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적화의 시간' 매거진을 시작하며.
중학교를 다니던 2000년대 초반, 학교에서는 홈페이지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 메모장에 html 코드를 입력해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게시판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를 통해, 홈페이지에 게시판도 설치했다. 집에 돌아오면 수업시간에 만든 홈페이지를 고치고, 친구들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남기면서 놀았다. 어느 순간부터 게시판에서 ‘A는 HNHNHN를 좋아한다’ 혹은 ’SGSGSGSGSGSG’라는 이니셜로 가득한 글들이 게시판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나 그 이니셜이 가리키는 인물이 누구인지 추론했다.
발이 넓은 녀석들은 각 반을 수소문하면서 동일한 이니셜을 가진 여학생을 찾았다. 만일 비슷한 이니셜을 가진 여학생 혹은 남학생을 찾으면, 그 친구가 당사자와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 찾았다. 같은 초등학교 출신이라던가? 통학버스를 같이 탄다던다? 같은 반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등등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유치했다.
하지만 그 당시 이러한 일은 공부보다 더 중요했다. 게시판에 도배된 특정 이니셜을 보고 "걔 맞지?" 하면 "헛소리하지 마시고! "라고 반응하면 아니었다. 하지만 ‘음……’ 이러면 거의 100프로였다. 종종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의 이니셜을 본인이 직접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매우 조악한 홈페이지였지만, 그 공간은 친구들을 연결해주는 ‘끈’이었다. 어떤 경우는 실제로 커플이 되기도 했다. 중3이 끝날 무렵, '버디버디'같은 메신저가 나왔고, 홈페이지는 시들시들해졌다. 아주 작은 인터넷 기술은 러브레터와 비슷했다. 하지만 꼭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홈페이지에서 퍼진 소문들은 다른 반으로 퍼져 전혀 다른 소문이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친구들 간 감정이 깨지고 싸우거나 절교하기도 했다.
20년 전, 내가 경험했던 일들은 이제 카카오톡을 비롯한 단톡 방이 한다. 이미 단톡 방은 좀 구식일지도 모르겠다. 틱톡. 인스타그램 스토리 같은 영상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사람들 반응도 더 빨라졌다. 상대방이 더 빠르게 반응하기를 원한다. 20년 전만 해도 지인들 간 메일을 2,3일 뒤 확인해도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카톡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도 몇 분만 지나도 '왜 메시지를 보지 않냐?'라며 메시지가 온다. 어떤 이들은 인내심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기술발전에 따라 우리가 메시지가 확인하는 '주기'가 줄어들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하이텔과 나우누리, 싸이월드와 블로그.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유튜브와 틱톡에 이르기까지, 기술은 문자에서 영상으로 그 범주가 더 커졌다. 초고속 인터넷을 비롯해 차세대 통신기술은 이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전보에서 5G 스마트폰까지 사용하는 도구는 바뀌었지만 '통신기술' 그 자체가 추구하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는 '연결'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통신기술이 추구했던 더 빠른 '연결'은 부가가치를 만들었다. 게임을 하고 영상을 보는 일은 콘텐츠와 나를 '연결'한다. 메신저는 나와 '타인'을 더 쉽게 연결한다. 이커머스를 사용해 물건을 구입하는 일은 취향과 나를 이어주는 일이다. 기술발전으로 '연결'이 거의 '실시간'에 가까워졌다. 흥미롭게도 누군가와 '연결'되는 시간이 실시간에 가깝게 해결하면 모든 게 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연결' 끝에는 '시간’이 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는 영토를 확장한 후 로마 도로와 정복한 땅을 연결했다. 로마의 힘이 제국 전역에 도달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로마제국에서 길은 식량, 무역, 전쟁, 소식 등 모든 걸 연결하는 핵심이었다. 칭기즈칸이 '동'에서 '서'로 이동할 때 6,7마리 말을 동시에 몰고 다니며, 말이 지칠 때마다 갈아 탄 이유도 '시간' 때문이었다. 산 위에 봉화를 설치한 이유도 빠른 ‘시간’ 안에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역참을 설치해 말을 바꿔 탈 수 있도록 한 이유도 '시간'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인류가 예부터 발전시킨 통신기술은 언제나 ‘시간’에서 시작했다. '시간'에서 시작한 발전은 '연결'로 이어졌다. '시간'을 줄이는 기술은 '걷거나 뛰는' 단순함에서 복잡한 '통신기술'로 발전했지만, 그 목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생긴 파생물들이 우리 삶을 보다 더 윤택하게 만들었다. 걷기에서 엔비디아에서 만든 최첨단 데이터 처리 GPU까지, 역사가 지금까지 거슬러 온 결과에는 언제나 ‘시간’이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생활양식들을 살펴보자. 이제 그 중심은 ‘시간’이다. 과거 통신기술은 '나와 타인 간을 연결하는 시간'을 줄이는 게 중심이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간 연결이 거의 ‘0’에 수렴해지자, 통신기술을 통해 지역과 지역, 국가와 국가 간을 연결하는 일은 점차 비중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통신기술은 타인이 아닌, 개인 그 자체를 향하기 시작했다. 과거 핸드폰 요금은 '통화시간', '메시지수' 중심이지만 요즘 통신요금 기준은 '데이터'다. 통신사는 '데이터' 사용량을 소비자에게 제시하고, 우리는 그 '데이터'를 구매한다. 영화를 보던, 게임을 하던지 개인 몫이다. 통신을 사용하는 기준이 남과의 연결이 아닌, '개인' 그 자체로 변하자,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시간’에 초점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는 인터넷 연결을 모뎀으로 시작했다. 그 이후 나온 ISDN. ADSL, FTTH까지 초고속 인터넷을 고스란히 경험했다. 내가 처음 구매한 삼성 mp3 플레이어는 용량이 64메가였고, 소니의 MD플레이어, 파나소닉의 CD플레이어, 아이팟도 사용했다. 지금은 어떤가? 음악을 스트리밍으로 들을 뿐 아니라, 무선 이어폰으로 듣는다. 음악을 무선으로? 중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그건 생각한 적이 없었다. 무선 기술은 핸드폰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무선 인터넷? 와이파이? 스마트폰? 정말로 SF영화에서 나올만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아이폰은 오랜 시간 축적된 통신기술을 최적화시켰다. 이미 다들 알다시피, 아이폰 이후 나온 스마트폰들은 모든 삶을 바꾸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기술은 우리 삶을 급진적으로 바꾸지 않는다. 우리 삶에 조금씩 스며들며 조금씩 바꾼다. 오히려 지금 시대는 사람들이 기술을 받아들이는 강도. 기술이 일상에서 스며드는 속도가 더 빨라졌을 뿐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기술기업들이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람들이 빠르게 삶 속으로 스며들도록 서비스를 설계하기 때문이다.
오팔 세대가 새로운 큰손이라고 한다. 내 어머니가 딱 오팔 세대다. 내가 어머니께 쿠팡이 쇼핑 어플이라고 알려드리기까지, 어머니는 '쿠팡' 이름만 아셨다. 나는 어머니 스마트폰에 쿠팡을 설치하고 결제카드를 등록한 후 사용법을 알려드렸다. 어머니는 나에게 몇 번 와서 자신이 제대로 결제를 했는지 물어보셨다. 쿠팡이 익숙해지시자, 어머니는 쿠팡으로만 물건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쿠팡 앱에서 순식간에 결제가 끝나는 걸 보고, 어머니는 "요즘 세대들은 이렇게 결제가 되지 않으면 참 불편하다고 느끼겠어?"라고 말하신다. 이제 어머니는 급한 건 마트와 슈퍼, 덜 급한 건 쿠팡으로 주문하신다. 마켓 컬리도 아시지만, 자기 스타일 아니라고 하신다. 하지만 '뭐 나중에 이용해 보지 뭐~'이러신다. 이처럼 기술이 시행착오를 거쳐 사람들 삶에 스며들어 일상이 되는 순간, 기술은 우리 삶을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건 배워야 한다. 더 나아가 과거를 극복하는 방향도 배울 수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기술발전이 우리 삶을 어떤 방식으로 변화시켜왔는지 알 수 있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수많은 닷컴기업들이 무수히 생겼지만, 그중에서도 일부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닷컴기업들은 우리가 지금 누리는 기술 근간과 문화를 만들었다. 그 당시 살아남은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은 이제 전 세계를 라이프스타일 자체를 선도하는 기업들로 성장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내가 중학교 때 이용하던 네이버, 다음, 라이코스, 네티앙중 살아남은 건 네이버와 다음이다. 지금 생겨나는 스타트업들도 전부는 살아남지는 못할 거다. 하지만 닷컴 버블이 담긴 유산들이 오히려 지금 스타트업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영양분이자, 미래에도 존재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살아남은 기업들은 또 다가올 미래에 존재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초석이 된다는 번도 잊어서도 안된다.
동시에 지금 시대 변화가 현재보다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인식. 그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려는 노력을 외면해서도 안된다. 그럴수록 기후변화 같은 현실로부터 탈출할 가능성은 사라진다. 많은 기술을 좋아하는 모험가들이 엘론 머스크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만큼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변화시키는고자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전기차를 이야기 헤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기차 대중화'는 아직 멀었다. 만일 전기차가 대중화되었다고 말하려면, 지금 당장 신호등에 서서 도로를 보았을 때, 그곳에서 보이는 자동차 중 절반 이상은 전기차여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전기차를 찾아보기는 매우 드물다. 테슬라 모델 3가 출시되면서 전기차에 열광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많지 않다. 그러나 1년 전과 비교해보면? 전기차를 받아들이는 인식은 많이 변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전기차, 2차 전지에 대한 기사들은 많지 않았다.
전기차는 오히려 '기술'에 열광하는 이들에게만 한정된 담론인듯했다. 하지만 전기차는 점점 더 필요해질 거야’라는 인식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 그 속도도 점차 빨라지고 있다. 과거에 비교해 기술발전 속도도 빠르다. 배터리 기술도 빠르게 좋아지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전기와 수소차가 주목받으면서, 사람들이 이를 삶 속으로 받아들이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전기차가 더 실질적으로 현실에 스며드는 속도는 더더 빨라질 거다. 오히려 지금 전기차는 어찌 보면 변화할 시대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담은 기술 플랫폼이다.
전기차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모든 요소들. 배터리, 디스플레이, 구동계, 자율주행을 위한 데이터 분석 등은 내연기관차와는 그 결과 질이 다르다.
비트, 멜로디, 선율, 사운드 질은 90년대보다 지금이 더 좋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90년대 음악이 지금 왜 인기가 있을까? 90년대 노래 가사는 지금보다 좀 더 서정적이다 비트는 통통 튀며 밝다. 싹쓸이 노래도 마찬가지다. 음악 자체도 좋지만, 가사가 더 좋다. 솔직하고 꾸밈없다. 화려함보다는 진솔함. 화려한 비주얼과 그에 맞는 음악과 룩이 중심인 요즘 노래들과는 많이 다르다.
노래 가사에서는 감정이 응축되어있기에, 지금 유행하는 90년대 음악은 2020년이 부족한 감정을 채우고 있을지 모른다. 같은 언어라도, 20대와 30대는 각기 다르게 사용하니까.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 음악을 듣다 보면, 특히 2000년대 초반에 해당하는 리샹의 노래만 보아도, 요즘 힙합과 다르다. 그 안에는 '개리와 길' 두 사람의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있다.
노래 안에는 무미건조한 팩트가 나열되는 게 아니다. 노래 가사는 노래 속 인물이 느낀 감정을 표현한 결과물이자 말투다. 자연스럽게 나이 때가 묻어 나온다. 90년대라고 하면 젊은 세대에게는 '아저씨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하고, 형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대가 90년대 음악에 공감하는 이유는 노래 가사 안에 담긴 말투가 진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90년생이 90년대 스타일을 '좋아'하는 일은 '90년대'를 좋아하는 일과 다르다. 좋아한다는 말은 내가 그때그때 느낄 수 있는 감정에 가까우니까. 90년생들은 왜 문서 저장 아이콘이 '플로피 디스켓'인지 모른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90년생들은 90년대를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인터넷을 모뎀으로 시작했으며, 플로피 디스크로 게임을 받아 ms-dos에서 실행했다.(혹시 m.exe를 아시는가?) 반면에, 90년 대생들은 초고속 인터넷부터 경험했다. 이처럼 90년대를 경험하지 못한 문화를 90년대생이 완전히 해석하는 거의 불가능하다.
90년생들이 받아들이는 90년대 문화는 지금 시대 미학으로 해석한 '90년대 문화'라고 보아야 한다. 2020년 관점으로 새롭게 탄생한 90년대 문화는 ‘경험하지 못했음’이 담겨있다. 요즘 유행하는 뉴트로 문화를 살펴보면, 옷과 신발. 그리고 컬러 등은 지금 세대에 맞추어 변했다. 핏도 완전히 같지 않다.
트렌드는 지속시간이 매우 짧다. 그러나 트렌드 그 자체가 지속이 짧다고 그걸 무시해서도 안된다. 한 유행이 오면 그 유행에 인과관계에 맞추어 새로운 유행이 온다. 3개월짜리 유행이 4번 이어지면 1년이 지난다. 우리 삶은 어떤 방향으로 변할까? '개인 취향이 완벽하게 정착된 사회'로 나아갈 거대한 흐름 안에서 트렌드는 지금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큰 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동시에 트렌드는 '지금'을 비추는 돋보기다.
라이프스타일을 지하철 노선이라고 생각한다면? 트렌드는 '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번 역은 뉴트로, 뉴트로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인스타그램입니다. 슈프림, 스투시 콜라보는 나이키로 갈아타시고, 영상으로 보실 분은 유튜브 노선으로 환승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이다. 트렌드가 지나가고, 다시 작은 점이 쌓이다가 또다시 다른 유행으로 인해 큰 점이 생긴다. 오히려 트렌드는 '지금' 사람들이 집중하는 ‘무언가’를 나타내는 지표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트렌드는 그 자체도 보면서도, 동시에 '역사 흐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은 언제나 ‘최적화하는 시간’에 집중해 왔으며 기술은 '최적화'에 집중했다. 이 최적화는 ‘시간’에서 시작한다. 파발로 전해진 소식은 이제 140자 트윗 한방이면 끝이다.(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보시라.) 학자들이 하던 분석들 엔비디아가 많든 칩으로 구성한 슈퍼 컴퓨터와 그 안에 탑재된 인공지능이 한다. 분석 속도는 매일매일 더 빨라지고 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분석에도 빠르게 대처를 할 수 있던 방법 중 하나도 인공지능이었다. 물류도 마찬가지다. 짐을 싣고 걷어 다니던 사람들은 자동차, 배, 비행기를 만들었다. 이제 운전마저도 사람이 아닌 기계에 전부 맡기려고 한다.
특정한 무엇인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현상을 규정짓는 주요 특징과 성질만 남겨두어야 한다. 다른 사소한 모든 부분을 모두 제거하고, 최대한 간단하게 만들면 그 현상을 이해하기 쉬워진다. 만약 드라마를 규명하고 싶다면? 드라마가 언제 제작되었는가?, 아리 카메라인가 레드 카메라인가? 주연 배우는 누구인가?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부가적인 요소는 모두 제거하고 인과 법칙에 필요한 특징과 성질만 남긴다.
이렇게 단순화시킨 특질만 가지고 역사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 단순화한 특질을 비교한다. 동시에 그 단순화한 특질을 현재에 적용한다. 상황을 단순화해 이를 가지고 접근할수록 훨씬 쉽게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만일 다른 현상에 대해서 더욱더 많이 알고자 한다면? 더욱 복잡한 현상을 이해하고 싶다면? 단순화한 특질을 먼저 찾아야 한다. 하지만 최대한 단순화한 접근은 그 접근 대상보다 더 복잡해지면 접근하려는 대상과 마찬가지로 복잡해진다.
하나와 연결된 다른 연결점을 찾다 보면 무수하게 복잡해진다. 그만큼 상세한 자료들을 분석하고 복합하게 연결해야 한다. 분석하고 복잡하게 연결할수록 특질에 대한 이해는 더 힘들어진다. 오로지 만든 이만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말이다. 그렇게 하면 현상을 규정하는 요소까지도 일부 제거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분석틀은 의미를 잃게 된다.
단순화한 기저를 가지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단일하게 적용하는 기저를 찾을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동시에 단순해진 특질만으로는, 자료들이 한정되기 때문에 그만큼 이를 현재에 적용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기저를 찾고, 그 기저가 지금 시대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가설을 검증하고 테스트하는 일은 적용 지점들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최적화'는 그 지점을 찾아내어 그 점을 선으로, 다시 면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최적화'는 우리가 지금 겪고 마주하는 생활양식. 과거와 변화가 없지만. 외면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보다 근본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