각한다'는 말은
'제안'이 배치가 되는 걸 피하기 위함이다.
츠타야에 가도 이런 게 분명하다.
물론 츠타야에도 억지스러운 배치가 많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게이분샤 이치 초지점을 보자.
이곳이나 츠타야나 아크 앤 북, 스틸 북스, 아모레 성수 같은 곳도
사실 별반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이곳 역시 이 지역에 머무는 사람,
터전을 기반으로 한다.
책은 제안의 시작점뿐이다.
라이프스타일 제안의 끝은 미디어다.
미디어. 어떻게 관점을 전할지에 대한 고민.
이를 위한 접근은 결국 자신이 어떤 내용을
고르고 묶고 엮어 낼지 정하게 한다.
그렇게 묶은 정보는 다시 '편집디자인'으로
재차 정보를 솎아내고 배치한다.
그다음 매체에 맞게 정보를 다시 재분류한다.
매체에 맞게 자신의 관점을 미디어로서 다듬는 거다.
콘셉트 있는 공간들이 콘셉트를 찾다 보면 콘셉트만 있고,
어느 순간 그 자체에 갇히는 이유는 콘셉트를
미디어로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콘셉트만으로도 먹혔다.
브랜드 가치라는 단어도 먹혔으나,
이제 개개인이 정보들을 쉽게 다 찾아내는 시대다.
이보다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게 더 유용하다.
지금은 오히려 솔직한 게 브랜드 가치가 되기 쉽다.
어떻게 사람들에게 스며들지가 중요하다.
하나의 밀알이 떨어지면 그 밀알들을 통해
새로운 흐름이 조금씩 생겨난다.
우리는 지금 그걸 조금씩 서울에서도 보고 있다.
우리는 항상 좋은 제안에 대한 케이스를 찾고 분석한다.
분석과 참고도 무엇보다 자신의
내력을 탄탄하게 다지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누군가를 무조건 카피하던 시절은 저물었다.
카피캣만 하다 보면 관점이 사라진다.
카피캣으로 시작해도 관점을 넣기 시작하면
카피캣에서 오리지널로 변한다.
츠타야나 게이분샤 같은 곳이 항상 정답은 아니다.
도쿄와 교토는 우리보다 경험이 좀 더 빠를 뿐이다.
우리가 츠타야가 케이분샤 이치초지점에
봐야 할 건 '제안을 구축하는 방향성'이지 똑같이 만드는 게 아니다.
내가 이렇게 외부 것을 분석하고 글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 시간을 줄이기 위함이다. 하지만 관점은 당신이 찾아야 한다.
가설을 찾고 실험하고 자신만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계속 실험해야 한다.
그 과정을 겪다 보면 제안하는 관점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우린 종종 정답만을 찾는다.
하지만 취향은 정답도 방향도 없다.
오히려 '기다림' 자체가 답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취향이라는 밀알들이
하나씩 흐름을 만들기 시작하는 시기다.
그 흐름이 커지면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탄탄한 내력을 성장시킬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