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은 관점으로, 관점은 제안으로 이어진다.
구스타브 쿠르베는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기법과 기술을독학으로 연마했다. 수많은 거장들의 그림속에서 쿠르베는 17세기 미술에 유독 마음이 끌렸다. 1842년과 1855년 사이에 그가 그린 20점이 넘는 자화상을 살펴보면 17세기의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그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많은 화가들이 모델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자화상을 그렸다. 자기 자신이 멋져서 자화상을 그린 게 아니다. 비용절감을 위해서였다. 바로크 미술의 대가인 렘브란트가 대표적이다. 쿠르베는 본인 얼굴로 다양한 감정들을 표현하며 자화상에 그렸다. 그는 자화상을 그리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배운 방법들을 실험했다. 특히 인물화의 대가였던 티치아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기에 스스로 "정체성에 대한 독립된 감각"을 더해갔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다른 화가들처럼 쿠르베도 종종 캔버스를 재사용했다.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사한 작품들은 전시보다 ‘연습’을 위한 것이었다.
쿠르베는 티치아노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티치아노가 그린 <장갑을 든 남자>를 보자. 쿠르베는 티치아노가 그린 기품. 그 기품에서 그림자와 빛의 명암이 만드는 극적 분위기를 배웠다. 특히 쿠르베는 이 그림을 기반으로 자신과 닮은 근대인의 초상화를 그리고자 했다. 쿠르베는 이처럼 루브르에서 자신만의 감각을 연마했다. 동시에 그는 그러한 감각을 기반으로 프랑스 사회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게 사용했다.
쿠르베는 미술을 루브르 박물관에서 습작하면서 배웠지만 그는 정치적 성향이 매우 강했다. 자신의 이념을 미술을 통해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시골 출신이었으며,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계급 간 갈등. 시민들이 겪어야 했던 그 당시의 시대변화를 그림 소재로 삼았다. 특히 그는 작품에서 부르주아 계급을 주로 표현했다. 자연스럽게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과거 회화가 제시하는 아름다음과 권위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비평가들은 쿠르베가 보여주는 그림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관객들도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그린 작품 중에서 유명한 작품들을 살펴보자. 그는 ’ 돌깨는 사람들’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모두 가렸다. 우리는 그림에서 오직 돌을 깨는 ‘사람’들만 볼 수 있다. 그는 얼굴을 가림으로써 익명성과 함께 암울한 노동 현장을 묘사했다. 그가 주목한 건 사람이 아니었다. 기계처럼 일하는 사람. 노동환경이었다. 자신이 본 그 당시 모습을 ‘사실’대로 그렸다. 이 같은 부분은 도미에가 판화에서 보여준 시체의 모습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 당시 그림이 추구하는 방향을 고려한다면? 쿠르베의 그림. 그의 감각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을지 모른다.
쿠르베는 농민이나 노동자처럼 예술작품에 자주 등장하지 않던 소외된 계급의 현실을 그렸다. 또한 이를 위해 거대한 크기의 캔버스를 선택해 역사화가 추구한 권위를 정면으로 도전하기도 했다. 그는 하위문화와 소외된 계층들을 다루는 대중적인 주제를 그림으로 그렸으며, 이를 통해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가 주도한 ‘미술의 배타성’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비판했다. 무엇보다 쿠르베는 ‘고급문화로서의 미술’을 처음으로 강하게 도전했다. 이는 우리가 지금 접하는 미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19세기만 해도 미술은 상위 문화의 정수였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접하는 예술은 ‘상위 문화’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시대의 예술은 ‘메시지’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거대한 캔버스로 그린 그림으로 단연코 유명한 그림은 ‘오르낭의 매장’이다. 쿠르베는 이 그림에서 인물 배치를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황제와 조세핀 황제비의 대관식’ 조세핀의 즉위식을 연상케 한다.‘오르낭의 매장’은 고전 미술 방식을 가장 많이 쓰는 구도를 사용했으나, 의도적으로 화면을 단조롭고 평평하게 구성했다. 또한 그림 안에서 사람들을 다소 빽빽하게 배치해 그림 자체가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인물들의 표정도 무심하다. 누군가의 장례식이지만 그림 안에서의 분명한 주제와 시선도 없다. 일렬로 나열된 사람들. 시골 인물들에게서 보이는 일상생활의 옷차림. 진지하지 못한 태도, 평평하고 단조로운 구도 장례식을 묘사하는데 그쳤다. 구도상에 초점도 강조하는 부분도 없다. 매우 무미건조한 그림이다. 특히 그림에 등장한 강아지는 매우 낯설 뿐만 아니라,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쿠르베는 이 그림에서 장례식장을 감정을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한 공간으로 그렸다. 이는 그 당시 ‘죽음’을 주제로 한 그림이 접근하는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그 당시 미술에서‘죽음과 장례’는 중요한 인물의 기록화라고 보아도 무관했다. 특히 그림에서 ‘죽음’을 다룰 때 그림은 죽음을 맞이한 인물을 영웅화시킨다. 혹은 안식의 메시지를 전한다.’ 메멘토 모리’라는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메시지. 이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전하는 메시지이면서도, 그림 속 주인공이 쌓은 업적과 죽음을 기리는 일이기도 했다.
쿠르베의 작품에선 그런 게 없다. 당연히 이 그림은 ‘죽음’을 무시하는 태도로 보였다. 이 작품은 1850~1851년에 걸쳐 브장송, 디종, 파리에서 전시되었다. 당연히 작품에는 격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그림의 거의 모든 내용을 지적하면서 신랄하게 공격했다. 그림 속 요소, 주제, 이야기 전달 방식은 당시 비평가와 관객 모두에게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이 작품이 비평가와 관객들을 가장 크게 불편하게 한 결정적인 이유는 거대한 크기였다.’ 오르낭의 매장'의 크기는 ‘315x668cm’이다. 현재 ‘오르낭의 매장'은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정말로 거대하다. 그 당시, 이 정도 크기는 그 당시 역사화에만 사용되었다. 1850년대, 프랑스 아카데미 체제하에서 살롱전을 비롯한 미술대전에서는 주제들 간 서열이 있었다. [주제로 그림 간 '서열'을 나눈다는 생각 자체가 매우 폐쇄적이라는 증거다.] 특히 신고전주의가 강세를 보인 18세기 말부터는 ’ 고대 역사’를 소재로 한 역사화가 단연 최상위를 지켰다. 그 뒤로 인물화, 동물화, 정물화, 풍경화였다. 중요한 것은 살롱전에서 대상을 받기 위해서는 주제는 대체로 역사화였다.
쿠르베가 그린 ‘오르낭의 매장’은 장엄한 역사화에 해당하는 크기였다. 하지만 쿠르베 그림의 내용은 농촌의 ‘어수선한’ 장례식이었다. 역사화가 아니었다. 아름답지도 장엄하지도 않은 그림. 이러한 그림에 역사화에나 통용되는 거대한 캔버스를 사용한다? 많은 비평가들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마네가 올랭피아로 부르주아의 위선을 다루었다면? 쿠르베는 그림 주제와 크기로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미술 ‘기준’ 그 자체를 풍자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오르낭의 매장’ 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애매한 범위에 속한 그림이었다. 장르화 혹은 풍속화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 개인이 그린 기록이 거대한 작품으로 거의 제작된 적은 없다. 역사화의 스케일에 담긴 한 시골 촌부의 장례식 모습. 보는 이들에게 상당히 아찔한 일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림에 등장한 인물들은 ‘오르낭’이라는 작은 마을의 주민들. 농촌에 실재하는 일종의 중상층 또는 부르주아 들이었다. ’ 돌깨는 사람’들에서 묘사한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산업화 이후, 프랑스 농촌에도 상당한 자본을 소유하게 된 부르주아들이 이미 등장했다. 그들은 도시 부르주아들에게 낯설고 불쾌했다. 특히 지역을 불문하고 생성된 자본주의 계층은 파리를 비롯한 도시 부르주아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했다. '특정 계층'을 '특정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이해하던 도시 부르주아의 특권의식은 농촌에도 있는 부르주아를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스스로를 문화를 형성한 일종의 ‘엘리트’ 그룹으로 스스로를 여겼기 때문이다. 마네가 올랭피아를 그렸을 때도 파리의 부르주아 계급이 분노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마네는 엘리트 그룹을 자청하는 그들의 위선을 묘사했으니까.
파리를 중심으로 빠르게 형성된 쿠르베 작품은 당시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주제들. 천박하다고 여긴 주제를 매우 직설적으로 그렸다. 무엇보다 쿠르베는 고전적인 그림으로 뒤틀었다. 이처럼 불쾌하거나 음란하기까지 한 주제를 다룬 쿠르베 그림들. 그가 그린 어둡고 무거운 회화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이상에 부합하지 못했다. 당연히 비평가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쿠르베는 그림만 그리지 않았다. 스스로 그림을 알렸다.
1855년은 프랑스 사실주의 회화에 있어서 의미 있는 숫자다. 현대미술의 진정한 주춧돌이 놓인 해라 고도할 수 있다. 그해, 쿠스타브 쿠르베는 파리 살롱 전에 반대하는 ‘사실주의관’이라는 전시관을 만들어 공식 전람회에서 거부당한 작품들을 전시했다. 에두아르 마네가 한 개인 전시회보다 더 앞선 시도였다. 정확하게는 쿠르베가 처음. 마네가 두 번째였다. 당연히 ‘사실주의관'의 그림은 살롱전이 추구한 주제들. 앞선 글에서 말한 역사, 신화, 신화가 가미된 누드화는 당시 시대 발전과는 거리가 있었다.
개인 감각에 주목한 인상주의와 다르게, 사실주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에 중심을 두었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이 경향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에 어떠한 명칭도 붙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당시 말한 '사실주의'는 미술에서 현실을 충실하 게 재현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나 쿠르베는 단순한 외적 모방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현실의 모든 측면’을 드러내고자 했다.
인상주의와 사실주의는 그림만 보면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두 미술사조 모두 ‘개인의 감각’에 근거해 사회를 해석한다는 점. 이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훗날 후배 화가들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이런 면에서 이 두 가지 미술은 ‘제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개인의 감각에서 시작한다’는 라이프스타일 기획의 기저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예술이란 결코 삶에서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점. ‘감각’을 발현하는 시작점이라는 면에서 라이프스타일과 브랜딩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