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

19세기의 사회변화는 미술이 변하는 기저가 되었다.

by 경험을전하는남자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는 왕족과 귀족이 몰락하고 부르주아 계층이 사회의 지도계층이 되었다. 이들은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전문지식을 통해서 부를 툭 적한 전문지식계층이었다. 산업 혁명은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어 세계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산업 혁명은 철과 같은 새로운 소재 , 내연 기관과 같은 기술, 석탄과 전기 같은 새로운 에너지원, 새로운 기계의 발명, 공장제 노동의 발달, 교통과 통신 발전, 과학의 산업적 응용을 이끌어 냈다. 20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산업혁명이 우리 삶의 기틀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의료, 금융, 기술 등 전문지식을 가지고 부를 이룬 사람들. 이 부르주아 계급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뽐내는 자리가 있었다. 바로 만국박람회였다. 이 만국박람회에서는 유럽 내 각 나라들이 자국의 기술력을 선보이는 시간이었다. 마치 매년 열리는 CES에서 각국 기업들이 첨단 기술을 선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2022 CES는 현재 라스베이거스에서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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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박람회는 각 나라들의 기술을 선보이는 장소였다. 출처: 위키디피아.

산업 혁명은 사회관계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혁명 이후로 부르주아의 위상은 더욱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러한 산업혁명을 주도할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계층은 산업혁명을 통해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시대를 만들었다. 대량생산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파리 같은 경우, 오스만의 파리 도시 근대화 산업 이후 사람들이 더욱 몰려들었다. 이러한 부르주아 계층의 형성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욕구,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사진 기술의 발달


19세기에 가장 크게 발달한 기술 중 하나는 광학기술. 사진이었다. 특히 사진 기술의 발달은 초상화를 그리면서 살아온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화가들의 삶을 위협할 정도였다. 그 당시 ‘15분’이면 자신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초상화를 화가에게 맡길 이유가 사라졌다.

Brooklyn_Museum_-_Nadar_Élevant_la_Photographie_à_la_Hauteur_de_l'Art_-_Honoré_Daumier.jpg 사진관의 융성을 그린 만화. 사진 기술을 발달은 회사들의 생존을 위협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사진은 19세기 큰 유행이 되었다. 그림으로만 보던 야외 풍경은 사진을 통해 더 상세하게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의 모습도 사실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누드사진도 잘 팔렸다. 이 탓에 여성 누드화도 더 이상 그림의 소재로 여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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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재현'이라는 미술이 가진 이점을 단숨에 빼았았다. 출처: 위키피디아.

화가들은 사진을 아주 싫어했다. 하지만 어떤 화가는 사진을 활용해 초상화를 주문한 사람이 ‘원하는’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초상화를 주문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해주기를 원했다. 요즘 말로 뽀샵을 원하는 고객들도 적지 않았다. 인상주의 화가였던 르누아르 같은 경우 이걸 정말로 잘했다. [르누아르 같은 경우, 패션 공방에서 일한 경력 덕분에 여성들이 원하는 초상화를 능수능란하게 그렸다]


사진 기술의 발달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예술을 어떠한 '재현'의 대상으로 보지 않게 만들었다. 또한 미술이 독점하고 있던 '재현성'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 화가들은 ‘그림만 잘 그린다’고 해서 화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팔아야 화가로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런 시대변화 탓에 사람들은 살롱전에 더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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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보 카미유보트같은 경우 사진구도를 그림에 적용하기도 했다. 출처: 위키디피아.

이러한 기술발전은 화가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가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적인 과제를 만들었다. 그렇기에 인상주의자들 같은 사람들이 나온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시대가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내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새로운 게 아니다. 19세기와 비슷한 모습을 우리는 2021년에 이미 경험했다. 인상주의자들이 감각을 중심으로 한 미술을 선보였다면? 지금 예술은 NFT, 메타버스 등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자유로운 유통판로를 개척하고 있다.

19세기의 만국박람회는 지금의 CES와 비슷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출처: 더밀크 닷컴.

19세기의 만국박람회에서 선보이는 수많은 기술들. 이 것들은 어떤 면에서 인공지능, 데이터, 모빌리티, 메타버스 등 새로운 기술이 끊임없이 빠르게 변한 지금과 무척이나 비슷하다. 아마도 19세기에 사람들이 느끼는 기술변화는 ‘2022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기술발전을 보고 느끼는 부분’과 크게 다를 게 없을지 모른다.


우끼요에: 서양 예술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채색목판화.


서양 예술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비례”다. 18세기 중반부터 유럽은 새로운 기술과 문물을 끊임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대변화에 불구하고 서양미술은 그리스 신화, 성경, 원근법, 비례, 조화라는 옛 가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살롱전과 살롱전의 평가기준은 이러한 서양미술이 가진 특징을 무척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함에도 변하지 않는 서양미술의 기준은 그 당시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화가들에게는 구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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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과 역사성을 강조한 미술을 보던 예술가들에게 우끼요에는 신선함 그 자체였다. 출처: 위키디피아.

옛 구습에 빠진 서양미술을 비롯해, 의복, 공예 등 여러 방면에서 가장 큰 영감을 준 문화가 있었다. 일본문화다. 금색과 흑색 칠기로 된 일본 장식장과 자기류는 17세기에 이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국적인 오브제였다. 18세기 유럽이 산업화하면서 각종 산업기술이 발달하면서 교통기술도 자연스럽게 발달했다. 각 나라와의 무역도 늘었다.

마네가 그린 친구 에밀 졸라의 그림에도 등장한 우끼요에. 출처: 위키디피아.

그 당시 일본 상품들은 유럽에 알려진 지 시간이 지났지만, 그중에서도 최고의 인기 상품중 하나는 도자기였다. 특히 일본의 이마리 자기 같은 제품은 유럽 사람들이 꼭 가지고 싶어 하는 상품이었다. 이런 도자기의 인기에 더불어 일본에서 만들어진 각종 호화스러운 가구들도 인기였다. 이러한 인기 있는 일본 상품을 포장지로 사용된 게 바로 일본 목판화였다. 특히 일본 백자를 포장지로 쓰인 일본 채색 목판화인 우끼요에는 신선함 그 자제였다.

제일 유명한 우끼요에 중 하나인 가쿠시아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출처: 위키디피아.


‘자포니즘’이라 불린 19세기 일본문화 열풍의 중심에는 우끼요에가 있었다. 우끼요에 속 기모노, 쥘부채, 일본 풍경에 대한 묘사는 일본만의 ‘축소와 과장’을 담았다. ‘비례’를 중시하던 서양인에게 이 같은 축소와 과장은 충격이었다. 1987년 만국박람회에서 일본 특별관이 생길 정도로 백자, 부채, 장식장, 정원 양식까지 일본 문물에 유럽인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그중 우끼요에는 가장 인기가 많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가격이 싸고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에두아르도 마네, 클로드 모네 등도 일본 목판화를 수집했다. 무엇보다 일본 목판화의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인기가 많았다. 돈이 없기로 유명한 반 고흐도 이 목판화를 수집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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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예술가들의 시선에 우끼요에는 신선함 그 자체였다. 출처: 위키디피아.

우끼요에는 ‘조화와 비례미’를 중시해온 서양문화에 색다른 영감을 주었다. 일본문화는 서양인들에게 새로운 환상이자 영감의 원천이 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문물도 소개되었지만 일본만큼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옛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던 유럽 예술에 새로움을 채워주는 자양분은 단연코 일본문화였다.


"우끼요에의 구도, 묘사는 서양인들에게 새로움 그 자체였다."

비약, 과장, 평평함과 생략은 새로운 그 자체였다. 출처: 위키디피아

일본풍 장식 혹은 스타일에 대한 관심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우끼요에를 비롯한 당시 일본 문물을 탐구하였다. 인상주의 미술가들에게 우끼요에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무엇보다 일본 목판화는 기존의 유럽에서 보지 못한 구도와 역동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정확한 데생과 형태, 비례를 강조했던 당시 미술 외 비교하면 일본 목판화는 평평하고 생략과 비약이 심했다. 구도는 새로웠다. 비례도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단순하고 재현에 목적을 둔 명암과 그림자도 없었다. 묘사는 자유롭고 평평하고 색감은 진하고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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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구스타프 클림프,제임스티소까지 우끼오에는 예술가들에게 수많은 영향을 주었다. 출처: 위키디피아

우끼요에가 가진 평면성, 색채, 파격적인 구도는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빈센트 반 고흐. 구스타프 클림프, 제임스 티소, 제임스 맥닐 휘슬러 등 인상파 화가뿐만 아니라 당대 새로운 미술을 그리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자신들 그림에 일본문화를 담았다.


19세기의 변곡점은 2020년대와 비슷하다.


19세기가 중요한 이유는 변곡점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말부터 축적된 기술발전으로 인해 사회인프라가 그 이전과 완전히 새롭게 변했다. 특히 기술발전은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가 정립한 미술 체계를 점진적으로 무너뜨렸다. 동시에 ‘감각’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미술으로의 탄생을 가속화시켰다. 또한 일본문화가 유입되면서 자포니즘이라는 문화현상이 되었다. 사진 기술로 인해 점자 그 중요성이 사라진 재현과 원근. 여기에 일본 목판화 같은 회화를 보는 새로운 영감을 제공하면서 19세기부터 미술을 접근하는 ‘감각’ 자체가 바뀌었다는 점.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변화였다.

비플의 작품이 785억에 팔린 이유는 예술에 대한 패러다임이 다시 한번 변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출처:deezn

우리는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무역과 교통으로 전해지던 문화는 이제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많은 문화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매우 빠르게 연결되고 있다. 언어장벽도 ‘번역’ 기술의 발달로 많은 불편함이 해소되고 있다. 예술 쪽은 어떤가? 2021년부터 NFT를 포함해 비롯해 미술을 비롯한 크리에이터들이 만든 작품에 대한 가치 측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또한 갤러리와 미술관이 독점하던 미술 유통도 바뀌고 있다. 사람들은 미술관을 넘어 가상공간에서 미술을 보기 시작했다. 100년간 변하지 않았던 미술을 보는 ‘감각’이 2020년대부터 바뀌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19세기 말과 2022년은 매우 비슷하다. 심지어 1918년 스페인 독감과 2020년 코로나까지 말이다.


19세기 산업혁명이 예술을 비롯한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었다. 지금은 정보기술이 라이프스타일을 바꾸고 있다. 또한 정보기술의 기반이 된 반도체 기술은 ‘저장과 연산’을 넘어 ‘인간 감각’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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