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로운 곳에서 눈을 떠 새로운 곳까지 걸어가야 하는 순례길의 삶은 안전한 거처를 두고 이미 정해진 일정을 반복해서 살아가는 삶과는 퍽 다르다. 처음 며칠은 온종일 걷고 밤늦게까지 글을 쓰는 게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순례길을 걷는 것도 하나의 삶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걷는 게 조금 적응되니 이제는 알겠다.
이 길을 걷는 것은 또 다른 삶이다.
이 길은 꽤 지치지만 힘들지 않은 삶이다. 빡빡하게 짜인 일상에서의 도피이자 매일 매 순간 다른 날씨와 다른 풍경을 보는 설렘이다. 혼자 걷는 이 길은 비교할 대상이 없어 경쟁도 없는 길이다. 몸이 힘드니 당장 내가 내딛는 한걸음에만 집중하게 된다. 내일 걸어야 할 길은 당장 내 눈앞에서 보이지도 않으므로 걱정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
이 길도 익숙해지니 점점 일상이 된다. 분명 오늘 걷는 길은 처음 걷는 길이지만 아침에 눈을 떠 해가 뜨지도 않은 8시에 짐을 싸고 나서야 하는 것은 똑같다. 분명 오늘 처음 묵는 알베르게지만 도착하자마자 뜨거운 물에 씻고 간단하게 옷을 빤 뒤 침낭 안에서 웅크려 잠을 청하는 건 똑같다. 새로운 요소가 수도 없이 많지만 이 또한 하나의 반복이 되어버려 새로운 ‘일상’이 되는 것이다.
이 ‘일상’에 매일 숙소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관계’까지 생겨버린다면 어쩌면 순례자의 길 또한 평소 내가 살아가던 일상과 다르지 않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너무 많은 순례자들과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다. 나는 일상에서 할 수 없는 생각을 하고, 일상에서 볼 수 없는 사실을 보고, 일상에서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여기에 온 것이니까.
아직 익숙함을 낯설게 또 낯섦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나는, 일상을 벗어나야 만날 수 있는 나를 만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낯선 상황에 던져 놓았다. 다리가 아픈 게 적응이 되고 매일 걷는 새로운 길이 익숙해지면 순례길이란 신성함에서 얻을 수 있던 영감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을 것 같다.
내가 걸어왔던 수많은 낯선 길들이 깊이 있는 나를 만들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