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만큼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든 예술이다.
요즘은 매달 좋은 전시회들이 많이 열령ㅅ. 하지만 여전히 전시회에 가면 낯선 게 있어요. 저는 늘 생각했죠. ‘일상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예술은 무엇일까?’ 어느 날 집에서 따뜻한 물을 끓여서 마시려고 하는데요. 도자기 컵. 늘 물을 마시던 그 도자기 컵이 보이더군요. 그제야 생각났어요. 도자기. 도자기만큼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들어있는 예술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죠. 도자기가 너무 익숙하다 보니 사실 잘 인지 못하고 있던 거죠. 익숙하면 무뎌진다는 말. 도자기에도 마찬가지인 셈이죠.
도자기는 항상 커트러리와 함께 사용합니다. 카페나 식당에 가면 포크와 나이프를 꼭 도자기 그릇과 같이 주잖아요. 커트러리라고 하면? 보통 포크, 나이프, 스푼이죠. 근데 금속공예예요. 한국 같은 경우, 수저와 젓가락이 커트러리에 추가적으로 들어가죠. 우리는 도자기와 커트러리가 익숙하다 보니 보니 알면서도 까먹는 거예요. 그 안에 들어간 기술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되었다는 걸 말이죠.
종종 집에서 차를 내려마십니다. 집에 다기세트가 있으니까요. 도쿄 취재를 가면 반드시 마리아주 프레르에서 마르코 폴로를 사 오죠. 차를 내린 후에는 곁들일 음식을 제 나름대로 도자기 그릇에 놓습니다. 저는 피에르 에르메의 인스타그램을 하루에 한 번씩 들어가요. 디저트 플레이팅이 정말 감각적이거든요. 광주요 홈페이지도 수시로 들어가서 각종 그릇들을 살펴보죠. 그릇은 그냥 보는 일만으로 좋더라고요. 제가 아는 지인은 다도를 정말 좋아하는데요. 그 지인 인스타그램에는 차[tea]에 대한 포스팅이 가득합니다. 그걸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로 그릇, 차. 다도 등을 찾아보게 됩니다. 다도를 찾다 보면 ‘구움 과자’들도 같이 나와요. 구움 과자가 놓인 그릇? 당연히 도자기예요. 제가 제일 먹고 싶은 구움 과자는 메종 엠오의 마들렌인데요. 나중에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같이 먹으려고 일부로 안 가고 있죠.
도자기는 단순히 그릇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에요. 너무 익숙하니까요. 오늘 아침식사에 사용한 그릇도 전부 도자기죠. 그런데 도자기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만 봐도 이야기가 달라요. 우리가 모르는 게 정말 많다는 걸 알 수 있죠.
메디치 가문이 1529년 지오반니 벨리니에게 주문한 [신들의 향연] 그림을 봅시다. 재밌는 걸 볼 수 있어요. 그림 안에서 청화백자가 나옵니다. 그림 속 청화백자는 명나라에서 실크로드를 통해 피렌체로 수입되었죠. 그 당시 청화백자는 유럽인들에게는 사치품이었죠. 명나라에서 먼 길을 건너오기 때문에 당연히 비쌌죠. 반대로 청화백자를 비롯한 자기는 중국에서는 일상에서 쉽게 사용하는 제품이었죠.
지난 몇 개의 글에서 저는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그 이후 파생된 예술사조들은‘개인 감각’을 구현하고 표현하는 방향으로 후대 예술가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했어요. 이와 다르게 도자기는 무역, 정치상황, 기술발전 등. 대내외적인 요인들이 많았죠. 하지만 도자기는 ‘1300도’라는 고온으로 구울 수 있는 도자기 제작환경이 제일 중요해요. 이를 위해 흙과 땔감이 가장 중요했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도자기의 핵심은 좋은 흙과 땔감이 준비된 ’ 불기 술’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회화와 다르게 도자기는 ‘기술’적인 부분에 가깝습니다.
중동지역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한 흙과 땔감이 모두 부족했습니다.
중동지역 같은 경우 자토, 도토보다는 모래가 풍부했죠. 그렇기에 자기 기술이 ’ 유리’ 기술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및 한국과 일본을 통칭하는 극동아시아 지역은 도자기 제작에 필요한 흙(자토, 도토)과 땔감이 매우 풍부했죠. 특히 중국은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이 그 어떤 지역보다 풍부했습니다. 도자기 제작에 쓰이는 흙은 그냥 흙으로 만들 수 없었으니까요. [석영, 장석, 점토]이 세 가지의 비율이 좋아야 했죠. 특히 백자 같은 경우 중국 경덕진에서 만들어진 제품이 단연 최고였는데요. 경덕진은 백자를 만드는데 필요한 최고의 고령토를 가지고 있었죠.
다음은 땔감입니다. 땔감은 가마 온도를 올리기 위해 필요했죠. 중동지역에서 자기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땔감 이 부족했기 때문이죠. 모래가 많은 사막지역에 풍부한 나무는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나무가 적은 중동지역은 야외에서 불을 피우는 ‘노천소성’이라는 방식으로 그릇을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쉽게도 노천소성 방식으로 올릴 수 있는 온도는 600~800도가 한계예요. 이 온도에 구운 도기는 도토로 도기를 만들어 굽는다고 해도 물에 쉽게 풀어졌죠. 중동지역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리가루를 사용했죠. 방법은 간단했어요. 도토로 만든 그릇에 유악을 바른 후 유리가루를 뿌리기도 했죠. 하지만 중동지역은 아무리 노력해도 [800-1100도]가 한계였죠. 물론 800-1000도는 600도보다 도기를 단단하게 만들 수 있었죠. 하지만 이 온도에서는 유약이 제대로 반응도 하지 않았죠.
자기가 되려면 자토로 만든 그릇을 1100-1250도에서 구워야 합니다. 이 온도는 [도기에서 자기로 넘어가는] 온도였어요. 이 온도가 되면 도기에 바른 유약이 반응하면서 흙의 성분이 달라지죠. 도토는 이 온도에서 무너져요. 자토는 청자가 됩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죠. 우리가 지금 집에서 사용하는 백자는 [1250-1300도]에서 굽습니다. 이 온도는 가장 고난도의 ’ 불’ 기술에요. 고령토로 만드는 백자가 완성되는 온도이기도 하죠. 이 온도는 오로지 백자를 위한 온도라고 보면 됩니다.
백자를 비롯한 자기를 굽기 위해서는 막대한 나무가 필요합니다. 조선은 자기를 생산하기 위해 이천과 광주 일대에 국가가 관장하는 시설인 ‘관요’를 만들었죠. 하지만 막대한 나무를 수급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죠. 이를 위해 조선왕조는 ‘관요’를 수시로 옮기면서 만들었어요. 나무 때문이었죠. 조선은 ‘관요'를 만들고 난 뒤, 다음 ‘관요’를 미리 선정했어요. 그리고 다음 ’ 관요’ 근처에 ‘나무’를 심었죠.
도자기는 중국에서 거의 독점에 가깝게 생산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어요.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가진 곳이 중국이었으니까요. 또한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 송나라의 몰락. 원나라를 통해 발전한 백자. 명나라의 쇠퇴와 임진왜란 등. 동북아시아의 급격한 판도 변화는 도자기 제작의 주도권이 일본으로 넘어갑니다. 일본이 도자기를 만들 수 있던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도공들을 포로로 데려갔기 때문이죠.
일본 도자기가 유럽에 알려진 건, 명나라가 여진족과 전쟁이 발생하면서 중국 도자기의 공급이 막혀버린 탓이 큽니다. 나가사키에 있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일본의 아리타 자기를 중국 도자기의 대체품으로 유럽시장에 유통하기 시작하죠. 명나라와 청나라가 전쟁을 하는 동안 유럽에는 일본 자기가 유통되죠. 명나라가 전쟁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중국 독점체 재가 깨지죠. 청나라가 들어선 뒤, 중국은 다시 도자기를 수출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품질이 과거만큼 좋지 못했죠. 과거 중국이 독점했던 체계는 자연스럽게 도자기는 [중국-일본] 체제로 바뀌죠. 이 과정에서 일본의 다양한 문화들이 유럽에 전파되어 자포니즘의 기반이 됩니다.
하지만 1708년 독일의 작센의 선제후이자, 폴란드 왕인 아우구스투스 2세는 연금술사인 베트거를 통해 유럽에서 최초로 도자기를 만드는 데 성공하고, 1710년 왕립 자기 공장을 성립했죠. 바로 마이센 자기였죠. 그 이후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독자적으로 도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유럽에서 생산된 자기들은 초창기 일본과 중국 자기의 모조품으로 시작했죠. 점차 도자기 시장은 일본과 중국 중심을 벗어났죠.
대항해시대를 지나면서 유럽에는 초콜릿, 커피 같은 식재료들이 유럽으로 유입되었습니다. 커피를 도자기에 내려먹는 문화가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만들어졌죠. 이는 지금의 브런치 문화로 발전했습니다. 카페가 생겨나면서, 귀족들만이 점유하던 문화들은 점차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기 시작했죠. 이러한 문화는 지금 우리가 자연스럽게 즐기는 식문화로 정착했죠.
벽에 걸어놓는 회화는 세월이 지나도 닳지 않습니다. 반면에 도자기 그릇은 대량생산에 오래 쓰면 이가 나가죠. 실수로 떨어뜨려서 깨지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 도자기는 라이프스타일 인프라에 들어가다 보니 ‘예술’이라고 상대적으로 덜 느낀다고 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