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어떻게 공간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
현대인이 경험하는 경복궁. 조선시대 사람들이 인식하는 경복궁은 다르다. 조선시대에 경복궁은 왕과 권력을 나타내는 장소였을지 모른다. 현재 우리에게는 경복궁은 문화재다. 현재 우리가 국가권력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장소는 청와대다.
고증이 바탕이 된 사극 드라마에서 다루는 경복궁도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뿐만 아니라, BTS가 경회 루안에서 선보이는 퍼포먼스는 경복궁을 훌륭한 오브제로 만든다. 예를 들어 같은 궁궐이라도 '킹덤'에서 궁궐은 암투가 벌어지는 장소다. 하지만 '신입 사관 구해령'에서는 궁궐은 수많은 사초가 매일매일 쏟아지는 직장이다. 누군가에게는 궁궐은 정서를 가득 담긴 공간이다.
누군가에게는 살아있는 역사현장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거대한 오브제다.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궁궐은 우리에게 매우 파편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복궁이 가진 공간을 더 면밀히 이해할수록 우리는 선조들이 쌓은 아름다움을 명료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궁궐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지평을 확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궁궐은 왕조체제에서 모든 대사의 중심인 왕이 거주하는 공간이자, 한 국가가 추구하는 정신을 공간으로 표현한 곳이다. 왕조국가에서 왕은 모든 공적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궁궐은 이러한 왕의 공적 적법성과 그에 근거한 행위가 시작하는 곳이다. 궁궐은 국가의식과 통치행위 및 왕실의 사적인 활동을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현대국가처럼 집무 및 주거공간으로서의 기능만 있는 곳도 아니다. 그렇기에 궁궐 안에 거주하는 왕족에게 완전한 사생활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조선이 정한 통치 규범과 외교 같은 모든 것들 이루어지는 장소도 궁궐이다. 그렇기에 조선이 추구한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이 궁궐을 통해 절정으로 표현되는 건 당연하다. 당연히 궁궐은 자연스럽게 그 나라가 추구하는 미학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 즉, 궁궐은 왕조국가의 처음과 끝이다.
현재 서울에는 조선시대 궁궐이 다섯 군데 남아있다. 법궁으로 지어진 경복궁. 이궁으로 지어졌지만 조선 후기에는 법궁 역할을 한 창덕궁. 대비들의 거처로 지어진 창경궁. 17세기 새롭게 지은 별궁인 경희궁. 19세기 말에 지어진 덕수궁. 임진왜란 시 소실된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이 중건 하기까지 법궁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기간 동안 법궁은 창덕궁. 이궁은 경희궁이 대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내 다섯 궁궐 가운데에서도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장소는 법궁인 경복궁이다.
경복궁은 법궁이자 정궁이기 때문에 다른 곳과 가장 구별되었다. 특히 경복궁은 자연과 관계도 달랐다. 이궁으로 지어진 창덕궁은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자연 지형 흐름을 따라가면서 궁궐을 지었다. 그렇기에 창덕궁은 부드럽고 아기자기하고 편안하다. 하지만 정궁인 경복궁은 아니다. 주변 자연이 경복궁을 둘러쌓고 있을 뿐이다. 창덕궁같이 자연 흐름과 같이하는 모양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변 자연과 경복궁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다. 경복궁을 주변 자연은 근정전 주변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전각들을 환기시킨다.
경복궁은 창덕궁, 창덕궁 후원, 창경궁같이 건축 공간이 자연과 함께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렬한 '이념'을 가진 건물에 가깝다. 삼봉 정도전은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지으면서 태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궁궐이란 임금이 정사를 돌보는 곳이요.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신민들이 다 나아가는 곳이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성을 보이게 하며, 그 명칭을 아름답게 하여 보고 감동되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정도전은 국왕이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를 하는 일을 올바른 행동으로 강조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에 입각해 경복궁은 도성 한양의 주산인 백악산 아래 남향에 위치한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대문인 홍례문, 정전인 근정전, 편전인 사정전. 침전인 강녕전은 남죽 일직선상에 나란히 위치한다. 경복궁의 남북 일직선상에 주요 문과 건물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정중이 가진 엄격한 질서와 위엄을 갖추었다. 광화문 앞에는 나라 최고 관청들이 좌우와 오열하고 있었다. 태조 때까지는 행정 최고 관청인 도평 의사사와 조선 초기 군령과 군정을 총괄하던 의흥 삼군부가 대칭으로 서서 문무를 대표하고 있었다. 현재 경복궁 뒤에는 청와대가 있으며, 경복궁 앞에는 정부종합청사가 있다. 그 반대편에는 주한 미국 대사관이 있다. [대사관은 용산으로 이전 예정]
[근정전-홍례문-근정전] 일렬배치는 '백성을 바라본다'는 조선왕의 의지를 '공간'으로 형상화한다. 이러한 위치는 조선왕조의 위엄을 힘차게 드러낸다. 이는 이궁인 창덕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차이는 같은 정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은 근엄하고 위엄이 가득하다. 반면에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은 뒤에 산을 두고 있어 근엄함보다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조화미'와 부드러움이 더 돋보인다.
조선이 가진 통치 이념을 구현하는 공간. 이것이 경복궁이 지향하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경복궁은 시작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고 6년이 지난 1398년. 훗날 태종으로 알려진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한 지 1주일 만에 이성계는 하야했다. 그 뒤를 이는 정종은 등 떠밀려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정종은 개경으로 환도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정종은 지나가는 왕에 불과했다. 2차 왕자의 난 이후, 왕이 된 태종은 개경에서 한양으로 환도했다. 하지만 그는 경복궁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궁궐인 창덕궁을 지었다. 그 이후 많은 왕들은 경복궁을 기피했다. 태조 이후 역대 왕 가운데에 세종만이 경복궁에 정성을 쏟았다. 세종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여러 전각을 더했다. 하지만 세종도 주로 창덕궁에 기거하며 큰 국가행사만 경복궁에서 열었다.
조선 개국 과정에서 발생한 왕실내 피비린내 나는 싸움. 태종의 뒤를 이은 왕들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피로 얼룩진 경복궁을 피하고 싶어 했다. 왕권 국가에서 세습은 권력이 이어지는 핵심과정이다. 무엇보다 세습으로 결정된 권력을 누군가 힘으로 엎어버리면 '세습된' 권력과 그 '권력'은 동력을 잃기 쉽다. 특히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조선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는 고려시대 무신정권 때도 무수히 본 일들이었다. 왕자의 난으로 왕이 된 태종. 그 피비린내는 세조 때 다시 한번 반복되었다. 태종과 마찬가지로 세조 역시 경복궁을 완전히 버렸다.
태종과 세조는 혈육을 죽이고 힘으로 왕이 되었다. 둘 모두 경복궁을 기피했다. 둘 다 경복궁의 대안으로 창덕궁을 택했다. 물론 역대 왕들은 경복궁을 계속 사용했다. 하지만 경복궁은 즉위식, 외국 사신 접대, 과거시험, 생일 혹은 종친 잔치 같은 국가 행사를 주최하거나 창덕궁에서 병자가 생겨 피접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왕은 언제나 창덕궁에서 생활했다. 어떻게 보면 경복궁은 외교 및 대외행사를 위한 공간 외에 크게 기능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면은 경복궁이라는 공간이 가진 지나치게 경직되고 규칙적인 공간. 무엇보다 왕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경복궁은 왕들에게 외면받으며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임진왜란 때는 거치면서 전소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경복궁은 아예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경복궁은 중건 이후 일제 강점기를 겪었다. 이 시기 전각 일부는 뜯겨나가고 궁은 훼손되기도 했다. 조선 전체 역사에서 접근한다면? 경복궁보다 실질적인 법궁 역할을 한건 이궁인 창덕궁이었다.
물론 경복궁은 지금도 조선 법궁으로 조선궁궐을 대표한다. 하지만 정작 조선시대에 경복궁이 사용된 빈도는 의외로 낮다. 정확한 기간을 계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추론해보아도 100년을 넘지 못한다. 계산에 따라서는 50,60년으로 계산할 수도 있다. 조선역사가 519년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한 나라를 대표하는 법궁이 100년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건 비정상적이다. 물론 조선은 법궁 일부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이궁을 만들었기에, 법궁만이 유일한 유일한 궁궐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조선왕들은 창덕궁을 선호했다. 창덕궁에 기거하면서 정무를 살피고, 경복궁에서는 주로 국가 행사만 했다.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조선 전후기를 나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실질적으로 조선 제1궁은 창덕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은 정식 법궁으로 조선 후기를 이끌었다. 이에 반해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선조와 광해군은 경복궁을 복원하지 않았고, 창덕궁만 복원했다. 그 이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 경복궁은 버려졌다.
경복궁은 조선에 합당하고 그에 걸맞은 위엄과 기품을 가지고 있다. 경복궁 안을 다녀보면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특징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은 품격이 있으면서도 검소하다. 위엄이 있으면서도 아기자기하다. 자연이 가진 곡선과 조화를 이루면서 포근함을 갖은 창덕궁과는 전혀 다르다.
영미권에 속한 많은 건축물들. 그 공간들은 작품에 머문다. 큰 덩어리에 가깝다. 마치 미술작품을 보는 느낌에 가깝다. 서양건물은 그 자체로 작품이지만, 그 작품 안에는 매우 체계적으로 공간이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경복궁은 다르다. 여러 개의 영역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세계다. 모든 공간이 서양처럼 각기 독립적이지 않다. 유교이념에 근거한 건물구조와 전각과 처마의 동선은 경복궁이라는 하나의 큰 공간에서 다양한 아름다움이 조화롭게 합을 이룬다. 그 요소들을 하나로 모으면 조선이 추구한 가치로 이어진다. 경복궁은 조선이 추구한 국가의 물리적인 실체이자, 조선시대가 추구한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전조 후침. '왕이 정치를 펼치는 조정을 전면에 두고 [전조], 그 뒤에서는 국왕과 가족들이 생활하는 침전을 배치한다. 이 말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지켜온 궁궐 공간의 구성 원칙이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기 전까지 경복궁도 이 전조 후침에 충실했다. 하지만 경복궁은 19세기 중엽에 중건되면서 창건 당시의 궁궐 제도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도 변화를 주었다.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변화한 왕실 생활의 변화를 경복궁에 반영했다. 대비의 영역을 여러 곳에 마련한 점. 특히 선원전을 비롯해 태원전과 자경전 등 제례를 위한 공간도 이를 보여준다. 경복궁의 동궁과 대비전, 신원전은 남북 중심축의 동편에 자리하고, 서편에는 궐내각사와 경회루, 태원 전등 연회공간과 제사시설을 만들었다.
경복궁은 중건하면서 시대요구를 잘 수용해 초창기에는 없었던 많은 전각들을 만들었으나, 창건 시 가지고 있던 기본 형태를 손상시키지 않았다. 현재 우리가 지금 보는 중건된 경복궁은 의도적으로 좌우대칭을 피했으며, 보다 자연스러운 배치를 선택했다. 일단 궁성은 전체적으로 장방향이다. 동서 전각들은 건물 크기나 배치, 좌향 등에서 대칭적인 구성을 피하면서 자연스러운 율동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모든 성벽이 정확하게 직선은 아니다. 광화문이 있는 남쪽 중성은 중앙이 약간 남쪽으로 나오는 완만한 곡선 형태를 띠고 있다. 건춘문이 있는 동쪽 중성은 반대로 약간 안으로 굽어 있다. 신무문이 있는 북쪽 중성은 불규칙하다. 반듯한 직선 성벽이 길게 이어지면서 만들어지는 경직된 분위기를 피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북악산과 인왕산이 감싸고 있는 주변 지형과 조화도 염두에 둔 결과다.
근정전은 정전이다. 임금이 조회를 받는 공간이다. 이름부터 유교 가치를 담았다."방탕하지 말고 자신을 경계해라. 매일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므로 직관을 비우지 말라. 하늘이 대신해 다스린다.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떴다가 기울 때까지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만민을 화합하게 하였다. 이러한 부지런함을 추구하여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 물으며 저녁에는 명령을 생각하고 밤이 되어야 비로소 몸이 편안히 하는 것'이 근정전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이다.
사정전은. 편전이다. 편전은 이름 그대로 쉬는 곳이다.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는다는 정신이 담겨있다. 여기에서 정무를 보고 임금이 명령을 내려 지휘하는 공간이다. 근정전과 사정전 이름에 담긴 뜻을 해석해도 경복궁 안에는 유교 군주. 그에 대한 추구가 공간에 가득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경복궁은 건물 그 자체가 유교이념에 따라 국왕도 철저하게 근면하게 통치할 것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직선이 강한 공간 안에 유교이념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홍례문에서부터 사정전까지 매우 빼곡하게 공간이 설계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근정전을 둘러싼 전각들은 국왕을 견제하는 신하들을 공간화한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이 매우 '긴장감'이 강해 왕을 압박한다. 이러한 압박감을 환기시키는 역할은 경복궁 동서북에 자리한 자연이다. 동서북에 위치한 자연은 경복궁이 가진 긴장감을 환기시키며 근정전 공간 안에 자연과의 조화를 이끌어낸다. 조선시대 임금들이 창덕궁 후원에 들어가 '쉬고'오는지를 근정전의 긴장 김을 느끼고 나면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경복궁 안의 유교이념은 조선의 정체성을 담은 브랜딩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브랜딩이 담긴 가장 잘 담긴 곳이 경복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핵심은 근정전이다.
5. [공간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념을 조화시키는 공간감.]
경복궁은 이궁인 창덕궁과 그 모습을 비교할 수밖에 없다. 정전인 경복궁은 '조선' 그 자체를 형상화해야 하기 때문에, 경복궁과 그 앞 풍경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논리적으로 볼 때 경복궁은 권력을 공간으로 보여줘야 하는 게 옳다. 반면에 창덕궁은 이궁으로서 경복궁 보조하기 때문에 경복궁이 표현해야 하는 조선왕조 위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경복궁처럼 왕을 심리적으로 압박할 이유가 없다. 이런 특징 때문에 창덕궁은 후원과 창경궁까지 동선이 주변 자연과 조화롭게 위치한다.
경복궁은 '으뜸'을 표현한다. 그렇기에 조선 최고 건축을 지향한다. 이와 다르게 창덕궁은 으뜸이 아닌 조선이 지향하는 공간이 자연과 어떻게 관계하는지 알려준다. 경복궁과 창덕궁은 그 기능과 역할에 맞게 분류가 잘되어있고, 그에 맞는 각기 조화를 추구한다. 두 궁궐은 결코 우열을 가리는 공간이 아니다. 경복궁의 구조는 창덕궁과 비교하면 보다 선명해진다. 창덕궁은 북악산 자연 동선을 전혀 해치지 않고 고스란히 궁궐 안에 가져와 조화를 꾀한다. 비대칭과 곡성 구성, 크고 작은 건물들이 중첩되어 이어지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중첩되고 이어지는 율동감이 강하다. 창덕궁 후원은 북쪽 봉우리에서 형성된 세 갈래 골까지를 따라 만들었으며 그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정자와 누각을 넣었다. 창경궁 같은 경우 동쪽에 위치한다. 또한 창경궁은 왕실 여성들이 주로 사용하던 공간이다 보니, 경복궁, 창덕궁과 다른 부드러움이 있다. 또한 근정전 주변의 파노라마 사진과 근정전 바로 옆에 있는 경회루의 파노라마 사진을 비교해 보자. 두 사진을 비교하면 경복궁이 얼마나 공간대비가 큰 곳인지 알 수 있다.
경복궁은 법궁이면서도, 자연 안에 ‘자리’ 잡아 조화를 이루려고 한다. 조선 왕조의 정궁이라는 지위뿐만 아니라, 궁궐 제도 측면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이 같은 면은 궁궐이 있는 위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경복궁의 위치는 6조대로의 북쪽에 자리 잡아 도성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장소다. 지나치게 엄격한 좌우대칭아 공간을 경직되게 만들걸 고려해 좌우의 동서 영역은 크고 작은 건물들을 배치해 자유로움을 넣었다. 무엇보다 네모난 중심이 주변 자연과 어울릴 수 있도록 직선을 최대한 피하여 완만한 곡선을 이루게 했다.
경복궁이 직선을 중심으로 강한 건축만 선보이는 건 결코 아니다. 조화를 중시하는 우리 선조들답게, 경복궁 안에도 정치철학이 순환될만한 요소들을 곳곳에 집어넣었다. 일단 [광화문-교태전]까지는 전조 후침에 따라서 공간이 직선 분할이다. 하지만 각 각 그 옆에는 아담한 통로를 설치에 긴장감이 빠져나가도록 했다. 또한 나무와 나무가 틈틈이 시야에 보이도록해 건물로 조성하는 적막함에 여유를 넣는다.'
왕이 활동하는 공간에 많은 전각들이 견제하듯이 배치되어 처마들끼리 겹침이 강하다. 그 겹침이 창덕궁과 창경궁과 비교해 지나치게 복잡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상당히 교조적이면서도 규칙적인 느낌. 이 같은 느낌은 이곳에 머무는 이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준다. 경복궁은 결코 마음이 편한 공간이 아니다. 언제나 긴장해야 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 '전조 후침'에서 벗어난 다른 공간들에 여백을 많이 주어 긴장감이 근정전으로 에만 '쏠리도록' 만든다. 즉, 경복궁은 굉장히 공간대비가 심하다. '경직과 규칙'이 조화로운 공간이며 메시지가 확실하다.
경복궁이 매우 강한 공간이다. 사람을 심리적으로 밀어붙이던 경복궁의 공간 흐름은 뒤로 갈수록 수그러든다. 특히 아미산 부근. 숲과 산자락을 만나기 시작하면 갑자기 조용해진다. 향원정에 다다를 쯤에야 경복궁이 얼마나 심리적으로 사람을 옥죄는 곳이었는지를 '공기'로 느낄 수 있다. 앞쪽의 빽빽하고 규칙적이고 긴장감이 가득한 경복궁의 공간배치. 이러한 탓에 경복궁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평정심을 요구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과 국가를 대하는 마음에서 '평정'을 기준으로 조화시켜야 한다. 이곳에서 매일 살아야 하는 왕은 어떠했을까? 어떤 면에서 경복궁은 체계적이면서도 상당히 짜증도 나는 공간이다.
경복궁은 조선시대 통치이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이와 다르게 창덕궁은 통치이념보다는 조선궁궐건축이 어떤 방향을 지향하는지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두 궁궐은 법궁과 이궁이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한쪽은 조선이 지향하는 규칙을 선보이고, 다른 한쪽은 조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그렇기에 두 곳은 조산이 추구한 건축 및 공간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창덕궁과 경복궁. 이 두 궁궐이 추구하는 규칙, 미학, 권위는 현재 서울 안에 담긴 다양한 공간과 디자인을 풀어가는 단서를 제시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두 공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경복궁의 공간감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원칙과 철학을 공간에 어떻게 구조화해야 할지 알려준다. 무엇보다 공간을 구축함에 있어서 규칙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 규칙이 너무 철두철미해 공간에 긴장감이 강해지는 순간? 그 공간은 사람을 옥죈다. 만일 이것이 브랜드라면? 브랜드가 추구하는 디자인 언어가 지나치게 강하다면? 브랜딩이 [브랜드가 따라가야 할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한 브랜드가 공간에 경험을 설계한다면? 브랜드만으로 긴장감을 '가득' 채우기보다는 브랜드가 사람들과 조화롭게 푸근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온라인이나 미디어가 익숙하다. 하지만 공간과 공간에 따라는 미술은 권력과 그에 따른 모든 걸 표현했기에 공간을 이해하고 이를 시대정신에 맞추어 변주하는 건 언제나 중요하다. 경복궁은 이런 면에서 조상들 이브랜드와 제안들 ‘긴장’과 규칙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는 매우 적절하게 알려주는 공간이다.
서울을 향한 비판과 냉소. 동시에 서울에 대한 찬사는 서울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을 반영한다. 하지만 우리 우리는 때때로 우리 스스로 서울을 냉정하게 생각하고 차분하게 바라보기도 해야 한다. 지금 서울이 당면한 많은 문제는 전 세계각 공유하는 하는 문제도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기후변화, 지속가능성, 연구, 도시 불평등, 도시재생, 역사, 젠트리피케이션, 공간 사유 화등. 우리가 실 펴할 것은 우리만의 공간을 바라보는 공간 문법이다. 대지조건, 상황, 독립적인 공간, 브랜딩. 브랜드 등 무수히 많다.
경험은 사람들의 생각을 형상화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정의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과 다른 견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남들에게는 자신이 자연적으로 경험하는 무언가에 의해 그 개념이 가진 역할과 관점을 정의된다. 즉, 사람들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메시지와 제안을 보는가에 따라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념이 변한다는 말이다. 개념은 단순히 나면서부터 정의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개념은 기본적으로 상호작용, 경험에서 정의되기 쉽다. 정의는 어떤 개념을 적용하기 위해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관계하는 혹은 경험하는 무언가에 따라 정해지기 더 쉽다. 그렇기에 은유와 울타리는 어떤 개념을 더 상세하게 정의하고 그 범위를 키우는 장치다. 그렇기에 공간 자체를 그 공간을 만든 이가 어떻게 정의하는 게 따라서 충분히 달라진다. 이는 우리가 언제나 집중해야 할 과제다.
계속해서 문제를 논하고 비난한다고 무언가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언제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떤 공간을 만들지 고민해야 한다. 그렇기에 기록을 찾아보는 건 중요하다. 경복궁은 우리만의 공간 문법을 보여주는 좋은 장소다. 경복궁이 보여주는 공간 문법 은근처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과 모두 다르다. 또한 경복궁이 부족한 역할은 창덕궁이 대신한다. 우리가 봐야 할 건 언제나 외부가 아니다. 외부 사례만 가져오는 게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선조들이 해결한 방식을 우리가 다시 재조명해야 한다. 멋진 공간과 브랜드가 만들어가는 서울은 그렇게 시작한다.
서울은 반복적으로 뻗어가 가면서도 이리저리 섞이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다. 한편으로는 혼돈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동적이다. 서울은 과거와 현재가 충돌한다. 크고 작은 게 언제나 충돌한다. 예술과 일상이 충돌이 만들어지고 어설픔과 세련미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공존한다. 콜드 플레이의 [Higher power]에서 보여준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의 댄스와 음악의 만남을 보자. 어설픔과 세련미가 조화를 이루며 역종적인 아우라를 표현한다. BTS의 버터는 어떤가?
서울은 여전히 거대 블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부터 서울의 도시조직 골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서울은 도시이면서도, 한국의 경제 교육문화가 집중된 곳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도시는 힘 있는 몇 사람. 정치인, 관료, 도시기획자, 건축가가 만드는 작품이나 장식이 아니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삶들이 수를 동안 궤적이자 결이다.
오늘도 어디선가 낡은 건물은 없어진다. 그 자리에 누군가 자신의 목적을 담은 새로운 건물을 만든다. 넓은 건물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건물. 새로운 개발이 도시의 새로운 동력을 이끌면 도시는 빠르게 변화한다. 이과정에서 옛 흔적에 새로운 무언가가 겹쳐진다. 이질적인 무언가가 도시 색깔에 맞추어 생기기도 한다. 도시는 촘촘히 사람 흔적들이 여러 겹으로 쌓여 만들어진다.
지금 MZ세대가 마주 하는 건 단순한 새로운 공간이 아니다. 내가 매번 도쿄에서 느낀, 코로나 이전까지 느낀 도쿄 공간은 '개인 취향'을 공간이 구축하는데 중심을 두었다. 당연히 공간과 공간에 따라오는 브랜딩은 취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MZ세대가 바라보는 공간은 기존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SNS, 유튜브를 통해 공간이 가진 아우라가 매우 빠르게 퍼진다. 코로나 이전에는 낮아진 항공요금과 번역 기술 등으로 얼마든지 빠르게 자국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도쿄에서 본 어떤 공간은 서울 어딘가에 이미 있다. 오히려 더 빠른 곳도 있다. 이현덕 대표가 운영하는 론더리 프로젝트, 워시 타운은 도쿄보다 먼저 생긴 공간이다.
그렇기에 MZ세대가 바로 보는 공간은 그들이 살아온 터전, 빠르게 수용하는 문화와 브랜딩, 디자인이다. 하지만 MZ는 무조건 모방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 삶의 터전을 적절하게 합친다. 이런 면에서 과거 서울은 MZ세대가 매우 다방면으로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이 단계가 다소 주춤해졌을 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과 아름다움은 덜 발전했어도, 오히려 코로나 덕에 개개인 취향은 더 다양해졌다. 오히려 코로나19가 단절시킨 '이동'은 각종 IT기술이 채워주면서, 개개인 취향은 더더우 디테일하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코로나 이후 우리가 볼 공간 디자인, 브랜딩과 아름다움은 코로나 기간 동안 축적된 개인 취향들. 응축된 취향들이 다양한 반면으로 공간 속에 담기에 될 ‘확률’이 매우 크다. 비록 코로나가 거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공간을 새롭게 만드는 일은 매우 위험이 크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건물이 추구할 아름다움. 라이프스타일이 담길 공간을 라이프스타일 ‘패턴’으로 더더욱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공간을 만드는 건 사람이다. 공간을 채우는 것도 역시 사람이다.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교도 사람에게서 나왔다. 통치이념이 가득 담긴 공간은 그 안에서 그 공간에 맞는 생활양식을 요구한다. 우리가 경복궁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경복궁 안에는 단단한 통치이념에서 나온 가치관과 이를 담아내는 공간미학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에게도 동일하다. 사람이 추구하는 생각 가치관은 그가 만들 공간과 생활하는 모든 요소에 영향을 준다. 이를 개인의 취향으로 압축된다. 브랜드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공간은 결국 라이프스타일. 개인 철학의 구현이다. 말로서만 떠도는 게 아니다. 눈에 보이게 만드는 실질적으로 오감으로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간과 브랜드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경복궁은 단순히 궁궐을 넘어 조선이 추구한 국가이념. 조선왕조라는 브랜드를 국왕을 비롯한 조산 시대 사람들이 만들어간 공간이다. 경복궁은 그 가치가 가장 역동적으로 드러난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이제 조선은 우리에게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경복궁 관 광화문을 보면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경복궁을 보면서 우리는 나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관은 무엇이며, 그 가치관을 어떻게 나만의 공간으로 구현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 공간은 온오프라인을 모두 막론한다. 그렇기에 이제 공간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없다. 오로지 브랜드와 사람들이 만드는 문화만 존재할뿐이다. 경복궁이 가진 공간적 규칙과 원칙은 사람에게도 적용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