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는 미술의 변곡점이었다.

우리가 미술을 바라보는 관점은 19세기 말부터 만들어졌다.

by 경험을전하는남자

우리는 지금 미술관에서 작품을 볼 때 자연스럽게 작품에 담긴 메시지를 생각한다. 인상주의 미술이 유독 인기가 많은 이유도 특별한 배경지식이 없어도 화가의 의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술을 바라보는 자세. 그 기틀은 인상주의자들이 만들었다고 보아도 무관하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해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100년만 해도 미술은 언제나 '전쟁', '영웅적인 행동', '종교적인 테마'만 다루어야 했다. 나머지는 '미술'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19세기 미술에서 역사화는 매우 중요했다. 츨처: 위키피디아.

이런 면에서 인상주의 미술은 ‘묘사’가 중심인 미술에서 ‘감각’인 중심인 미술로의 이행을 이끈 시작점이다. 어떤 면에서 인상주의자들이 받은 멸시와 조롱이 우리가 미술을 ‘감각’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주춧돌이 되었다. 우리는 그 이전에 인상주의 이전 미술이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맥락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테슬라를 중심으로 한 전기차 산업을 이해하기 위해 화석연료를 중심으로 한 자동차산업을 먼저 이해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잭슨 폴록의 그림은 19세기 기준으로는 그냥 쓰레기다.

19세기 미술 흐름이 바뀌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이번 글에서는 파리 도시 근대화 사업과 루브르 박물관 개관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파리는 시위, 전쟁으로 인해서 도시가 황폐화되었다. 집들은 누더기들이 많았다. 하수시설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서 길거리에서는 악취와 똥물로 가득했다. 특히 똥물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발이 하이힐이다. 콜레라, 페스트 같은 질병도 성행했다. 19세기 초 파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의 파리와는 전혀 다른 도시였다.

프랑스의 상하수도는 오스만의 파리 도시 근대화 산업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3세는 외젠 오스만을 파리의 시장으로 임명하여 파리의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했다.(파리 도시 근대화사업기간:1853~1900년 초반) 오스만은 파리 도시 바닥을 대부분 드러내고, 하수도관부터 하나씩 정비했다. 또한 시위를 보다 효율적으로 막기 위해 도로로 정비했다.

우리가 보는 파리는 파리 도시 근대화사업의 결과다. 왼쪽이 근대화 사업전. 오른 후 사업 이후

우리가 보는 파리는 오스만이 시작한 파리 도시 근대화사업의 결과물이다. 오스만이 만든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은 화가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었다. 이 당시 프랑스 사회에 대한 묘사는 빅토르의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보면 된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 장발장이 똥물을 뒤집어가면서 하수구에서 나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이 당시의 파리의 모습이다. 도시가 바뀌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기 마련이다. 인상주의자들이 그린 파리의 사람들의 풍경들은 오스만이 시작한 파리 도시 근대화사업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은 100년 전에 만들어졌다.

루브르 박물관의 개관은 파리 시민들이 예술에 접근하는 장벽을 낮추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1793년 8월 10일, 537점의 회화를 전시하면서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루브르 박물관은 루브르 궁이었다. 그 당시 전시된 대부분 작품은 몰락한 왕족, 귀족, 성직자 수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루브르 건물 내부의 구조 문제로 인해 1796년에서 1801년까지 문을 닫았다. 이후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재위 기간 동안 소장품이 늘어나면서 규모가 커졌다.

루브르 박물관의 개관은 미술이 보다 사람들에게 다가가되는 계기가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탄생으로 파리 시민들은 미술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전만에도 미술은 오직 왕족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일반시민은 성당에서 볼 수 있는 게 거의 전부였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으로 인해 누구든지 미술 거장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화가 지망생들은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거장들의 작품을 보면서 화가의 꿈을 키울 수가 있었다. 또한 그들은 거장들이 그린 그림을 베끼면서 더더욱 화가의 꿈을 키워갔다. 물론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행사가 있었다. 바로 살롱전이었다.


살롱전. 화가로 인정받는 등용문이자 철옹성.


19세기 미술은 미술이 가장 크게 변한 시기였다. 19세기를 기점으로 미술은 ‘감각’을 다루는 영역으로 완전히 이동했다고 보아도 무관하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미술은 ‘감각’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서사’와 ‘묘사’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16 게기부터 19세기까지 프랑스 미술 왕립 아카데미가 주도한 유럽 미술의 변화는 생각 보니 크지는 않았다. 특히 19세기의 미술 기준을 이끈 건 살롱전이었다.

살롱전은 화가의 등용문이었다.

살롱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서양풍의 객실이나 응접실’, ’ 상류 가정의 객실에서 열리는 사교적인 집회. 특히 프랑스에서 유행하였다.’ ‘미술단체의 정기적인 미술작품 전시회’. 이 같은 사전적 정의처럼, 살롱전은 프랑스 왕립 미술아카데미에서 매년 개최하는 그림 전시회였다.

살롱전에 출품된 수많은 그림들. 출처: 위키디피아

살롱전은 1737년 왕립 미술학교의 졸업식으로 시작했다. 살롱전은 매우 인기가 많았다. 많은 사교계의 사람들이 살롱전을 찾았다. 당연히 프랑스 내 모든 화가들은 살롱전에 입선하고 싶어 했다. 살롱전은 소위 인싸로 가는 문이었다. 우선 살롱전에서 상이나 입선을 하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수많은 미술작품 제작 주문과 높은 가격으로 자신의 미술작품을 팔 수 있었다. 또한 당시에는 미술작품을 사거나 볼 수 있는 곳은 살롱전이 유일했다. 살롱전만이 유일한 미술상품진열대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살롱전은 매년 5000점 이상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좋은 위치에 그림을 놓으려는 화가들의 경쟁도 치열했다.

dafanch99_763610_2.jpg
dafanch99_763616_2.jpg

루브르 박물관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수많은 사람들이 더욱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살롱전에는 왕립 아카데미에서 강조하는 그림만이 인정을 받았다. 오디션의 기원을 찾아본다면? 아마도 살롱전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할 수 도 있다.

바카벨-판도라.jpg
부게르-비너스의 탄생.jpg
바카렐이 그린 '판도라'와 부게르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 살롱전이 추구한 그림은 대체로 이런 그림들이었다. 출처: 위키디피아.

살롱전에 입상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 했다. 오디션에서 심사위원들을 통과해야 하듯 살롱전도 마찬가지였다. 살롱전을 이끄는 기준은 ‘심사위원들의 취향’이었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심사위원들이 싫어한다면? 살롱전에 입선할 수가 없었다. 심사위원들의 취향은 ‘전통회화’를 고수하는 아카데미파 화가들이 대다수였다. 대표적인 심사위원으로는 살롱전에서 대상을 받은 알렉산드르 카바레, 윌리엄 부게르가 있었다.

460px-Nicolas_Poussin_078.jpg
1920px-L%27Enl%C3%A8vement_des_Sabines_%E2%80%93_Nicolas_Poussin_%E2%80%93_Mus%C3%A9e_du_Louvre%2C_INV_7290_%E2%80%93_Q3110586.jpg
니콜라 푸생이 정립한 고전미술은 그 당시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의 중심이었다. 출처: 위키디피아.

심사위원들의 취향이자, 기준은 니콜라 푸생(1594~1665)의 말로 정의할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 그 전개 방식이 전쟁, 영웅적인 행동, 종교적인 테마야 한다. 그리고 다른 비천한 주제는 피해야 한다. 일상의 묘사'에 치중하는 화가들은 그들의 열등한 재능을 하급 주제를 통해서 합리화하는 것이다."이러한 큰 흐름 아래 16-19세기까지의 미술은 푸생이 말한 주제만을 ‘미술’로 여겼다. 입체적인 묘사. 뚜렷한 윤곽선, 역사적인 그림 혹은 신화적인 누드화. 이것만이 19세기까지 인정받은 아름다움이었다.

Jacques-Louis_David_-_Consecration_of_the_Emperor_Napoleon_I_and_Coronation_of_the_Empress_Josephine).JPG
Napoleon4.jpg
고전주의 미술은,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을 찬양하기 위한 선전도구로도 활용되었다. 출처: 위키디피아.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프랑스의 지배계급은 왕과 귀족에서 부르주아 계급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미술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미술을 후원하는 이들이 왕과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바뀌었을 뿐이다. 오히려 부르주아 계급들은 과거 고전주의 미술을 ‘혁명’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오히려 프랑스 아카데미가 주도하던 미술은 혁명을 거치면서 더 견고해졌을 뿐이다. 아카데미는 자신들의 기준에 충족하는 이들만을 살롱전에 입상시켰으며, 살롱전에서 입상한 화가들이 다시 살롱전 심사위원이 되면서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미술은 철옹성으로 변했다.

살롱전의 심사위원이었던 알렉산더 카바넬이 그린 '비너스의 탄생'. 그림의 묘사 수준만 달라졌을 뿐, 16세기와 19세기의 미술은 본질적으로 거의 같았다. 출처: 위키디피아.

이같이 살롱전의 심사위원들이 생각하는 ‘미술 기준’은 심사위원들만이 추구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살롱전은 프랑스 사람들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인기 만점이었다. 살롱전에 입선하거나 대상을 받는 작품들은 그 시대의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었다. 살롱전에 입상하는 이들을 ‘트렌드세터’와 마찬가지였다. 사람들도 당연하게 그 살롱전이 알려주는 ‘아름다움’만이 유일한 아름다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살롱전의 심사위원들의 힘은 막강했다. 단순하게 심사위원들만의 개인적인 취향이 결코 아니었다.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가 주도한 미술. 우리는 그들이 추구한 미술만이 받아들여지던 시점에서 '인상주의'를 바라봐야 한다.

인상주의자들은 이러한 미술 흐름을 알면서도 ‘일상의 묘사’와 개인 감각에 집중한 그림을 그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을 보고 그들을 비웃거나 조롱한 건 그들을 ‘미워’해서가 아니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비친 인상주의자들은 ‘스스로 열등함 증명하는 모습. 열등한 바보임을 자인하는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열등한 화가요’라고 하는 이들. 수많은 사람들과 평론가들이 인상주의자들을 ‘비웃는’ 이유는 지극히 당연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