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세계 여행을 꿈꾸며 힘이 닿는 데까지 많이 다녔지만, 여전히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나도 많다. 시간이나 돈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지만 언젠가부터 여행에서 얻는 새로움이 예전만큼 특별하지도 않게 되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를 가보겠다는 의지는 점점 식었고, 스페인에 있으니 편하게 갈 수 있어도 웬만큼 흥미로운 게 없어서 방문하지 않는 유럽 나라도 많다. 세계지도를 펼쳐 내가 다녔던 곳을 표시해 보니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다녔지만, 지도에 아무런 표시도 되어있지 않은 나라가 더 많이 남아있다.
세상에는 193개 나라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나 많은 나라는 지도에 표시된 것처럼 그곳에 존재하겠지만, 내가 가보지 않은 이상 아무리 많은 나라가 그곳에 존재하더라도 내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물론 내게 의미가 없을 뿐 그곳에도 많은 삶과 더 많은 관계들이 있겠지만, 내가 보고 듣고 만지며 느껴보지 못했으니 내 세계 속에 그려진 지도 위에 그 나라들은 텅 빈 곳이다. 결국 내 이야기가 없는 곳은 내겐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내가 직접 들렸던 모든 곳은 내 생생한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낯선 피부색을 가진 사람을 봤을 때 느꼈던 신기함,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봤을 때 느꼈던 신성함, 배낭을 도둑맞았을 때의 좌절, 하늘에서 뛰어내릴 때 쿵쾅거리는 심장과 수심 100m에서 마주했던 바다, 오랜 친구를 여행지에서 만났을 때 반가움과 혼자 있을 때 외로움. 내가 들렸던 모든 나라와 각 도시에는 그때 그 순간의 생생한 내가 있었다. 내가 그곳에 있음으로써 내 세계에 텅 빈 지도를 추억으로 색칠할 수 있었다.
이미 스페인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많고 다양한 색깔로 칠한 나라지만, 순례길이라는 특별한 색으로 조금 더 꼼꼼히 칠을 하려고 한다. 그게 무슨 색인지는 이 길을 모두 걷기 전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절뚝거리며 진흙탕 길을 걸었던 추억은 일반적인 여행지와는 또 다른 채도와 색감으로 남겨질 것 같다.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던, 지도에만 있던 순례길에 내 추억을 칠하며 내 세계를 확장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