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험을전하는남자 Jan 18. 2022

마네, 인상주의. 축적.

인상주의자들의 색깔을 만든 건 자신들에 대한 믿음과 감각의 축적이다.

에두아르 마네를 인상주의자라고 말하기는 상당히 애매하다. 그는 인상주의자 모임에 참여했지만 소극적이었다. 그는 올랭피아로 지탄을 받았음에도 살롱전을 포기하여도 못했다. 훗날 살롱전에 입상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는 인상주의가 점차 사람들에게 인지도를 얻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어쩌면 에두아르 마네는 ‘올랭피아’라는 그림이 한 세기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으리란 것을 알았을지 모른다. 또한 올랭피아는 대중의 요구를 무조건 따라가지 않는 작가주의 그림의 상징이다. 동시에 수요에 부응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은 도전적인 예술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마네가 파리를 관찰하면서 축적한 감각의 결과 중 하나가 올랭피아다.

 나의 감각을 남에게 보여줄 때는 항상 두려움이 앞서기 마련이다.’이게 맞을까?’’다들 어떻게 생각할까?’이러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찬다. 인상주의자들도 다음과 같이 생각하지 않았을까?‘과연 우리의 시도는 미술로 인정받을까? 우리가 가는 길이 과연 옳을까?’.

마네의 역작으로 뽑히는 폴리 베르제르의 바. 이 그림 안에는 현대미술의 초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미술작품을 본다고 해도 ‘내가 미술을 잘 알까? 나 아무것도 모르는데?’라는 두려움이 나를 덮칠 때도 있다. 나에게 미술을 보는 방법을 물어본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랬다. 많은 이들이 그림을 보지도 않은 체 막연한 두려움부터 먼저 가졌다. 나 역시도 그랬다. 미술작품을 보는데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두려움을 피할게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마주하기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오히려 미술을 보면서 아주 작은 감각들을 스스로 글로 적어보는 게 더 좋다.


만일 당신이 마네였다면? 얼마든지 살롱전의 기준에 맞는 그림을 그리면서 살롱전에서 더 좋은 결과를 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마네는 살롱전에 입선했었다. 하지만 마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감각을 도발적으로 표현했다.

알고보면 친구,선배,친구,선배들. 

인상주의는 사실을 묘사하는 미술에서 ‘감각’을 묘사하는 미술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인상주의 미술.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에드가 드가, 르누아르, 시슬리 등. 후대에게 인상주의자로 알려진 이들은 그 당시 미술에 반기를 든 이들이다. 앞선 글에서 살펴본 대로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가 지배하던 그 당시 미술은 철저히 종교, 신화, 역사에 대한 묘사에 집중했다. 사람이 직접 관찰한 감각들. 이 감각에 근거한 미술은 ‘미술’의 개념에 속하지 않았다.

인상주의자들이 아니더라도, 시대는 새로운 미술을 요구하고 있었다.

인상주의자들은 막연하게 ‘이제부터 우리는 아카데미 미술에 반기를 들 거야!’라고 자신들의 감각에 근거해 그림을 그린 게 아니다. 그들을 둘러싼 주변 환경이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그것을 요구했다. 기술 발달은 무엇보다 이를 가속시켰다. 당시 사진 기술의 발달은 미술이 가진 장점인 ‘재현’을 거침없이 파괴했다. 수많은 사진관들이 생겼다. ‘인물화’로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은 점차 설자리를 잃어갔다. 사진 기술 발달은 회화의 특징인 ‘사실적 묘사’가 더 이상 유용하지  않게 만들었다.

살롱전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새로운 무언인가가 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출처:위키디피아,

19세기 말  사회는 기존 예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사람 손으로 재현하던 작업들을 기술이 대신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가들이 그림을 많이 수주하려면 살롱전에 입상해야 했다. 살롱전에 입상하려면? 살롱전의 기준에 부합하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살롱전의 기준에 부합하는 그림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형국이었다. 또한 살롱전에 입상하는 이들은 극 소수였다.  결국 화가들은 새로운 시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차 같은 새로운 교통수단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교외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이 느끼는 경험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선택은 하나였다. 살롱전에 ‘올인’하던가 혹은 아예 새로운 미술 장르를 개척하던가.

클로드 모네의 초창기 작품들은 그 당시 파리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인상주의자들의 초창기 그림은 대부분 눈에 보는 일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앞서 말한 기차의 발전이 한 몫했다. 그들의 기반에는 그 당시 발전한 기술 인프라가 있었다. 동시에 인상주의자들은 시간이 지갈수록, 각자마다 자신이 지향하는 감각을 그림 안에 넣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조롱하고 비웃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토닥이면서 이겨냈다.


감각이란 축적해야 생긴다. 무수히 무엇인가 만들다 보면 자신에게 무척 잘 맞는 무언가를 축적하게 된다. 거기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감각을 발전시키면서 감각을 키우면 된다. 클로드 모네는 일상생활에서 ‘빛 묘사’로, 에드가 드가는 ‘구도와 표현’으로, 르누아르는 사람과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감각을 집중했다. 카미 유보트는 사진을 활용해 구체적이면서도 빛을 반영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인상주의자 중에서도 르누아르는 색채와 인물 묘사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출처: 위키디피아.

중요한 것은 인상주의 미술을 해석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미술을 보면서 감각을 어떻게 해석하고 축적할지를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것이 자신만의 브랜딩과 브랜드를 만드는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물건을 팔아야 하는 마케터라면? 무엇보다 브랜딩을 잘 ‘이해’ 해야 할 거다. 그렇다면 인상주의 미술을 보면서 그들의 개개인이 그림을 통해 감각을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각기 그려간 그림들이 결국 그들의 정체성을 만들었으니까. 그 과정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브랜딩이다.


기획자는 어떤가? 인상주의 미술에는 왜 미술이 변해야 하는가? 에 대한 시대적 부름에 대한 그들만의 응답이다. 시대가 원하는 불편함을 개선하거나 서비스를 만드는 일, 이것이 기획 아니던가? 이처럼 예술은 단순히 감각으로만 조재하지 않는다. 그 보이는 것에서 보는 축적과 과정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의 답을 던진다. 우리는 그것을 봐야 한 게 그게 바로 미술이 나에게 톡톡 두드리는 순간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