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살기

내 속도를 지키며 가는 삶

by 몽돌

<붓다처럼 살기> 5번째 장의 제목을 보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느리게 살기>라니, 이건 별로 어렵지도 않네. 그냥 뭐든지 좀 천천히 하면 되잖아!


정신없는 한 주를 마무리하며 생각한다.

느리게 살기는 정말 어려운 것이구나.







몇 가지 일을 평소보다 천천히 해보세요. 컵을 천천히 입에 가져가 보고, 식사할 때 서둘러 먹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내 이야기를 시작하고, 회의 장소에 달려가지 말고 느긋하게 걸어가 보세요. 한 가지 일을 완전히 끝내고 그다음 일을 시작하세요. 그리고 하루에 몇 번, ‘천천히’ 길게 숨을 쉬어보세요.


2년 전 장기 휴직을 했을 때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아주 느-리-게 걷는 것이었다. 서두를 일이 아무것도 없는 백수의 신분이 되어, 모두가 빠르게 걷는 대도시의 한복판에서, 나 혼자 쪼리를 신은 채로 아주 느리게, 한 발 한 발 내딛고 싶었다. (쪼리가 포인트다. 쪼리를 신고 빨리 걸으면 발가락 사이가 아주 아프기 때문이다.) 발바닥을 먼저, 발등을 나중에, 그다음 발가락을 땅에 디디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천천히 걷는 것.


그렇지만 실제 휴직기간 동안 나는 집에서 5분 거리의 요가원을 가기 위해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걷는 사람이었다. 아무 급한 일이 없는데도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의 수영장에 가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마을버스를 타고 10분 만에 갔다. 심지어 그 마을버스를 잡아타려고 뛰기까지 했다.


무 급한 일이 없는 백수도 공연히 조급해지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려운데, 밥벌이를 하면서 느리게 살기란 과연 가능한 일일까.





출근길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사람들은 다들 마치 계단을 걷듯 부지런히 걷고 또 걸어 가장 빠르게 카드를 찍고 나가려 애쓴다. 모두가 걸어 올라가는데 나 혼자 서 있기는 어렵다. 잠깐 버티고 서 있어 보다가도, 뒷사람들이 두꺼운 겨울 패딩으로 몸을 들이밀며 걸어올라 가면 나 역시 나도 모르는 새에 걷게 된다. 파도에 휩쓸려가는 부표가 되어버린 기분으로 동동동, 인파에 밀려 떠내려간다.


모두가 분주할 때, 모두가 내 뒤를 떠밀며 빨리빨리! 를 외칠 때, 나 혼자 나의 속도를 지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사무실에서도 그렇다. 긴급 확인 요청을 받은 메일, 상사의 갑작스러운 DB 작업 요청, 오늘 꼭 해야 할 일, 그리고 오늘까지 안 하면 퇴근해도 몹시 찜찜할 일 사이에서, 나는 붐비는 에스컬레이터에 선 사람의 마음이 된다. 그리고 대개는 떠밀려 내려가게 된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면 하라는 대로, 영혼을 비운 채, 둥둥둥.


그래서 누가 떠밀어도 쉽게 떠밀리지 않고 자기 속도를 지키며 사람들을 늘 경외의 눈으로 보게 된다.




#1

일이 많기로 소문난 선배 A는 입사 후 몇 차례의 크고 작은 번아웃을 겪고 또 빠져나왔다. 하루는 그녀가 사무실 책상 앞에서 넋을 놓고 멍을 때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선배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선배는 충혈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오늘 일이 너무 많아서…”


나는 그다음에 올 말은 당연히 “너무 바빠." 또는 "정신이 없네.", "못 살겠어.” 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에 이어진 말은 뜻밖이었다.


"... 혼자 페이스 조절하고 있어.”


그리고 선배는 초탈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절대 위에서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안 돼.”


하아, 순간 나는 선배의 뒤에서 비치는 후광을 본 것 같았다. 인고의 세월 끝에 회사생활의 지혜를 얻은 신선을 보는 마음으로 선배를 바라보았다.


깊은 감명을 받은 나는 큰 스트레스를 받으며 작업 중인 엑셀 파일 우측 상단에 이렇게 썼다.

해달라는대로해주지말것(휘말리지말자)

바쁠수록내페이스지키기

내속도를내가먼저존중할것

그리고 혹시, 이 글씨를 지우지 않은 채로 파일을 상사에게 보낼까봐 걱정되어 빨간색 코멘트를 달았다.

(공유전삭제필요)




#2

일 잘하는 에이스 사원이었던 입사동기 B는 몇 년 전 병가 끝에 퇴사했다. 그 후 몇 번의 이직을 거듭하며 자기에게 제일 잘 맞는 일을 찾아가고 있다. 그는 오랜만에 동기모임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회사에 오면 오늘 해야 할 일 급한 순서대로 1번, 2번, 3번... 리스트업해서 그 순서대로 처리했거든. 근데 요새는 회사 와서 일단 먼저 내 컨디션을 보고, 지금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 내가 하고 싶은 거부터 시작해.”


대화 중에 그냥 흘리듯 지나가버린 이야기였지만,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는 회사로 기울어져 있던 무게추를 회사가 아니라 자신에게 조금 옮겨놓았다. 회사에서 부여한 우선순위가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의 리듬을 존중하며 일하기로 한 것이다. 상사의 말을 법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던 사원이었던 그가, '급한 일부터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먼저'라고 말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마음수행이 있었을지 아마 나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선배와 동기의 말을 떠올리면서 내 페이스를 지키는 것, 내 속도대로 가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옆에서 시끄럽게 꽹과리를 치고 장구를 쳐도 나는 꿋꿋이 내 몫의 장단을 지키는 것, 무엇보다 남의 요구에 맞추느라 무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오늘 아침 출근길, 오늘은 에스컬레이터에서 걷지 말아 보기로 했다. 뒷사람들이 나의 왼쪽으로 가열차게 걸어 올라가는 바람에 이내 한산해졌다. 지하의 에스컬레이터 계단은 아직 어두운 가운데, 환한 겨울 아침 볕이 지상에 가까운 몇 계단을 비추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한 칸 한 칸 올라가고 햇볕은 한 뼘 한 뼘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에스컬레이터가 중반 이상 올라가 그 환한 볕과 마침내 만났다. 분주하게 걸어서 올라갔더라면 느끼지 못했을 따뜻함이었다. 그 햇볕이 빰을 타고 흘러내리는 몇 초 간, 나는 조금 더 품위있는 인간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내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구나. 뒤에서 떠밀어도 나는 느리게 갈 수 있구나.




다들 걸어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나 혼자 멈춰 서 있는 감각을 사무실에서도 연습해 보기로 한다.


절대 비워지지 않은 채 계속 채워지기만 하는 액션 아이템 사이에서, 쌓여가는 [긴급] 요청 메일들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임원 보고가 잡히고, 그래서 숨이 턱 막히며 마음이 조급해지는 순간, 나는 사람들이 밀고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탄 사람의 마음이 된다.


그럴 땐 잠깐 에스컬레이터에서 멈춰 선 사람의 흉내를 내어 본다. 잠깐 탕비실에 가서 따뜻한 차를 타고, 창가로 가서 오후의 햇살을 쬐고, 퇴근하면 뭐할지를 생각한다. 몇 분 안되는 그 잠깐의 시간이 나를 인간답게 만든다.


그렇게 잠시 숨을 고르고 돌아와도 괜찮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시작해도 늦지 않다.

내 속도대로 가도 큰일 나지 않는다.

못하면 못한다고 하면 된다.

떠민다고 떠밀릴 필요 없다.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나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말해주고 있다. 그렇게 나는 에스컬레이터에 멈춰 서 있는 사람의 마음을 매일 연습하는 중이다.


<느리게 살기> 장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이것이다.

내가 처리하는 속도보다 일을 더 빨리 해달라는 사람들의 독촉에 굴복하지 마세요. 그 사람들이 계획을 잘못 세운 것은 내 문제가 아닙니다.

새로운 월요일을 시작하는 모두가, 부디 괴롭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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