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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을전하는남자 Feb 16. 2022

감각은 자신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시작한다.

오노레 도미에. 감각은 자신이 표현에서 시작한다.

[이번 글에서는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와 이와 연결되는 기업들의 '브랜딩'까지 살펴봅니다. 분량 조절에 실패해서 글을 3,4개로 쪼개려고 합니다.]


19세기 사실주의 회화는 아카데믹한 미술과 도덕적인 이상에 반대하면서 등장했다. 그 당시 살롱전으로 대표되던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는 오직 그들만의 리그였다. 앞선 글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살롱전은 신화, 종교, 역사화를 포함한 낭만주의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주제를 그린 그림들. 혹은 장엄한 주제만 중시했다. 그들은 항상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신봉했다. 그들에게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그들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19세기 파리는 도시화를 거치며 자본가와 노동자로 계층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에 따른 각종 노동자들의 시위도 발생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사실주의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시대상을 반영한 구체적인 일상을 그렸다. 또한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가 쳐다보지 않은 주제. 사회에 대한 비판과 도전적인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솔직한 ‘시선’에 집중했다. 이 같은 그들의 시도는 미술이 다루는 주제를 일상적인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무엇보다 조악하다고 평가되는 그들의 그림은 그 ‘조악함’을 통해 더더욱 힘을 얻었다. 인상주의가 나올 수 있던 배경도 사실주의자들이 영향이 적지 않다. 사실주의 운동에는 신비주의적 경향인 가졌던 장 프랑수아 밀레, 신랄한 풍자 만화가이자 동시에 사회의 최하층 계급을 묘사한 오노레 도미에, 구스타프 쿠르베를 뽑을 수 있다. 이들은 노동자 계급,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그렸다.

19세기 프랑스는 조르주 오스망이 시작한 파리 정비사업을 통해 더욱 근대화된 도시로 변했다.

19세기 프랑스는 산업화와 함께 중산층이 유럽 내 어느 나라보다 부유했다. 특히 파리는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가스등, 자동차, 도로를 비롯해 도시화와 산업화가 만든 결과물을 파리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동시에 계층 분화도 심해졌다. 당연히 거주지는 나누어지고, 공간도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특히 유흥가가 번성했다. 물랑 루주는 그것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19세기 프랑스의 모습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위키디피아

파리에서 활동한 사실주의 작가들은 이러한 파리의 모습을 그렸다. 일상적이면서도 세속적인 파리.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파리. 동시에 그 당시 자본주의로 인한 문제들. 도시 빈민화, 계층 분화, 슬럼가 형성 등 사회를 비판하는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다. 사실주의 이후 등장한 인상주의자들도 이와 같은 주제를 그렸다. 하지만 에두아르 마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개인 감각에 집중해 그림을 그렸다. 사실주의 작가 중 일찍부터 주목받은 사람은 오노레 도미에(1808~1879)다. 도미에는 프랑스에서 일러스트레이터(삽화가)였다. 그는 신문이나 잡지 등의 매체에 석판화를 이용한 삽화를 많이 그렸다.'

도미에는 평판화를 통해 당시 사회의문제를 풍자했다. 출처: 위키디피아.

도미에는 넘치는 위트와 재치를 기반으로 신랄하게  사회를 비평했다. 특히 그는 ‘문구와 이미지’를 결합시킨 후, 특유의 기발함으로 이야기를 전달했다. 무엇보다도 도미에는 삽화를 그렸기에 함축적이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데 능숙했다. 이러한 도미에의 작업 중에서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은 작은 크기의 흑백 석판화인 ’ 트랑스노랭거리(1834)’다.

오노레 도미에의 대표적인 판화인 '트랑스노랭거리.'

1834년 리옹에서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있었다. 정부의 강압적인 시위 진압으로 100여 명이 사망했다. 그 후 이어진 파리에서의 연대 시위로 10여 명의 노동자들이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으며, 그들의 시신은 거리와 집에서 발견되었다. 이 작품은 이 시위로 진압된 한 사람을 그렸다.

1834년 리옹에서 발생한 노동자들의 시위는 트랑스노랭거리의 배경이다. 출처: 위키디피아.

이 작품을 보자. 전혀 뜻하지 않은 순간에 죽음을 맞이한 것을 알려주듯 방 안 침대보는 흐트러져 있다. 의자는 내 뒹굴고 있다. 흑백 화면 안에는 피의 혼적이 보이지 않는다. 엉뚱해 보이는 시신의 배치, 잠자리에서 떨어진 듯한 시체는 ‘끔찍함’과 ‘우스꽝스러움’ 느낌을 동시에 연출한다. 정치적으로 희생된 노동자들의 비참한 최후를 표현한 이 작품은 주검 자체의 실상을 매우 차분하게 담아내고 있다. 구도는 그림을 대각선으로 나누면서 마치 신문에 난 사건 사진과도 같이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극적으로 현장을 재현하고 있다.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 다비는 혁명지도자였던 장폴마라의 죽음을 숭고하게 그렸다. 출처: 위키디피아.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가 다루던 그림에서 죽음은 신화 속 인물, 종교지도자, 순교자, 또는 역사상의 중요한 인물들을 위한 주제였다. 대부분의 그림들은 이들의 죽음을 성스럽게 그렸다. 프랑스왕립아카데미느,ㄴ언제나 ‘죽음’을 초월한 이야기로 묘사했다. 대표적인 그림은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 그들에게 '죽음'은 바로 그들의 존재를 대변하는 상징이었다.

도미에가 그린 판화에서는 죽은사람인가? 자고있나? 그 구분이 모호하다. 죽음에 대한 '숭고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출처: 위키피아.

이와 달리, 도미에가 이 판화에서 묘사한 ‘죽음’은 그 당시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죽음’과는 전혀 다르다. 도미에가 그린 죽음은 차분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도미에가 묘사한 죽음은 초라했다. 이름 없는 빈민들. 그들의 죽음을 둘러싼 표현은 더 이상 아름답거나 이상적이지도 않았다. 이 판화에는 종교적 승화, 영웅화, 경건과 애도도 없다. 오직 죽은 이들의 물적, 구체적 주검만이 남아 있다. 교훈, 종교, 영웅과는 더더욱 관계가 없다. 도미에는 이를 통해 ‘죽음’ 그 자체를 전하는데 집중했다.

도미에는 3등 열차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이는 살롱전에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주제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외에도 도미에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3등 열차’다. 이 그림은 그가 노년기에 그린 작품이다. 그는 ‘3등 열차’에서 힘든 일과에 지친 노동자와 농민 계층의 귀갓길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이 그림에서 열차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다. 공간 구성이 분명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복잡한 구도는‘3등 열차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 들안에 흐르는 따뜻한 정서를 느낄 숫 있다. 도시에서의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파와 소년. 갓난아이와 엄마는 모두 노동에 합당하지 않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짧은 휴식에 만족한 모습이다. 스냅숏처럼 잡아낸 ‘3등 칸의 정경’ 은근 당시 사회의 한 단면을 실감 있게 드러낸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인간을 향한 도미에의 따뜻한 마음과 그들과의 공감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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