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 올랭피아 그리고 감각.

예술을 자신의 감각을 표현하는 도구다.

by 경험을전하는남자

1865년 프랑스 파리의 살롱전. 심사위원들과 관객을 경악과 분노에 빠지게 한 그림 한 점이 등장한다. 그림의 이름은 올랭피아. 에두아르 마네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 어었다. 그림을 본 이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마네에게는 온갖 협박과 비판이 쏟아졌다. 그해 가장 끔찍한 그림은? 단연코 올랭피아였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올랭피아를 보고 분노했을까?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 1865년 최악의 그림이라고 할 만큼 당시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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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의 자세는 과거 비너스를 그릴때 사용되던 자세였다. 올랭피아가 찬 팔찌는 여자노예를 상징했다. 출처: 위키디피아.

올랭피아 안에는 기존 누드화와 다른 숭고함과 성스러움. 신화적인 요소기 전혀 없었다. 도발적인 눈빛. 목에 두른 검은 리본과 팔찌는 주인에게 팔리기를 갈망하는 여자 노예를 상징했다. 올랭피아의 자세는 한눈에 봐도 ‘비너스’를 묘사할 때 쓰이는 자세였다. 실오라기 하나 없는 올랭피아는 매춘여성 그대로였다.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는 건 사람들에게 매춘부 혹은 화류계의 여자로 받아들여졌다. 벌거벗은 매춘부인 올랭피아.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에 대한 지독한 풍자였다. 살롱전이 제시하는 아름다움의 기준만 보던 이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누드화는 신화 혹은 요정. 둘 중 하나였다. 신화에 기반한 아름다움 혹은 이야기를 베재한 채로 누드화를 그린 화가. 벌거벗은 사람을 매우 자극적으로 그린 사람은 마네가 처음이었다.

흑인 메이드와 검은 고양이는 부르주아들이 분노하는데 더욱 기여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올랭피아 옆의 흑인 메이드는 당시 아프리카 사람들을 시종으로 부리던 부르주아들의 위선을 표현했다. 올랭피아가 누워있는 침대 아래에는 여성의 음부를 상징하는 검은 고양이를 그려 넣었다. 즉, 올랭피아는 그 당시 창부를 후원하면서 겉으로는 ’ 지성인’ 인척 하는 부르주아 계급을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특히 검은 고양이를 집어넣은 것이 극도의 분노를 가져왔다. 우리는 보통 고양이를 뜻하는 단어로 ‘Cat’을 쓴다. 하지만 ‘pussy’라는 고양이를 뜻하는 단어가 하나 더 있다. Cat와 pussy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pussy라는 단어는 고양이를 뜻하면서도 동시에 ‘여성의 음부, 성교, (성교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 검은 고양이도 이런 의미였다. 즉, 마네는 올랭피아를 통해 자신이 본 사회 모습. 자신의 감각으로 해석한 부르주아들의 모순.‘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간 퇴폐적이고 환락에 가득한 파리’를 올랭피아를 통해 은유적으로 묘사했을 뿐이다.

1280px-%C3%89douard_Manet%2C_en_buste%2C_de_face_-_Nadar.jpg 인상파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두아르 마네. 출처:위키디피아.

마네는 ‘인상파의 아버지’,’ 인상파의 시초자’, ‘인상파의 왕’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호칭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인상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인이 인상주의자들의 정신적인 스승이라는 면을 부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네는 처음으로 클로드 모네를 만났을 때, 그를 무척이나 맘에 들어했기 때문이다.


마네는 역사와 신화를 담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파리의 진짜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실제로 본인이 직접 관찰한 파리의 일상 모습을 스케치북에 자주 그렸다. 카페의 화가, 멋스러운 모자를 쓴 여인 등등. 그는 당시 파리의 실생활을 고스란히 관찰했고 그렸다. 그가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은 그 당시 파리의 삶과 문화 그 자체였다. 물론 이 와중에서도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수시로 방문해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진짜 파리를 그리기 위해 항상 관찰하고 다닌 마네. 올랭피아는 그의 관찰들. 축적된 감각이 쌓은 결과물일 뿐이다.


마네는 애초부터 살롱전에 대놓고 적대적인 건 아니었다. 그는 ‘마네 부부의 초상 [1860],’ 롤랑 드 발랑스 [1862], 스페인 가수 [1860]는 살롱전에 입선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오히려 마네는 살롱전을 통해 화가로서의 길을 순탄하게 걷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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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드 발랑스와 스페인가수, 마네는 살롱전의 입장으로 순조롭게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출처: 위키디피아.

그가 ‘올랭피아’를 그린 이유는 근대화된 파리의 진짜 모습

을 담기 위함이었다. 그가 바라본 진짜 파리는 퇴폐적으로 변해있었다. 상류층 남성들은 몰래 매춘부들을 후원했다. 겉으로만 고상한 척했다. 이러한 면은 올랭피아에서 흑인 하녀가 들고 있는 꽃다발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림 속 흑인 하녀가 들고 있는 꽃은 올랭피아의 고객이 보낸 것이었다. 그가 ‘올랭피아’로 매춘을 표현한 이유는 부르주아들에게 자신들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마네가 그리고자 한 진짜 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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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르주아들이 좋아하던 신화적 요소가 기반이 된 누드화. 올랭피아는 고고한척하는 부르주아의 위선에 올랭피아라는 폭탄을 던졌다. 출처: 위키피디아.

마네는 올랭피아에 19세기의 부르주아들 위선을 그림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는 올랭피아를 통해 현실을 외면한 체, 그리스 신화 같은 그림에 취해있던 이들을 비판했다. 올랭피아는 그 당시 상류층 남성들의 치부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진짜 파리의 민낯 중 하나였다. 이것이 마네의 올랭피아가 비난을 받은 진짜 이유였다. 마네가 추구한 감각은‘보기 싫은 현실도 묘사하는 미술’이었다. 이러한 감각을 추구한 마네가 살롱전과 충돌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올랭피아 안에는 새롭게 바뀐 파리와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을 담기 위한 노력도 담겨있다.

올랭피아의 순한 맛 버전이었던 '풀밭 위의 점심. 출처: 위키디피아.

사실 마네가 살롱전과 충돌한 건 올랭피아가 처음이 아니다. 1863년 살롱전에 출품한 ’ 풀 밭 위의 점심식사’가 먼저였다. 당시 살롱전은 낙선전도 개최했는데, 그 자리에서 선보인 ’ 풀밭 위의 점심식사’도 사람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비난을 받은 이유는 단순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신과 요정이 아닌 ‘현실 속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풀밭 위의 점심시간은 라파엘로의 판화의 그림 구조를 모사했다면서 더더욱 조롱을 받았다. 올랭피아가 받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자신의 여정을 끝내지 않는다. 그는 1866년 ‘피리 부는 소년’을 살롱전에 다시 출품한다. 하지만 당연히 그는 낙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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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가 에밀졸라에 대한 감사함으로 그린 초상화. 우끼오예와 올랭피아가 보인다. 출처: 위키디피아.

이 같은 마네의 모습을 보며, 소설가 에밀 졸라는 마네를 옹호하는 글을 적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에밀 졸라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에밀 졸라의 초상’을 그리기도 한다. 또한 마네는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 당시, 박람회장 건너편 세느강변에 임시 가건물을 지어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이 개인 전시회는 ’ 구스타프 쿠르베’ 이후 열린 2번째 개인 전시회였다. 하지만 그 주인공인 마네였다. 당연히 마네가 연 개인 전시회는 살롱전의 권위에 도전한 사건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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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가 그린 발레화 그림안에는 그 당시 발레교습소에서 은밀히 이루어지던 부르주아들의 치부를 간접적으로도 그렸다. 출처: 위키디피아, ABC갤러리.

마네의 그림만이 부르주아 계층을 비판했을까? 아니다. 인상주의 화가 중 한 명인 에드가 드가의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이들이 에드가 드가의 발레 그림을 극찬한다. 에드가 드가가 그린 발레는 발레 동작은 매우 우아하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그 당시 발레리나는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19세기 말 발레교습소에서 발레를 하는 어린 여자아이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성매매대상이기도 했다. 발레교습소를 운영하는 이들 종종 포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우리가 보는 에드가 드가의 그림은 결코 우아한 게 아니다. 물론 에드가 드가는 드가는 발레를 우아하게 그렸다. 하지만 그 우아함 속에는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에드가 드가가 발레 그림을 우아하면서 세밀하게 그릴수록 그 안에 담긴 위선은 더 세밀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에드가 드가의 그림은 슬픔이 서려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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