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트럼프 당선만 아니었어도
전부터 늘 절에 가서 하루 자고 싶었다.
가능하면 휴대폰도 압수하고 발우공양도 실시하는 엄격한 절에 가고 싶었다.
거기서 하루종일 초록 잎과 키 큰 나무들을 보며 모두 다 비우고 내려놓고 오고 싶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며 세시간 걸려 도착한 양평 용문사.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기로 유명한 곳이다. 서울에서 많이 멀지 않고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깔끔하게 운영하여 평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열심히 다른 사람의 블로그를 염탐하며 얻은 결론으로는, 용문사 템플스테이는 중용의 미가 돋보이는 곳이었다. 즉,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의 폰을 압수하거나 발우공양을 강요할 정도로 '빡세지는' 않으면서,
그렇다고 수행하러 온 사람들이 밤새 떠들고 노는 걸 방치할 정도로 관리가 소홀하지 않다는 의미다. 내가 원하던 곳이었다. 용문사 템플스테이는 아무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않고 그저 쉬기만 해도 되는 '휴식형' 과 몇 가지 프로그램에 참여를 해야 하는 '일반형' 두 종류가 있었는데, 나는 더 저렴한 '휴식형' 템플스테이를 신청했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용문까지 가는 길도 멀었지만, 용문사행 버스에서 내려 용문사까지 걷는 길은 더욱 멀게 느껴졌다. 패딩을 입은 몸에서 땀이 나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할 무렵에나 도착을 했다.
템플스테이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니 아무도 없다.
2시부터 접수인데, 2시 반에 도착했는데도.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이 절의 매력은 헐랭함이라는 걸.
한참 문 앞을 서성이다 다시 노크를 하니 마치 자다가 깬 듯 깜짝 놀란 듯한 젊은 스님이
"아......템플스테이 하러 오셨어요? 000씨?" 한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의 템플스테이 신청자는 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님은 주섬주섬 템플스테이 옷을 꺼내 주었다.
"사이즈가 어떻게 되시나요?"
"네, 제일 작은 거요."
"아.....제일 작은 거."
숙소 위치를 알려주고 A4 용지 안내지를 주며 어서 내가 사무실에서 나가길 바라는 듯한 스님에게
"그런데 저희 밥은 어디서 먹나요?" 라고 물었다.
스님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직 경내를 안 돌아보셨죠? 그럼 좀 있다 3시에 간단히 식당이랑 절 내부를 한번 소개해 드리죠."
내가 자게 될 '신심' 방은 크진 않았지만 깨끗했고 화장실이 딸려 있어 편리했다.
따끈따끈 난방이 들어오는 방 안에서 나는 3시를 기다리며...
폰 삼매경에 빠졌다.
디지털기기와 멀어지고 천년된 은행나무에게 간절한 소원을 빌고
그간 맺힌 마음들을 종이 위에 풀어내기 위해 이 먼 절을 찾았는데,
미국 대선 개표방송이 너무나 흥미진진해 눈을 뗄 수 없었다.
3시에 스님을 만나 간단히 대웅전과 은행나무와 공양간을 돌아보고 집에 돌아온 나는
다시 따끈따근한 온돌방에 누워 열심히,
당선이 확실해 보이는 트럼프 일가에 대한 가십 기사를 읽었고
힐러리 지지자들의 절규하는 포스팅을 읽으며 지구촌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온갖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하여 함께 시대의 비극을 유우머로 승화시키는 글들을 섭렵했다.
그러다 눈이 아파 문득 바라본 창가에서 빨간 단풍이 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아 나의 가을이 가고 있구나.
라고 잠시 상념에 잠긴 나는 곧 다시 흥미진진한 폰 속의 세계로 돌아갔다.
휴대폰은 정말 요물이다. 너무나 흥미진진한 정보들이 많아 도무지 눈을 뗄 수 없다.
폰을 보느라 다른 프로그램들은 참여하지 않았지만 공양만은 했다.
이틀간 일정 중 가장 시간을 지켜 열심히 참가한 것이 바로 공양이다.
이 절은 공양간조차 신식이었고 사찰 요리법을 지켰지만
나트륨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급식소 밥 같은 맛이 났다.
그런데도 산 속에서 좋은 공기만 마셔서 평소보다 밥맛이 좋았다.
식사를 한 뒤 조금 쉬다가 저녁예불에 참가했다.
일전에 청도 운문사의 새벽예불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그 추운 겨울 새벽잠을 포기하고 간 보람이 있을 정도로 깊이 감동했었다. 운문사 예불은 사실 여승들의 고운 소리로 독송하는 예불이 유명하지만, 나는 걸그룹의 군무에 열광하듯, 수십 명의 여승들이 칼같이 줄지어 옷깃을 여미고 입퇴장 하던 모습에 감동했다.
그런 광경을 기대하고 대웅전 문을 열었을 때, 내 눈에 보인 건 노스님 두 분이서 예불을 드리는 모습이었다. 사람이 많으면 군중 속에 파묻혀 대충 절하면 되는데 사람이 셋이니 너무 티가 나서 대충 절을 할 수가 없었다. 군기 든 신입처럼 열심히 절을 하고 나자 나무아미타불 독송이 이어졌는데 심지어 이 절은 나무아미타불을 한자버전이 아니라 한글버전으로 외웠다!
만약 새벽 예불도 이 정도 인원이면 오질 말아야지, 하고 있는데 예불이 끝난 후 한 스님이 내게 말했다.
"거 내일 새벽예불 올 거면 방석 그냥 두고 가고, 아니면 다시 저그 자리에 올려놓고 가."
"아 네, 내,내일은 쉬겠습니다."
"어 그래. 생각 잘 했어. 휴식형이야? 그럼 이제 숙소 가서 편히 쉬어. 푹 쉬다 가면 돼."
아 이 절 좋다, 맘에 들어. 정말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 훌륭한 절이었다.
예불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캄캄한 산중에 예쁜 등이 켜져 방으로 돌아오는 길이 무섭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떠난 용문사 템플스테이 첫날,
나는 미국 대선에 대한 모든 분석과 뉴스를 정독했고, 나의 빈약한 LTE 데이터 한달치를 하루에 다 날리며,
나에게 배정된 방 이불을 거의 벗어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