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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을전하는남자 Jul 19. 2021

라이프스타일은 길에서 시작한다.

모든 라이프스타일은 길을 통해 연결된다.

서울은 600년 역사도시다. 서울이 어떤 도시인지 가장 먼저 알기 위해서는 종로부터 보는 게 제일 좋다. 

종로. 종로는 조선시대 선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던 종이 설치된 곳이었다. 특히 종로 1가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보여 든다고 해서 '종'    가라고도 불렀다. [종로의 '종'은 쇠북 ‘종'이다. ]


1405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태종은 성을 쌓고 길을 내고 하천을 정리하고 궁궐을 지었다. 1412년 [종로 1가-종묘 앞], [창덕궁-종로 3가]. [종각-광교]까지 길 양편에 시전행랑이라는 상점을 건설했다. [현 예금보호공사, 신한은행, 미래에셋 센터원 빌딩으로 이어지는 청계천 도로 일대] 물론 시전이 들어서기 이전에도 종로는 상업거리였다. [현재 교보문고 앞, 광화문 디타워 SOHO입구에 시전행랑 유적이 일부 복원 및 보존되어있다.]


조선시대 시전 항랑이 자리했던 종로 1가.

일제 강점기 남대문과 명동에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종로는 400년간 한양 및 조선 최대 상점거리였다. 한양의 지형은 산과 분지로 흘러들어오는 물줄기들이 많다. 또한  이 물줄기가 모여서 다시 한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이러한 큰 흐름을 고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만일 이러한 흐름을 고치는 작업을 한다면? 대형 토목공사가 필요하다. 격자형 도시조직을 배열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물줄기를 따라 도로를 내고 도로 옆에 하수구를 설치하는 게 현실적이고 경제적이다.

한양의 옛 지도를 보면, 마치 물과 도로망이 신경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또한 인공적으로도 수로를 연결하지 않았다. 도로 역시 경사 반대편 도로와 연결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막다른 골목길이 생겼다. 도로망은 가지와 나무줄기 모양 같은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자연지형에 순응한 도시 구조다. 아쉽게도 이러한 구조는 현재 종로 일대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종로 일대 빌딩과 청계천 일대를 걷다 보면 그 흔적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격자형 도시로 개발한 강남과 종로와 명동 일대 느낌이 완전히 다른 이유도 이 때문이다. [광화문 디타워, 청계천 등등.]

엣 한양도성의 지리. 격자형 도시를 만들기에 적합하다고 봉 수 없다. 출처:

600년이 지난 지금 한양은 서울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회도 변했다. 국가통제를 받던 어용 상점터는 상업부동산이 들어가기 좋은 지역이 되었다. 대로변 안쪽 사대부 집터도 사라졌다. 땅을 측정하는 경제가치가 변하자 땅 가치도 변했다. 조선시대 최고 땅과 거리 간 먼 지역들은 서울에서 가장 비싼 땅이 되었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땅 중 하나인 명동은 조선시대에는 상업으로 흥한 지역이 아니었다. 종로구는 고등학교 지리 시간에서도 대표적인  인구 밀구나 낮은 도심이다. 면적도 좁고 인구도 적다. 국회의원선거 때도 이러한 종로구의 인구구조가 부각된다. 하지만 한양도성이 가진 무게감은 조선이 사라졌음에도 결코 약하지 않다. 많은 정부 행정기관이 세종시로 이전했지만, 청와대와 서울시청이 여전히 이곳에서 위용을 자랑한다. 


600년 전 한양은 인구 1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하지만 지금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은 그보다 100배 많은 1000만 명이 거주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서울. 이 지역의 역사성을 언제나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역사성'을 배재하고서는 공간을 바라볼 수 없다.

아무리 정부 행정기관이 지방으로 이전하고, 주변 인구가 감소했다고 해도 광화문은 언제나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조선왕조가 사라졌어도,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이 가진 역사성은 광화문으로 여전히 이어진다. 거주하는 사람들이 줄어든다고 해도 역사적인 존재감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러한 서울과 이 근처에 자리한 궁궐이 가진 역사성을 우리가 어떻게 풀어가는 가다.


길은 공간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은 잠행을 통해 종로를 걸어 다니면서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보았다. 장례식을 치르는 공간도 길이다. 발인을 하고 나면 상주는 영정사진을 들고 길을 나선다.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식도 길에서 이루어진다. 로마 장군들들은 전쟁에서 이기고 나면 개선식을 했다. 개선식을 통해 그들의 공로를 인정받고 정치적인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로마에서 종종 개선식이 정치적인 쟁점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길과 광장에 모여 응원하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월드컵 시즌이 되면 사람들은 언제나 광화문을 비롯해 거리 곳곳에 모여 축구국가대표팀을 응원한다. 촛불시위도 광화문, 세종로, 종로에서 이루어졌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명박산성이라는 컨테이너 박스가 길을 막기도 했다. 노조가 파업을 해도 길에서 모여 행진한다. 길안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분노, 열광, 기쁨, 슬픔, 갈등, 불의, 억압, 공포가 모두 담겨있다.

사극에서 나오는 상점 풍경. 출처: 넷플릭스

길은 상업공간이다. 드라마를 보자. 사극에서도 한 번쯤은 장사꾼들이 짐을 짊어지고 길을 걷는 모습이 나온다. 상인들은 짐을 지고 물건을 나른다. 상점 앞 가판대에 물건을 놓고 장사한다. 지금도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은 여전히 길이다. 아무리 수많은 상업거래가 '온라인'으로 개편되었다고 해도 물건은 언제나 길을 통해 배송된다. 물류센터도 길로 연결되어있다. 주문을 처리하는 서버실이 있는 IDC도 길과 연결되어있다. 그 길 아래에 인터넷을 가능케 하는 케이블이 깔려있다. 우리 눈앞에 보이지만 않을 뿐이다. 길은 여전히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코로나19로도 가장 타격을 입은 곳도 골목상권이다. 사람이 만나는 곳이 길이기에, 그 길이 바이러스로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검투사 경기를 보러 가던 로마인들도 수많은 로마의 길을 이용했다.

길은 언제나 거미줄처럼 엮인 연결망이다. 로마도 아피아 가도를 비롯한 여러 도로를 통해  시칠리아에서 생산된 밀을 로마로 가져갔다. 실크로드. 중국에서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이르기까지 길은 언제나 사람을 연결했다. 중세 유럽의 보부상들에게 실크로드는  대륙 내 상권을 잇는 안전한 도로망이 되었다. 그 연결망의 거점들은 대도시로 성장했다. 그 도시에서는 상업, 문화, 예술이 꽃피웠다. 전기차 회사인 테슬라는 실크로드 구간에 27개의 슈퍼차저를 세운다. 그렇다면 언젠가 실크로드도 자율주행으로 여행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에버그린호의 좌초는 수에즈 운하를 비롯한 글로벌 해운의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길은 오로지 육지만 있는가? 아니다. 바다와 하늘에서도 배와 비행기를 통해 매일매일 수많은 물건들이 오고 간다. 길은 육지에서 해상과 하늘로 확장되었을 뿐이다. 수에즈 운하에 갇힌 에버그린호와 선전 옌텐항의 일시 폐쇄로 우리는 물류가 가진 중요성을 여실 없이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관세청이 10일 단위로 제공하는 수출입 통계는 글로벌 투자은행을 포함한 투자자들이 글로벌 무역을 가늠하는 선행지표로도 활용한다. 길은 단순히 길이 아닌 '연결' 그 자체다.


무엇보다 길은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다. 집이 도시와 맞닿은 곳도 길이다. 사람들은 말을 건네지 않고, 스마트폰을 보면서 걸어가더라도 사람들은 길 위를 스쳐 지나가면서 문화를 만든다.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 파리 시장이었던 조르주 오스만은 파리 개조공사를 과정에서 길목을 최대한 막아 시위 진압을 쉽게 하려고 했다. 길을 없애면 사람은 모이기 힘들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길을 없애면 소통 공간, 차이, 동질감, 기쁨과 분노 등 감정을 막을 수 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유행하고 나서 ‘길’이 막혔지만, 사람들은 줌 같은 화상 어플을 통해 연결을 이어갔다. 길은 경제가치를 지역에 부여한다. 길이 어떻게  만나는가에  따라서 땅값이 결정된다. 누군가는 그 땅에 아파트를 짓는다. 누군가는 상업공간을 짓고 경제가치를 올린다. 그렇기에 길과 길과 이어진 공간은 길을 만나는 다른 과정일 수도 있다.

피렌체가 이탈리아 도시 중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건물과 지역 간의 통일성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길과 건물 바닥 사이 높이 차이가 거의 없다면 ‘길과 바닥’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을 고려해 건물 바닥과 벽을 같은 색으로 통일시키면 공간은 강력힌 '동질감'을 얻는다. 예를 들어 피렌체는 도시 바닥길이 르네상스 시대 것 그대로다. 벽, 도로색이 거의 같다. 그 덕분에 피렌체 정서는 바닥에서부터 건물 끝까지 모두 이어진다. 쇼핑몰도 벽과 바닥 색을 같은 톤으로 하면 쇼핑몰 분위기가 더욱 살아난다.

로마도 피렌체처럼 길에 천장만 덮어도 하나의 공간이 될 정도로 도시통일성이 뛰어나다.
피렌체,로마,베네치아는 바닥과 건물간의 동질감이 강하다.

바닥은 건물과 길이 만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한국 전통 건축은 길과 만나지 않는다. 길은 대문과 이어져있으며, 그 대문 옆에는 담장이 공간을 감싼다. 그렇다고 길과 만나지 않아 단절된 공간이라는 게 아니다. 길과 사람들이 지내는 공간을 자연스럽게 구분했다는 걸 보아야 한다. 궁궐만 보아도 바닥과 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 이런 탓에 공간은 나눠져 있지만 폐쇄적이지 않다. 오직  ‘경계’만 만든다. 흐름은 끊기지 않는다. 물론 담이 높아 안이 보이지 않는 집도 있다. 앞서 언급한 피렌체는 길과 건물이 직접 만나는 접점이 많다. 또한  피렌체를 비롯한 몇몇 이탈리아 도시들은 거리 위에 '천장'만 덮으면 길과 공간이 하나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사람과 연결된 부드러운 공간을 만든다.

피렌체 도시 전경. 저위에 천장을 씌운다고 생각해보자.

길폭과 건물 높이의 비례가 적당하면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낀다. 이는 피렌체의 길 폭과 건물 높이에서도 볼 수 있다. 만일 길이 너무 넓거나 건물이 너무 높으면 인간미를 느낄 수 없다. 예를 들어 테헤란로는 도로가 넓다. 그 안에 빌딩들도 높고 크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자기 자신이 매우 작게 느껴진다. 그 길에서 사람의 존재감은 낮아지며 건물 존재감이 커져 위압감마저 든다. 누군가는 이걸 두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도시란 도시에 맞는 다양한 업무와 용도에 맞게 건물들이 존재한다. 이걸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 땅은 제한되어있고, 용적률과 건폐율도 다르기에 생각해낸 고육지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길이 넓어지면 광장이 된다. 종로 1가의 빌딩을 걷다가 세종로와 광화문이 나오면 숨통이 트인다. 광화문과 그 뒤의 인왕산을 보면 청량함을 보는 순간 시원함은 배가 된다. 이렇게 넓게 퍼진 공간은 큰길이면서도 그 자체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되기도 한다. 로마는 거리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광장이 나온다. 그 광장에는 분수가 있다. 그 분수를 둘러싸고 상점가가 있기도 하다. 광장은 언제나 그 자체로 연결성이 있다. 광장이 가진 힘은 사람을 연결시키며 그 안에서 사람에게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로마의 광장에서는 분수대와 시장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라이프스타일은 모두 길에서부터 시작하고, 길은 라이프스타일을 흐르게 하는 길이자 통로로서 ‘강줄기’ 같은 역할을 한다. 여행커뮤니티 혹은  각종 핫플레이스를 보면 언제나 가로수, 샤로수, 연남동, 성수동길 등등 언제나 길이 붙는다. 길을 통해서 우리는 공간이 연결된 걸 보고, 그 안에서 정서를 느낀다.

길과 건물 높이, 광장은 도시가 어떤 공간감을 가지고 있는지 가늠하는 지표다.

길과 광장은 도시의 관중이다. 유럽은 성당과 첨탑을 중심으로 도시를 만들었다.'케세드랄 처치'라는 단어가 이를 알려준다. 프랑스 파리에서 광장은 언제나 시위와 메시지를 전하는 통로였다. 교토에는 고등어길이라는 생선이 오고 가던 길이 있다. 분지에 자리를 튼 교토는 생선이 귀했기에, 당연히 바닷가에서 오는 고등어는 염지 된 상태에서 교토에 왔다. 그렇게 염지 된 고등어가 오는 산길. 그곳이 고등어길이었다. 이렇게 전해진 고등어는 다시마를 둘러 누름초밥으로 만들어졌다. 고등어 누름초밥은 교토의 길이 만들어낸 음식이다. 한양은 어떠한가? 각종 공물들은 길에서 올라왔다. 경강상인들은 한강을 통해 물건을 가지고 왔다. 


조선 후기 한양에는 두 개의 큰 시장이 있었다. 숭례문 밖 칠 ] 패와 이현이다. 칠 패는 흔적이 사라졌다. 반면에 이현은 현재 동대문시장의 전신이다. 두 시장은 한강 뱃길을 따라 실어오는 곡식과 생선. 도성 바깥에서 수확한 채소와 도축한 고기가 들어오는 길목에 있었다. 도성 안에는 일찍부터 시전이 있었다. 시전은 왕실 및 사대부집에 물건을 도달하는 상점이었고, 시장은 사상들이 자유롭게 장사하는 공간이었다. 시전에서는 원재료를 가공해 고급 완제품을 만들었고, 시장은 도시 외곽에서 생산한 생필품을 거래했다. 시전은 정부가 길에 따라 세운 상점가다. 시장은 상인들이 노상에 세운 임시 구조물이었다. 시전은 선에 가깝고, 시장은 면에 가깝다. 이 선과 면이 합쳐져 상업 문화라는 거대한 면을 촘촘하게 만든다.

시장이 같은 점 같은 요소와 백화점이 가진 면적인 면은 명동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도 이러한 모습을 남대문에서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 신세계, 롯데영프라자, 롯데백화점 본점&에비뉴엘, 눈스퀘어와 명동거리다. 남대문역 한국은행 앞자리한 신세계는 고급 브랜드를 판매하는 곳이다. 신세계가 만든 공간 안에 [해방 전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 신세계가 입점시킨 브랜드가 만든 상업공간이다. 공간 디자인은 신세계. 철저히 신세계가 추구하는 방향에 맞추어져 있다. 반면에 그 옆에 놓인 남대문시장과 수입상 가는 수많은 상인들이 국내외를 오고 가면서 매입한 물건을 판매한다. 이에 반해 남대문시장은 길가에 상점과 상인들이 즐비하다. 특히 남대문 수입상가에는 길과 상점 간 구분이 어렵다. 명동과 남대문은 미세하지만 다르다. 


명동은 길과 건물에 맞추어 상점 및 각종 공간이 즐비하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공간을 선택한다. 물론 길거리에 노점상이 있지만 대부분 음식이다. 롯데백화점 본점과 명동거리는 도로를 두고 경계가 선명하다. 이 덕에 롯데백화점 본점은 명동과는 분리된 독립적인 상업공간 느낌이 강하다. 여기에 롯데백화점 옆에 위치한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1층 샤넬 매장은 명동의 길거리 문화를 보다 선명하게 나눈다.

뉴욕 맨해튼은 페리를 타는 정류장에서 시작해도 무리가 아니다.

뉴욕 맨해튼을 큰길의 끝은 스테이트 아일랜드로 가는 페리 정류장이다. 뿐만 아니라, 볼링그린에서 큰길을 따라 걸어가면 자연스럽게 월스트리트, 미트패킹, 첼시, 트라이베카가 나온다. 뉴욕의 다양한 문화를 길을 통해 접하다 보면 어느 순간 타임스퀘어와 센트럴파크가 나온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구겐하임 미술관이 나오기도 한다. 컬럼비아대학교까지 길은 계속  이어진다. 도시는 집중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집중은 응집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은 늘 편하지만은 않다. 많은 건물들이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쉽게 피로함을 느끼기 때문이다.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그 피로함을 개선하고 도시를 발전시켜 나간다.과연 도시는 어떻게 계속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나갈까? 그건 나도 모른다.하지만 내가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건,우리 다음세대는 우리와 또 다르게 도시를 바꿔나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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