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며] 자신이 무엇인지 매순간 물어야한다.
이 브런치 북 첫 글에서도 적었지만 제가 교토에 간 이유는 일본 미학이 일본 편집과 기획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찾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일본 기획을 보다 더 세밀하게 보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죠. 제 스스로 도쿄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항상 무엇인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으니까요. 어쩌면 도쿄가 아닌 교토로 향하는 건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교토는 여전히 일본문화수도이자 일본 미학을 고스란히 품은 도시이니까요.
화려함과 트렌드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도쿄는 단연코 교토를 앞서는 도시가 맞습니다. 하지만 문화와 미학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도쿄는 교토에 비해 속은 텅 비었고 소리만 요란한 도시입니다. 도쿄 기획의 기저는 언제나 교코라는 뿌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교토의 많은 상점과 음식점에서 노렌을 문 앞에 걸어놓습니다. 하지만 도쿄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노렌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도쿄에서는 노렌 문양을 브랜드 로고같이 사용하고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바꿉니다.
교토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도쿄에 도착한 후에 가장 먼저 간 장소는 무인양품 긴자점이었습니다. 매장을 잠깐 보았는데 그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한 일본 미학을 매장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은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였습니다.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가 처음은 아니었음에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점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특히 도쿄 미드타운에 입점한 상점들이 노렌을 다양하게 변주하며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교토에 다녀오기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보를 배치하고 설계하는 과정에서 일본 미학이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지를 보았다고 해야 할까요? 단순히 겉에서만 보이는 디테일이 아닌, 그 기저에 담긴 디테일과 미학들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처음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에 왔을 때 ‘로고’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던 많은 디자인들. 이 디자인들이 노렌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죠. 제 무지함에 많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쿄 내 공원들은 교토보다는 서양과 일본식을 결합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히비야 공원이죠. 더불어 교토가 가진 일본 문화가 여전히 도쿄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죠.(참고로 지금 히비야 지역은 간척지입니다.)
잠시 도쿄가 에도이던 시절로 돌아가 봅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제 막 만든 도시였던 에도. 에도는 서서히 성장하고 있었지만 문화는 조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에도인들은 오사카와 교토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지방에서 만든 물건을 ‘쿠다리 모노下りもの’라 하며 귀한 물건으로 여겼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문화격차를 알고 있었죠. '맛의 달인'에서 간사이 지방 사람들이 간동 사람들을 무시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일본 미식의 기틀을 놓은 기 오지 료산진도 자신의 에세이집에서 도쿄 음식문화를 적을 때도 이 같은 시각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에도는 메이지유신 이후 도쿄로, 그리고 다시 메트로폴리탄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방향으로 교토는 도쿄에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제 관점에서 도쿄가 추구하는 방향과 교토가 나아가는 방향의 중간지대가 긴자입니다. 긴자는 여전히 글로벌 문화와 일분 문화를 동시에 전개하고자 하니까요. 같은 쌀을 다루는 가게라도 아 코메야는 트렌디하지만, 교토에서 본점을 둔 하치다이에기에는 트렌디함과 문화적 깊이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아코메야를 운영하는 사자비 리그는 아 코메야, 에스티네이션, 애프터 눈 티를 비롯한 자체 브랜드와 캠퍼, 셰이크 쉑 버거, 론 하먼, 캐나다구스, 플라잉 타이거 코펜하겐 비롯한 해외 브랜드도 운영합니다. 트렌드를 다루는 기업이기 때문에 라이프스타일 제안에 특화된 기업이죠. 하지만 '기품'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반면에 하치 다이 에기에는 쌀을 트렌디하면서도 기품 있게 다룹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여전히 도쿄에 뒤쳐지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한국 브랜드들도 이제 일본만큼 잘합니다. 로우로우같이 더 잘하는 브랜드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정보기술을 기반으로 사회가 보이지 않으면서도 급변하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비교대상을 일본으로만 한정일은 오히려 시대착오적입니다. 이제는 그냥 모든 곳에서 배워야 하죠. 이전만 해도 도쿄에 가면 배울게 참 많았지만 한국이 무섭게 따라잡고 있습니다. 오히려 라인 망가, 픽코마 같은 만화 플랫폼은 한국이 일본에게 시대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을 알려주고 있죠.
어떻게 보면 이제 도쿄와 교토가 서울보다 경쟁력이 있다고 하는 건 그저 '경험'뿐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서울이 도교 코보다 더욱 개성이 강합니다. 저는 오히려 서울이 도시 브랜드로 더욱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쿄 기획을 보다 세밀하게 보기 위해 교토에 반드시 갈 필요가 있을까? 저는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교토에 가면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할 겁니다. 제 이 글을 쓴 이유는 누군가 저와 같은 고민을 한다면, 제 글이 그 고민에 대한 한 가지 의견이 되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일본 정원에서 제 나름대로 발견한 일본 미학이 어떤 식으로 일본 편집과 기획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제 글이 앞으로 일본 기획이나 디자인을 보실 분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제가 교토에 간 이유는 일단 제 호기심이 90 프로였습니다. 제 호기심이 시작이기에 제 색깔이 무척이나 강합니다. )
제가 교토의 모든 정원에 가본건 아닙니다. 금각사, 니조 성, 대각사, 헤이안 신궁, 슈가쿠 인 리큐. 교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히에이산과 비와호에도 가보지 못했으니까요. 또한 교토에서 정원 한 곳당 2시간씩 시간을 할애했지만 문을 닫는 시간이 오후 5시다 보니 많이 가봐야 하루 3곳이 전부였습니다. 대각사 같은 경우는 정원으로 정말 유명한 곳인데 5시 10분경에 도착했고 문을 닫아 발길을 돌려야 하기도 했습니다. 대각사는 아라시야마에서도 안쪽으로 더 들어가거든요.
도쿄, 교토, 서울에 상관없이, 우리가 항상 놓치지 말아 할 사실을 전한 곳은 산토리 야마자키 증류소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일본 기획이 훌륭하다고 하죠. 하지만 제가 교토. 특히 일본 정원에서 본 일본 미학은 겉은 화려하지만 요란했고 속은 비어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비어있는 걸 무언가로 채우려는 강박이 유독 심했죠. 흥미롭게도 그 강박은 일본만의 특색 있는 편집력으로 이어졌습니다. 모두 동의하지 않겠지만 대표적인 곳이 바로 무인양품이죠.
하지만 산토리 야마자키 증류소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그저 '위스키'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위스키가 아닌, 일본인에게 어울리는 위스키. 이러한 위스키 제작을 허락하는 자연에 집중합니다. 그렇기에 야마자키 증류소에서는 편집된 자연이란 게 없습니다. 오히려 제대로 위스키를 만들 수 있는 자연에 감사하며 이를 허락한 야마자키 지역과 하나가 되려고 하죠.
야마자키 증류소에는 오히려 '당신은 무엇에 집중하나요? 우리는 위스키에만 집중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느낄 수 있었죠. 야마자키 증류소는 화려함도, 요란함도 없었습니다. 그보다 속은 묵직하게 꽉 채워져 있었습니다. 비어있는 걸 무언가로 채우려는 강박보다 감사가 넘친 곳이었죠.
저는 적지 않은 이들이 도쿄 기획을 보며 서울을 낮춰보는 경향이 있다고 항상 느껴왔습니다. 적지 않은 책들이 ‘도쿄는 디테일이 충분하고 서울은 아직 이를 못 따라간다.’라고 넌지시 말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죠. 왜 우리가 도쿄 디테일을 꼭 따라가야 할까요? 왜 일본인 기준으로 만든 오모테나시를 우리가 따라가야 할까요? 도쿄를 따라 하면 서울만의 디테일이 나올까요? 이렇게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교토를 보고 도쿄에 도착했을 때 저는 더 이상 도쿄와 서울을 비교하려고 하지 않는 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도쿄는 도쿄일 뿐, 이제 서울은 서울만의 색깔로 가득한 도시로 바뀌고 있습니다. 오히려 온라인을 통해 얻는 간접적인 경험은 오프라인에서 적용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줄이고 있습니다.
교토 견문록을 마치며 제가 묻고 싶은 건 한 가지입니다.'과연 우리는 지금 자신을 화려한 무언가로 채우려고만 하지 않는가? 자신을 수식하는 무언가로 편집하고자 하지만, 정작 겉만 화려하고 요란하지 않은가?' 휘발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나도 모르게 휘발되는 존재를 지향하고 있지 않은가? 에 대한 질문입니다.
카카오 브런치에 연재하는 교토에 대한 글은 이걸로 끝입니다. 다만 ' 브랜드가 표현하는 아름다움’ 쪽으로 넘긴 주제들이 몇 개가 있기에 교토에 대한 몇몇 글은 '브랜드가 표현하는 아름다움' 매거진에서 추가적으로 전할 겁니다. 또한 유튜브에 올릴 영상도 조금 남아있습니다. 아마도 영상 업데이트 소식은 도쿄 견문록에서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글을 마치면서,’ 배우. 감정을 편집하는 사람들’에서 적었듯이 저는 제 글이 추구한 방향. 언제나 ‘장식’처럼 여러분에게 도움만 되고 사라지기를 다시 한번 소망해봅니다. 무엇보다 제 글이 여러분의 편집력을 담금질하는 숫돌 혹은 연적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너무나 많은 정보. 무엇보다 편집력이 재조명되는 시기입니다. 소셜미디어를 포함한 모든 환경. 과도하게 많아진 콘텐츠. 이 안에서 정보를 취합해야 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이유도 있겠죠. 수많은 콘텐츠 큐레이션, 특히 뉴스레터가 주목받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매일 스스로 던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소셜미디어가 가져온 휘발성에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언제나 명쾌하게 답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자신만의 편집력은 '자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될 겁니다.
제 카카오 브런치도 제 스스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저만의 이야기를 적어가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성장해왔습니다. 그 성장은 지금도 진행형이죠. 제가 카오 브런치에 발행하는 글, 매거진, 브런치 북이 ‘조성은’스러운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관점들은 제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어떻게든지 도울 겁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저만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현실에 기반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 글이 일본을 많이 다루다 보니, 많은 이들이 제가 일본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실제로 몇몇 분들은 '일본을 무척이나 좋아하시나 봐요?'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질문에 항상 이렇게 답합니다.
“저는 일본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일본 특유 분위기는 제가 지향하는 정서와 맞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배울 건 배울뿐 그게 전부입니다. 오히려 저는 극일 주의자에 가깝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상당히 놀랍니다. 아마도 제 성향은 김현종 현 청와대 국가안보 2 실장과 방향이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일본 특유의 감성을 좋아한다는 이들도 이해합니다. 일본만이 가진 그 감성. 정말로 매력적입니다. 일본 골목길. 로지 우 라에 담긴 감성은 몽환적이면서도 애틋함이 있습니다. 저는 그걸 야마자키, 우지, 시모키타자와에서 가장 많이 느꼈죠. 많은 이들이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좋아하지만 저는 하루키 소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루키 소설은 대부분 읽어보았습니다. 하루키가 적어가는 소설 정서가 저하고 맞지 않아서 그렇죠. 제가 일본에서 가장 맞지 않아 괴로워하던 정서를 하루키가 무척이나 구체적으로 묘사하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미국만을 좋아하나? 그렇지도 않습니다. 유럽은 솔직히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미술사를 공부하면 오히려 유럽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특히 금융사를 같이 공부하면 더더욱 그렇죠. 제가 지향하는 방향은 특정 국가나 문화를 선호하거나 좋아하기보다는 배울 건 배우고 항상 열려있으려고 노력합니다.
배우. 감정을 편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미디어산업 트렌드가 엄청나게 변했다는 사실에 알면서도 많이 놀랐습니다. 동시에 그 변화가 단순한 '미디어'산업이 아닌 유통, 라이프스타일, 메모리, 시스템 반도체, 인공지능, 5G 등 우리가 흔히 말하는 4차 산업혁명과 모두 연결되어있다는 걸 알았죠.
모든 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시간 속에서 단순히 한 가지만 보고 그걸 적용하는 건 오히려 개방성을 막는 일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무언가 구현하기 위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게 좋겠죠. 자신에게 충실하며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기본기를 탄탄히 해 나가는 게 더더욱 필요할 겁니다. 제가 교토에서 본건 이러한 생각들이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원칙을 세워나갈수록 디테일, 약량, 디자인, 유연함 들은 따라올 겁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하는 일들을 ‘하고 싶은 일을'과 ‘하기 싫어도 참고 묵묵히 하는 일’로 나누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일본에 관한 글을 쓰면서 했던 모든 과정들. 사실은 이 둘 중 하나가 아닌 다른 방식이었다는 점을 '교토'에 대한 글을 적어가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엄청나게 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막상 하고 보니 좋아진 일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이게 제가 일본에 대한 글을 쓰면서 깨달은 겁니다. 땡볕을 맞으며 땀을 줄줄 흘리며 이끼를 관찰하는 저를 보면서 '내가 왜 지금 이걸 하고 있지?'라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녔으니까요. 교토는 이제 끝이지만, 저는 여전히 도쿄와 '배우. 감정을 편집하는 사람들 이슈 2' 그리고 '최적화의 시간' 매거진 자료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도쿄는 아직 자료가 남아 있기에 조금 더 글도 써 나갈 겁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전히 또 다른 무언가를 얻어가겠죠. 그 과정의 종착점에는 무엇이 있을지 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