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죽기까지 10km

by 밍기

10km 전

-살아갈 기회가 있어 감사했다.

-눈물이 난다.

-기쁘다. 내 죽음 또한 이렇게 기쁘기를.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

-후회도 뻘 짓도 다 버려두고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남은 당신들의 삶에 축복이 가득하길, 고난이 가득한 길을 당신만의 방법으로 살아내길.

-배낭에 달려있던 침낭 끈이 찢어졌다. 걱정 마. 내가 끝까지 안고 가줄게.

-아등바등 살았던 모든 순간을 내려놓는다. 내 모든 순간을 채운 지독한 강박에도 찬란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소용없다.

-하늘이 너무 맑다.

-이 세상을 살아보게 하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나보다 먼저 길을 걸었던 사람들도 모두 이 끝을 바라봤겠지.


5km 전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곧 신의 온전한 보호가 이뤄질 것이다.

-너무 많이 남은 것 같이 보였던 길도 돌아보니 정말 짧았다. 표지판에 남은 거리를 표시해 주는 숫자들, 당시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지만 지나고 보니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다.

-조금만 쉬어 가자.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걸어왔잖아.

-끝을 향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혼자서 끝을 향해 걷지만 나 혼자는 아닌 길. 외롭지 않다.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동상이 보인다. 이제 나도 저들처럼 쉴 거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발목이 너무 아프다.


4km 전

-절뚝거리며 걷는 내 행위가 최고의 찬송이다.

-심지까지 불태운 초. 일말의 후회도 아쉬움도 없다. 그저 지금까지 불을 꺼트리지 않고 끝까지 태울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그리운 곳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어쩌면 시작과 끝은 같은 것일지도.

-나는 늘 혼자였지만 늘 신과 함께 있었다.

-한 발 떨어져 보면 내가 걸어온 길은 꽤 멋있는 길이었다. 나는 꽤 좋은 사람이었다. 그걸 너무 늦게 알았구나.

-울면서 웃을 수 있는 순간. 아, 좋았다.


3km 전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직 이 길은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온전히 걷자. 침낭을 다시 배낭에 묶었다.

-조금만 쉬었다 가자.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없다. 아, 다 나눠주고 왔구나.

-나를 스쳐간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당신들은 모두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나는 그런 당신들을 얼마나 신실하게 섬겼었나.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겠다. 그게 완벽했던 내 길에 대한 존중인 걸 이제서야 알겠다.

-내 삶에 들어와 준 당신에게 감사한다. 당신들이 나의 삶을 완성시켜 주었다.

-내 삶을 망쳐 놓은 당신은 용서하지 않는다. 끝을 목전에 둔 나에게 당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용서할 가치조차 없다.

-아, 그저 주어진 내 삶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얼마나 멋진 선물이었나.


2km 전

-끝이 보인다. 작게 보이던 끝이 점점 내게 다가온다.

-내가 이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니었다. 끝이 나를 길로 인도한 것이다. 아, 나는 그저, 순리대로 이끌려 왔던 것이구나.

-이제 끝이다. 더 노력할 수도 성장할 수도 없다. 더 이상 내게 어떠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끝났다.

-하나님 저를 받아주세요

-세상은 아름답다. 나는 내게 주어진 아름다운 세상을 나의 방식대로 살아왔다. 아쉽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성탑 바로 앞 골목길에 들어서자 성탑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 골목길이 끝나면 마침내 끝이 보이리라.

-이 삶이 끝나는 게 아쉽지만 나는 죽음의 그 순간을 기대한다.

-하나님을 뵈면 뭐라고 말할까.

-한 번밖에 없는 끝을 나는 오랫동안 기다렸다.


1km 전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다.

-이 골목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조금 더 걷고 싶다. 나는 조금 더 살고 싶다.

-이 골목길이 마지막일 것 같다. 한 번만 더 쉬었다 갈까. 아니다. 끝을 잠시 미루는 데 무슨 의미가 있으랴.

-좀 더 힘내서! 씩씩하게! 절뚝거리지 않고! 곧게 걷자!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마지막 곡이다.

-끝났다.

-아, 나는 이곳을 알고 있었다.


0km

-하나님, 다녀왔습니다.


끝과 시작은 같은 것이다. 내 삶은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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