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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을전하는남자 Oct 25. 2020

창경궁은 포근하다.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법궁은 경복궁, 보조 궁궐은 창덕궁을 사용하는 양궐 체재였다.(조선 전기는 경복궁+창덕궁, 후기는 창덕궁+경희궁, 흥선대원군 이후 경복궁+창덕궁).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하기를 더 좋아했다. 법궁이기에 다소 딱딱함보다는 자연 흐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창덕궁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https://youtu.be/JLcQmoNtOYE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세 곳 중 자연과 가장 넉넉한 거리를 가진 곳은 단연코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포근하다. 창경궁이 품은 ‘포근함’은 계절마다 다르며 계절에 맞는 다양한 포근함으로 사람들을 반긴다. 홍화문을 지나 옥천교 오른쪽으로 가면 나오는 춘당지는 원래 창덕궁 후원이었다. 춘당대는 후원 쪽이지만, 춘당지는 창경궁 영역이다. 원래 두 곳은 하나였기에 춘당지의 정서는 창덕궁 후원과 이어진다. 기와 벽으로 경계가 나눠졌지만 나무 때문에 기와 벽은 매우 희미하게 보인다. 춘당지에서 풍기대로 올라가는 길목을 따라 가면 창덕궁 후원으로 갈 수 있는 함양 문이 나오는데, 함양문 옆은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창덕궁 후원과 공간을 공유했었기에, 공간감과 정서 모두 후원과 동일하다.

창경궁은 전각이 많지 않아 아담하다. 공간구조와 배치도 경복궁처럼 평지에 일직선으로 구획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창덕궁처럼 높고 낮은 치세를 거스르지 않고, 언덕과 평지 흐름을 따라가며 필요한 전각을 지었다. 다른 궁궐과 다르게 자유로운 분위기가 강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명정전과 문정전으로 이어지는 길목 간 처마는 직선을 차곡차곡 쌓아 유려한 곡선을 만든다.

자연에 흠뻑 스며드는 공간인 창덕궁 후원. 인간의 죽음과 자연의 경계 속에 자리한 종묘. 두 공간이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 잡은 공간이 창경궁이다. 후원과 종묘는 각자 추구하는 공간 정서가 다르며 그 진폭도 크다. 진폭이 큰 정서를 말끔하게 변환시키는 역할을 하는 공간 역시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이러한 위치 때문에 경복궁과 창덕궁이 가지지 못한 정서인 포근함을 가질 수 있었다.

창경궁은 자연흐음을 끊기않기 위해 직선을 작게 쪼개 이를 곡선으로 차곡차곡 연결했다.

자연과 조화를 맞추는 곡선은 창경궁 전체가 가진 고유한 특징이다. 사뿐한 직선들을 차곡차곡 쌓은 지붕과 처마는 모든 조선궁궐이 가진 특징이지만, 창경궁 지붕은 주변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에 유려함이 더 곱게 묻어난다. 통명전, 경춘전, 환경 전주 변에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면 나무와 합을 이루는 유려한 지붕선을 손쉽게 볼 수 있다. 정전인 명정전과 편전인 문정전으로 이어지는 지붕은 주변 나무와 함께 묵직한 선율을 만든다. 여백과 곡선이 강한 나무들과 조화로운 곡선을 이루는 직선은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촉촉한 부드러움이다.

창경궁내 나무들은 건물과 건물 사이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면서 자연 흐름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일상에서 곡선을 보는 일은 많다. 아이폰과 갤럭시에 가장자리도 곡선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궁궐 속에서 곡선을 봐야 할까? 일상에서 바라보는 곡선은 질이 떨어지나 아름답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궁궐 속 곡선은 예부터 선조들이 추구한 아름다움이다. 이를 비교하는 일은 지금 우리가 느끼는 곡선과 차이를 가늠할 수 있도록 돕는다. 수많은 곡선들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역에서 느낀 곡선은 우리가 가장 편하게 느끼는 감정, 감촉을 담고 있으니까.

풍기대에서 함양문으로 가는 길목에서 본 창경궁내. 나무와 건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창경궁이 가진 유려한 곡선. 주변 나무들과 배치로 만든 느긋함이 묻어나는 공간감을 이해하는 일은 궁궐 중에서 선조들이 자연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아는 일이다. 창경궁 안에 광대함은 없다. 경복궁 같은 근엄함도 없다. 하지만 창경궁은 운치가 있고, 그 안에는 포근하면서도 깊숙한 인간과 자연 간 조화가 있다. 우리가 봐야 할 곡선은 선을 넘은 이 정서. 운치와 포근함이다.

창경궁과 창덕궁으로 이어지는 길은 자연흐름을 그대로 살렸다.

원래 창경궁은 창경궁과 함께 동월로 불렸으며, 서쪽으로 창덕궁과 맞닿아있고 남쪽으로는 종묘와 이어져 한 영역을 이루었다. 이러한 탓에 창경궁은 창덕궁과 종묘 이 두 곳의 정서를 모두 느낄 수 있다. 창경궁이 곡선이 강한 이유도 이 두 공간을 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후원의 흐름은 창경궁내 충당지 전체를 관통한다.

창경궁은 광대한 숲으로 이루어진 후원을 공유하기에 창덕궁과 같은 자연의 흐름을 따른다. 그중에서도 창덕궁 후원과 정서가 가장 긴밀히 연결된 지역은 단연코 춘당지다. 창덕궁과 후원과 마찬가지로 창경궁내 각 건물 배치는 자연의 흐름을 고스란히 따른다. 창덕궁과 동일하게 창경궁도 운봉에서 내려온 산자락 흐름을 거의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 규모로는 근정전과 인정전에 비할바는 못하지만, 창경궁의 중심을 잡고 있다,

창경궁 그 자체. 홍화문에서부터 명정문을 지나 정전인 명정전, 편전인 문정전을 제외하고는 건물 배치는 산발적이다. 뭔가 서로 어긋나 있음에도 건물 간 흐름을 이어주는 나무들. 다른 궁궐과 다르게 무엇인가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보는 창경궁은 과거 창경궁의 4분 1 규모라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직 우리는 온전한 창경궁을 본 적이 없다. 종묘와 이어지는 길목. 단풍나무를 비롯한 나무와 식물이 가득한 춘당지와 다르게 이 지역은 종묘처럼 나무가 듬성듬성 떨어져 있다. 종묘와 유사하다. 하지만 조선시대 그려진 동궐도를 보면, 이곳도 예전에는 창경궁 전각(궁궐 건물들)으로 가득하던 곳이다.

종묘와 이어지는 지역은 종묘와 공간 맥락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곳도 과거 창경궁 전각이었다.

서울대병원 암센터 앞 도로에서 창덕궁으로 가는 도로는 일본이 창경궁과 종묘의 맥을 끊어놓기 위해 만든 길이다. 우리는 이 길이 자연스럽다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사실 이 길은 아픔이 가득한 공간이다. 창경궁은 포근하지만, 사실 많은 상처를 감춘 아픔이 서린 공간이다. 우리가 그곳에서 느낀 포근함은 어쩌면 아픔을 이겨낸 인고의 흔적 일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장소가 아니다.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곳도 아니었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이 창경궁이다. 왕실 가족이 점차 늘어나면서 창덕궁내 생활공간이 비좁아졌다. 성종이 즉위한 후, 그는 창덕궁을 대신해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명의 대비들을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만든 별궁이 창경궁의 시작이다.

창경궁은 창덕궁처럼 경복궁을 대신할 이궁 역할도 하지 않았다. 

경복궁, 창덕궁과는 확연히 구성이 다르다는 걸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성종 시절부터 대비와 대왕대비가 주로 왕실 여성이 주로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이곳은 경복궁처럼 장대하지 않았고 창덕궁 같은 공간 짜임새를 갖추지도 않았다. 게다가 창경궁은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다. 경복궁과 창덕궁과 비교할 때, 창경궁의 규모와 배치가 다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창경궁은 궁궐 내전이 가진 긴밀하고 긴장감이 있는 공간 구성이 특징이다. 내비와 후궁 등 여성들의 생활 흔적이 많이 남은 곳이자, 각종 잔치가 벌어지고 춤과 음악이 연주되고 음식이 마련된 중중 문화현장이기도 하다. 지금도 내전 곳곳에 많은 우물이 있어 당시 융성한 생활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세 대비가 승하한 후, 창경궁은 주로 대비 혹은 후궁 등 여성들의 거처가 되었다. 다소 애매한 지위를 가진 창경궁은 조선 후기 대비의 수렴청정 때문에 잠시나마 주목받은 게 전부다. 하지만 창덕궁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창덕궁과 공간을 공유하거나, 창덕궁의 부족한 공간을 대체하기도 했다.

보통 왕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면 ‘통치하고 있음’을 전한다.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은 모두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메시지를 담기 위함이다. 창경궁은 그렇지 않다. 창경궁은 서울 내 다섯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동쪽을 향하고 있다. 이것으로 유추하면 조선의 다섯 궁궐 중 창경궁은 크게 돋보이는 지위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창경궁이 왜 동향인지는 밝혀놓은 기록은 없다. 비록 기록은 없지만 남서 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이기에 이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한 의도라고 짐작할 뿐이다.

창경궁은 애초부터 창덕궁 혹은 경복궁은 정궁의 역할을 한 적이 없다. 그나마 조선 후기 경희궁과 궁궐 역할을 잠시 했으나 고종 때 경복중을 다시 지은 후에 창경궁은 다시 비워지게 되었다. 1909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은 궁궐을 격하시키려는 의도로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이름은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빼곡하던 전각들도 순식간에 철거되었다.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가득하던 곳곳에는 벚꽃나무가 들어섰다. 지금도 창경궁에서 보는 벚꽃은 일제 이후 생겨난 모습이다. 하지만 그 모습도 1984년 복원 작당 시 가득했던 벚꽃나무는 제거되었다.

1984년 서울대공원이 생기고. 창경원에 있던 동물들은 그곳으로 옮겨갔다. 그 이후 창경궁을 다시 옛 모습을 복원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사라졌던 문정전과 명정문 외부 행각도 1984년에 복구되었다. 일제 강점기 세워졌던 박물관과 장서각 건물도 철거되었다. 일제시대 가장 퇴색했던 창경궁은 어느 정도는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창경궁 전성기에 비하면 거의 4분의 1 복구에 그쳤다. 우리가 지금 보는 창경궁은 과거 일부에 불과하다. 또한 창경궁과 이어진 종묘 길도 일제시절 도로도 그 명맥도 끊어졌다. 우리가 보는 문정전 옆 공간은 상당히 훼손된 상태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창경궁이 궁궐 여성이나 잔치를 위해서 있었던 기능을 알기에, 그 공간이 오봉에서 내려오는 자연과 경복궁, 창덕궁, 종묘와 어떤 흐름을 가지는지 먼저 이해해야 한다. 하나의 산에 서로 다른 공간들이 각기 목적과 미감을 뻗어가는지를 먼저 보아야 한다. 만일 공간을 지식으로 해석하면 오직 기능만 볼뿐이다.

문화 속에 깃든 정신은 조급함이 아닌 꾸준한 관찰에서 나온다.

문화 속에 깃든 정신을 알기 위해서는 조급한 마음으로 공간을 보아서는 안된다. 공간에 앉아 관찰하며 공간에 담긴 미감을 통해 의미를 뽑아내야 한다. 사람 마음이 변해야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하고 성장한다. 인간과 자연을 대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안목에 뿌리를 짚어볼 수 있으며, 이는 현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지루할지 몰라도 이 같은 과정을 짚어야 세밀한 변화가 일어난다.

자연이 만든 곡선을 거의 건드리지 않았기에, 창경궁과 창덕궁은 같은 자연 흐름을 공유한다.

나무가 만들어내는 곡선은 어떻게 계절에 따라 변할까? 왜 산을 깍지 않고 산에 계단을 붙여 흐름을 끌어왔을까? 왜 지붕과 나무가 서로 교차하면서 곡선을 만들까? 이러한 풍경들은 오래오래 바라보며 그 속에 담긴 미감을 발견해야 한다. 공간에서 관찰한 세밀한 시각들을 모으면 궁궐 속 안에 담긴 미감이 어느 순간 잔잔하게 내 마음속에서 굽이쳐 흐린다. 이는 책을 읽고 지식에 의지해 나오는 게 아니다. 지식이 머리를 채워도 지식을 넘어선 미감이 먼저 채워져야 비로소 지식을 현실에 맡게 발휘할 수 있다. 우리만의 미학을 가지고 주변을 판단하는 일은 나침반을 만드는 일이다. 만일 공간을 조성하기 전에 주변 환경과 관련한 미감 등에 판단을 하지 않으면 쉽게 방향을 읽는다.

선조들이 지은 공간을 보는 일은 단순하고 순수하게 자신의 유래와 근원을 묻는 일이다. 이를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면, 지금과 가까운 미래 그리고 그 너머를 보는 관점을 만들 수 있다. 한 세계를 만들 때 그 가장 먼저 그 세계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 서양은 집을 짓고 조경을 한다. 집과 조경을 각기 다른 공간으로 본다. 반면에 궁궐에 담긴 다양한 건물 배치는 조경과 공간을 나누지 않는다. 조경도 궁궐 일부다. 이러한 배치만으로 서양과 조선에 살던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매우 다른지를 알 수 있다. 과거 궁전이었던 루브르 박물관도 공간은 선명하게 나눠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공원과 궁전도 철저히 나눠져 있다.

우리 땅에서 발견하는 미학을 마주하는 태도는 지식을 습득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누구처럼 기획을 하는가? 애플같이 디자인을 하는가 보다 더 중요하다. 디자인에는 철학이 담기기에, 철학이 굳건해야 흔들리지 않는다. 디자인은 하나의 미학이 추구하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오늘날에는 정보기술부터 화학, 에너지산업까지 그 생태계 경계가 확장되고 있을 뿐이다.

궁궐 속 디자인은 그 안에 살아가는 이들의 어떤 삶을 디자인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어질지 언제나 상상해야 한다.

건물 안에 담긴 심미성이란 외관의 심미적 조형만 가리키는 게 아니다. 심미성은 건물 안에 머무는 사람들 행동까지 모두 일컫는다. 건축은 ‘공간’이라는 독자적인 표현방식 다양한 서사를 전한다. 창경궁 안 풍기대 위에서 보이는 풍경을 보면, 조선시대 이곳에서 어떤 서사가 있었을지 유추해볼 수 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궁궐 속에서 옛 모습을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공간 안에는 삶이 담기기 마련이다. 창경궁은 그 자체로도 독립적인 공간이지만, 창덕궁, 창덕궁 후원, 종묘, 경복궁과 흐름을 같이하기에 조선의 서사를 전한다. 창경궁에서 보는 자연은 창경궁 하나로 끝나지 않고 창덕궁, 후원, 경복궁과도 이어주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궁궐 감성은 우리 삶 속 디자인에 언제나 영향을 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궁궐을 보며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해야 할지 마음으로 상상해야 한다. 조선시대처럼 살아가는 게 아닌, 조선시대에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디자인과 미감을 보아야 한다.

해외에서 본 공간들은 그 지역 사람들에 최적화되어있기에, 우리는 그곳에서 본 정서를 우리 정서에 맞게 재해석해야 한다. 그렇기에 해외 경험은 필터를 거친다. 일본은 그걸 그 자체로 그대로 가지고 오고, 자신들에게 맞게 변주한다. 하지만 우리는 해외에서 무엇인가 가져오면 그 자체로만 가져오는 일에서 끝내지 않는다. 

창경궁내 유일한 서양식 조경인 대온실 앞. 서양식 조경이지만, 자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게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언제나 그걸 우리 삶에 조화롭게 만들 방식으로 항상 변주해왔다. 해외에서 공부한 이들이 한국에 들어와 만든 공간들을 보면 무조건 해외를 모방하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느낀 감성을 한국과 조화롭게 맞추려고 한다. 아무리 해외 경험이 많아도, 그 경험들이 만들어내는 서사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공간에 맞추어야 하니까.

우리 땅에서 자라난 미학을 재편집하는 일. 후손인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 땅에서 자라난 미학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다. 우리는 항상 미학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항상 검토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건축물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중간에서 관점을 조율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이케아만 해도 북유럽 디자인 쇼룸을 그대로 선보이지만, 그 이후 쇼룸에서 보여준 각 요소를 쪼개서 판매한다. '당신에게 필요한 물건과 관점을 당신 삶에 맞게 쇼룸에서 뽑아가세요. 쇼룸은 참고용이에요'라고 할 뿐이다.

건축은 언제나 자연과 함께한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을 보며 그 안에서 건축과 디자인을 논하지 않고 있다. 자연은 그저 감성을 채우는 도구로만 본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 융합되어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연은 감성을 채우는 도구가 아닌 함께 해야 할 동반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건축을 논 할 때 인간과 자연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가지고, 선조들이 지은 건축을 가지고 논해야 한다.

요즘에는 많은 건물들이 필로티 공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필로티는 '주변 환경'과 '사람'을 분리한다. 주변과 개인을 구분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법이지만, '정서'를 존중하는 방법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궁궐에 보서 본 인간과 자연간 조화. 이를 통해 만들어진 곡선을 보며 ‘부드러움'과 '포근함’을 삶 속에서 표현해야 한다. 아파트 같은 딱딱한 건축이 이를 막는다면? 아파트만공간안에서 '어떻게' 자신이 추구하는 미학을 담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미 지은 아파트를 부술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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