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수많은 시작과 끝을 경험했다. 입학과 졸업, 입대와 전역, 멕시코 교환학생의 시작과 끝, 수험 생활의 시작과 끝, 부서의 전입과 전출. 짧게는 연애의 시작과 끝이 있고 더 짧게는 여행의 시작과 끝도 있다. 하물며 하루도 해가 뜨며 시작하는 순간이 있고 잠이 들기 전 하루를 끝내는 순간이 있으니 시간 위를 걸어가는 모든 존재에겐 셀 수 없이 많은 시작과 끝이 있다.
나는 수많은 과정 중 끝에 좀 더 의미를 두는 편이다. 만족할 만큼 좋은 결과를 얻었는지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을 보기 위해 과정 속에서 보낸 시간들을 돌아보고 격려하는 건 좀 더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열심히 한 만큼 뭉클한 경우도 더 많다. 이땐 그랬지, 저 땐 저랬지 생각하며 그간 쏟아부은 내 시간과 노력에 대해 나름의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끝 중 가장 중요한 끝은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혹시 너무 감사하게도 죽음의 면전에서 삶을 돌아보면 정리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때까지 쌓아 올린 업적 중 무엇을 가장 높이 추억할까 생각해 봤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길기 때문에 어떤 순간을 최고의 순간으로 꼽을지 알 수 없지만, 이 길을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분명히 떠오를 것이다. 이렇게나 비일상적이고 자유로우며 새로운 자극들이 끝없이 몰아치는 순간은 앞으로 살 날 속에서도 흔하게 찾아오지 않을 거니까.
이렇듯 죽음의 면전에 있는 내가 지금을 꼭 돌아보게 될 것을 확신하니, 이를 이용해 그때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질문하고 싶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으며 그 과정은 어떤 후회도 없을 만큼 만족스러웠는지. 꽤 힘든 질문이지만, 죽음을 앞둔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이루었냐는 질문에 어떠한 결과물이라도 꺼내보여야 할 것이다.
다행히 죽기 전 내놓을 추억은 이미 확실하게 하나라도 챙겨뒀다. 당연히 지금이다.
밥벌이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이 순간의 유흥, 앞으로의 나를 옭아매기 위해서 던지는 질문, 나를 고민하고 내 앞의 삶을 그리는 치열한 사고, 절뚝거리는 다리와 물집이 터진 발로 걸어가는 순례길. 이 것들이 지금을 정의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을 더 찬란하고 과장되게 그릴 거다. 살아갈 내가 언제든지 지금을 돌아볼 때면, "적어도 죽기 전 내가 나에게 떳떳하게 내놓을 수 있는 추억은 하나 있다."라는 안도감이 들 수 있도록.
얻을 것은 별로 없지만 고생만 진탕 하면서 걷는 이 길이 언젠간 반드시 생각날 것이다. 이렇게 내 삶은 한층 더 다채로워지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